퀵바


판타지백과

판타지관련 자료 모음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

작성자
Lv.1 redrush
작성
10.04.26 15:22
조회
2,661

막시밀리안1세와 남독일 용병부대

위대하고 용감한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신의 은총을!

폐하의 밑에 한 기사단이 나타나

피리와 북으로 여러나라를 다니니

이것이 바로 란츠크네히트라 함이로다.

자신을 독일용병(란츠크네히트)부대에 있었다고 한 이엘루크 그라프가 부른 리트(가요)의 한 소절이다. 이 리트가 가리키는 것처럼 란츠크네히트부대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이자, "중세 최후의 기사"라고 일컬어지는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1세와 아주 관련이 깊다. 황제는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설자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강력한 육성자임은 틀림없다. 15세기말부터 16세기, 17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유럽의 전장뿐만아니라 신대륙 남미를 포함해 세계의 여러 곳에 등장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군사역사상 아주 특이한 군사조직 란츠크네히트부대는 이전 장에서 설명했던 부르고뉴전쟁에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부르고뉴전쟁전 샤를 대담공은 현재 알자스지방에 있는 합스부르크 세습영지를 점거하고 부르고뉴공국에 편입시키기 위해 한명의 관리를 파견한다. 하겐바하 폰 페타라고 하는 이 관리는 잔혹한 성격에 용서없는 강권정치를 해서 나중에 농민반란이 일어나 처형되지만, 그는 군사적 식견에서는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시대는 보병의 시대라고 생각한 그는, 하지만 스위스용병은 부르고뉴전쟁에서의 적의 편이었기에, 알자스와 남부 독일에 대량의 돈을 뿌려서 많은 보병을 모으고, 그들에게 스위스식의 장창을 쥐어 주었다. 물론 급조된 장창부대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농민반란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때 만들어진 부대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전신이 되었다.

부르고뉴전쟁이 끝나고 부르고뉴지방과 함께 네덜란드일대 또한 프랑스는 자국령으로 포함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1세는 그것을 저지하기위해 대프랑스전을 결의하게 되는데 그것이 1479년 기네가테전투이다. 문제는 당시 로마왕이었던 막시밀리안1세의 휘하에는 군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로마왕은 신성로마황제의 후계자이지만, 그의 신하에 해당하는 독일의 각 제후들은 모른척 할 뿐이었고,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3세도 당시 대 헝가리전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막시밀리안1세는 스위스용병과 함께 대량의 독일용병을 남부 독일에서 모으게 된다. 그리고 보병방진전법을 채택,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두게 되고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또한 이후 막시밀리안1세는 남부독일 용병부대를 자기 군대의 중추로 삼게 된다.

란츠크네히트의 고향

그나저나 왜 남부독일지방일까? 남부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안에서도 바이에른후국을 제외하고는 유력한 제후가 없는 약소한 제후들의 밀집지였다. 이러한 약소제후국들은 바이에른후국과 황제가 합스부르크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사이에 위치하여 양쪽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게다가 이 일대에는 여기저기 교회령이 산재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시작으로 제국직할의 도시들까지 그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결국 각 약소제후국들은 바이에른후국에 대항하여 슈바벤동맹이라고 하는 군사동맹을 맺게 되지만 이후 바이에른후국이 이 동맹에 가입하면서 대부분의 제후국들은 합스부르크가나 바이에른후국의 예속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남부독일은 북쪽에 비해 토지가 좋아서 전통적으로 남자균일상속제도가 채택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지는 점차 세분화되고 영세농민들만 가득하게 된 상태에서 더이상 나눠줄 토지도 없고, 농가의 차남이하의 자식들은 도시로 난민이 되어 흘러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을 통제할 각 제후국들도 강력한 공권력이 없었기에 농민의 도주, 도망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당시 사회는 태어나서 마을 교회의 첨탑이 보이지 않을 곳까지 나가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의 정착형 농촌사회였다. 하지만 여기 남부 독일지방은 그러한 사회에서 벗어난 방랑자, 무숙자들을 대량으로 안고 있는 지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용병모집에 응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게된 곳은 끝을 모르는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로, 이러한 남부 독일 출신들의 용병들이 란츠크네히트라 불리게 된다.

스위스용병부대와의 차이

란츠크네히트, 독일어로 Landsknecht라고 쓰고, Land는 나라, 토지, 시골이라는 의미, Knecht는 병사(兵士)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란츠크네히트의 어원에는 많은 설이 있다. 우선 Lands가 기병의 창 Lanzen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란츠크네히트는 스위스용병과 같이 보병용 장창을 무기로 한다. 다음으로 스위스용병과 같은 산악지대출신이 아닌 "평지(란트)출신의 병사"라는 의미는 어떨까? 그렇지만 란츠크네히트에는 알고이지방(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의 산악지대)이나 티롤 출신의 병사도 많았다. 도시가 아닌 "시골(란트) 출신의 병사"라는 것은 더욱 이상하다. 란츠크네히트부대에는 그 시작때부터 도시출신의 병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국토(란트)방위의 병사"라고 하기에는 실제로 란츠크네히트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들은 국토방위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용병들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란츠크네히트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당시에서도 란츠크네히트부대와 스위스용병부대의 차이는 확실히 강조되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원 그 자신들이 그러한 차이를 자랑하고 다닌 셈이었다.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과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란츠크네히트의 시작이란 결국 스위스용병부대를 흉내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항상 스위스용병부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전장에서 스위스부대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던 란츠크네히트부대가 어느새 스위스용병부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더니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된다.

1486년경의 사료를 보면 란츠크네히트부대원을 모병하면서 부대에 들어오면 혼자서 스위스병사 2명은 간단하게 상대하게 된다고 선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르고뉴전쟁의 시작무렵부터라고 추정되는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십수년이 지나자 어느새 스위스용병부대와 라이벌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후 두 용병부대는 상호간의 적개심을 불태우며 경쟁하게 되는데, 스위스용병의 관습과 무장, 전법까지 따라하며 성장한 란츠크네히트와 스위스용병부대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유"야말로 우리들의 정체성

"란츠크네히트는 그 복장, 무기 어느쪽도 스위스용병부대보다 훨씬 로맨틱한 색상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우선 복장을 보면 괴이한 정도였다. 소수의 기사군에서 대량의 보병군으로 시대의 흐름이 옮겨간 중세말기, 군주의 국가독점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상비군을 운용할 돈이 없는 군주는 필요시 용병을 사용하게 된다. 당연히 그러한 용병에게 똑같은 제복을 입히는 고용주가 있을리가 없고 용병들의 복장은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돈이 좀 되는 자들은 정말로 화려한 복장을 입는다.

란츠크네히트부대로 들어오는 자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먹고살기 힘들거나 정착하기 힘들어 자신이 살던 사회를 등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살던 마을, 도시를 떠나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자유를 다양한 복장으로 표현하였다. 남근(男根)을 과시하듯 나타내는 가죽 "앞가리개", 거대한 깃털장식의 모자 등등이었다. 이러한 의상이 실제 전투에서 움직임에 불편할 지경이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의상에서 나타나는 란츠크네히트의 자유는 그 조직형태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위스용병부대는 용병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국가관리의 용병부대였다. 이에 반해 란츠크네히트부대는 어디까지나 사기업(私企業)이었다. 모집인이 돈을 뿌려 병사들을 모으는 형태였고, 이들을 모으는 용병대장이야 말로 전쟁기업가인 셈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모병

신성로마황제, 독일의 제후, 제국도시, 프랑스왕, 스페인왕, 영국왕, 로마교황,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 등이 전쟁을 결의하면 몇명의 용병대장에게 모병특허장을 교부한다. 이 모병특허장은 최고사령관과 용병대장간의 용병계약서이자 용병대장에 대한 임명장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제국도시 아우크스부르크가 불크할트 폰 엠스라고 하는 용병대장과 맺은 계약을 보자.

1개연대 12개중대 약 6천의 병사를 확보. 군인복무규정 조건 작성. 고용기간은 약 3개월. 열병의 일자와 장소 확정. 연대장의 월급 20 굴덴. 각 중대는 중대장외 기수가 1명. 중대장 월급은 12굴덴. 기수는 10굴덴. 병사의 월급은 4굴덴. 연대장의 호위병은 8굴덴. 월급의 대상 기간은 28일. 모병시 지급되는 계약금은 일인당 40크로이차 등등의 상세한 조항이 붙는다. 참고로 월 4굴덴이면 직인중 우두머리급의 벌이이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액수였다. 더군다나 월급의 대상기간이 28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30일이라는 것에 비하면 더욱 매력적이다.

여하튼 연대장 엠스와 아우크스부르크시장간의 계약이 맺어지고,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그러면 모병특허장은 공식적인 임명장이 된다. 엠스는 평소 데리고 있던 부하들을 모아 그들중 몇명에게 모병을 명하게 된다. 모병담당은 도시안이나 마을을 돌며 피리나 북으로 사람을 모은다. 그리고 "제군들. 소시민적인 평범한 생활을 버리고, 지금 곧 란츠크네히트부대에 들어가자~ 마을을 버린 제군들은 자유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선전, 그리고 현금을 흔들어 준다. 사람들은 서둘러 서기담당에게 출신지와 이름을 대고, 회계담당에게 계약금을 받는다. 이들은 이것만으로 흥분해버려서 모병리스트에 실린 자신의 이름 뒤에 "장창값 2굴덴"이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열병지에서 장창이 지급된고 장창값 2굴덴은 최초의 급료에서 빠진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되도 이미 늦은 것, 계약금은 손에 쥔 순간 그들은 자신의 몸을 란츠크네히트부대에 팔아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병뒤에는 열병이다. 열병지까지의 가도에는 여관과 술집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우는 여관이나 술집이 끊이지 않았기에 당국에서 항상 적당한 가격으로 잠자리에 식사를 제공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열병지까지의 도중에 계약금만 손에 넣은채 도망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놀라울 정도로 그 수는 적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모병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자는 반드시 열병지에 출두한다고 하는 것이 란츠크네히트의 도덕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유래없는 민주적인 군대

열병지에 도착하면, 여기서부터는 전쟁기업가라고 할 수 있는 용병대장의 실력이 발휘된다. 열병에는 용병대장의 고용주인 최고사령관은 잘 나타나지 않고, 보통은 병참관을 대리로 보낸다. 병참관은 지원자본인과 장비를 점검하고 최종적인 채용을 결정하며 급료와 배속을 정하는데, 이때 보통 장비가 좋으면 급료가 오르게 된다. 따라서 병참관에게 각종 부정행위가 일어나는데 일반적인 것이 다른사람의 무구나 장비를 잠깐 빌린다던지 하는 일 등이다. 무엇보다 극심했던 것이 병력 수를 속이는 것인데, 어린애나 여자들에게 장창을 들려 인원수를 채우게 하는 등의 수법으로, 그중에는 13개의 가명으로 13개 중대에 각각 이름을 올려 돈을 받았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착복한 돈은 대부분 용병대장에게 들어가게 되고 중대장이하는 그러한 돈의 일부라도 챙기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여러가지 부정행위의 결과 1개중대 약 500의 정원은 보통 1할정도가 빈 상태(물론 장부상으로는 정원을 꽉 채운채) 사열은 끝나고 바로 군인 복부규정의 낭독이 있게 된다. 보통 3장으로 나뉘는 군인 복무규정의 첫장은 병사의 공사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규율과 연대장, 장교, 상관에의 복종이 주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병사의 통제를 위한 형리, 임시재판 등의 규정, 헌병 및 사법관의 권한, 연대장의 허가없이 병사들의 집회 금지 등의 규칙도 함께 따르게 된다. 이러한 군인 복무규정의 유효기간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계약종료시점까지로 부대의 해산과 동시에 미움받기 쉬운 형리들은 일찌감치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제2장은 부대내의 예법과 전시관습, 위반규정 등이다. 예를 들어 가짜서약에 의한 신를 모독하는 행위의 금지, 교회와 사제의 보호, 임산부와 부녀자의 보호 등이다. 또한 이중에는 제분소의 보호가 정해져 있는데, 중세 독일에서는 농민은 정해진 제분소만을 사용한다는 제분소법이 있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3장에서는 병사의 권리와 동시에 공동결정권, 자치의 제한 등이 주요항목이다. 즉 부대내 병사집회를 연대장의 허가없이 개최하는 것의 금지, 병사의 급료, 지불 방법, 약탈의 권리 등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병사집회를 통한 공동결정권이다.

위와 같은 낭독까지 끝나면 연대장은 각 중대장, 사법관, 헌병, 병참대장, 병영대장 등을 소개한다. 이후 각 중대별로 중대장이 기수와 하사를 소개하는데, 기수는 그야말로 중대의 꽃으로 중대장, 연대장으로의 출세 코스라 할 수 있었다. 보통 도시귀족의 자제중 모험을 찾아 란츠크네히트부대로 들어온 사람들이나 소영주의 기사들의 자제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하사관의 조수격인 특무병이 병사집회에서 선출된다. 이러한 특무병중에는 아밋서텐이라는 직책이 있다. "전권위원(全權委員)"이나 "외교사절"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이 특무병의 역할은 연대장과 그 고용주인 최고사령관에 대한 부대전체 병사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즉, 란츠크네히트는 연대장등의 군당국의 관리통제를 받지않는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병사집회는 급료 미지불에 대한 항의, "돌격금" 등의 특별수당의 획득, 약탈품의 공동분배 등의 공동결정권을 구사해서 군당국에 의한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란츠크네히트는 군사역사상 보기드문 민주적인 군대였다. 물론 먼저 설명한 군인복무규정에서의 연대장 허가없는 병사집회 금지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여러가지로 군당국은 이러한 병사들의 자치를 제한하려 하였다.

주보상인(酒保商人)의 존재

군대에 있어서 병량지급은 전투력유지의 근본이 된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군당국은 이러한 병량지급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하청받은 외주업자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빵과 고기, 술 등의 병량의 조달과 배분은 민간업자인 주보상인들이 맡았다. 주보상인은 그러한 병량뿐만 아니라 무기, 탄약, 갑옷등과 함께 생활에 필요한 잡화도 취급하였고, 각종 약탈품을 싸게 매입하기도 하였다.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에게 주점이나 도박장을 열어주고, 요리, 세탁, 제봉, 간호를 담당할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필요시는 병사들에게 이런 여자들을 통해 섹스까지 제공하였다. 물론 이들이 연대장을 비롯한 군당국에게 뒷돈을 바치며 이러한 사업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일종의 병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주보상인과 그에 딸린 여자, 예능인 등의 비전투원의 숫자는 상당해서 란츠크네히트 1개 연대가 6천명이라고 한다면 거의 같은 수의 민간인들이 연대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행렬은 행군의 속도를 극도로 늦추게 하여 전투중에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나 오히려 커져가기만 하여 17세기 30년전쟁 당시는 군대의 1.5배의 규모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군대의 조직적인 병참지급은 근대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기업가 연대장의 자격

이러한 특수한 군대 란츠크네히트부대를 이끄는 연대장, 즉 전쟁기업가인 용병대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병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기업주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연대장이 있어야 병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부대내의 재판권, 전투중의 작전지휘 등, 글자그대로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급료를 주고, 먹여주는 것은 신성로마황제, 독일제후, 프랑스왕, 스페인왕 등등 그 어떤 용병의 고용주도 아닌 연대장 그 자체였다. 병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고용주가 누구인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따위는 관심밖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어느 연대장을 따라야 급료도 늦지 않게 받을 수 있고, 많은 약탈품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있었다.

독일용병 란츠크네히트는 스위스용병과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한번 용병으로 일을 시작하면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용병계약기간이 끝나고 부대가 해체되면 이미 월 4굴덴의 급료는 부대내의 도박, 술값, 창녀에의 화대 등으로 날린지 오래고, 갈 곳도 없는 제대병사들은 걸식, 행상, 예능인 등의 비정주형사회에 몸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무전취식, 도둑질, 강도질, 방화, 살인, 약탈 등을 저지르며 지내다 어디선가 용병부대의 모병이 있으면 앞다퉈 모병에 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는 또다시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에 고향이 있다면 그것은 란츠크네히트부대 그 자체였다.

이러한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에게 그 부대를 이끄는 연대장은 뭔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부대원들과는 좀 다른 신분의 사람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입신출세를 꿈꾸며, 부와 권력을 갈망하는 몰락기사, 귀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그들도 그러한 변화에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용병대장인 연대장도 행군중에는 말을 타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연대장은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도보로 전투를 벌였다. 아니 오히려 부대의 맨앞에 서서 진두지휘를 하지 않으면 안됬다. 고귀하고 용감한 기사가 보통때라면 상대도 하지않을 비천한 출신의 보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한다는 것, 말에서 내린 다는 것은 기사로서의 긍지를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란츠크네히트의 육성자는 스스로 말에서 내렸다. 기네가테전투에서 막시밀리안1세는 전투중 일순간이긴 하지만 창을 손에 쥐고 보병의 맨 앞열에 섰었다. 1485년 간시(市) 입성시에는 이 로마왕은 창을 어깨에 매고 그의 란츠크네히트부대를 도보로 앞장서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막시밀리안1세의 행동은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스처는 사실 병사들에게 향한 것만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쓸데없는 기사로서의 긍지를 버리고 병사들의 맨앞에서 서서 싸우는 진정한 전사가 되라! 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

앞장에서의 막시밀리안1세의 기대에 가장 잘 부응한 것이 게오르크 폰 프른츠베르크였다. 그는 민델하임의 소귀족 출신이었다. 장남이 아니기에 상속받을 땅도 적었고, 따라서 군인의 길을 걷다 승진을 거듭해 모병특허장을 교부받는 용병대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고용주는 항상 합스부르크가였고, 막시밀리안1세와 그의 손자 카를5세를 모셨다. 사실 전쟁기업가로서의 측면으로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항상 합스부르크가를 위한 전쟁에만 참가하다 보니 이익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병사 수를 부풀려 급료를 착복하거나 병사들에게 질낮은 장창을 비싼값에 파는 일도 없었다. 병참으로서 식품, 탄약, 무기등을 납품받으며 리베이트를 챙기는 일도 없었고 주보상인들의 뇌물도 거절, 그의 부대는 항상 적절한 가격의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전투에서는 용감하지만 결코 무모하지는 않아서 전황이 불리하면 즉시 퇴각하여 병사들의 개죽음을 막았다. 이러한 프른츠베르크를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라고 병사들을 따랐고, 당연히 그의 군대는 막강했다.

할아버지 막시밀리안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황제가 된 카를5세는 이 프른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히트 최강의 부대를 주력으로 하여 숙적 프랑스왕 프랑소와1세와의 대결전을 벌이게 된다. 1525년 파비아전투였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의 패권을 다투는 합스부르크가와 바로아가의 계속된 사투를 결정지으는 전투이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스위스용병부대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그것이기도 하였다.

파비아전투

1524년 가을, 2만여명의 프랑스군에게 포위된 이탈리아북부의 도시 파비아. 농성중인 4천의 황제군 란츠크네히트부대는 병력부족에 시달리며 이미 말과 노새, 개와 고양이까지 먹어치울 판이었다. 그러나 원군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항복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1525년 1월말, 황제군은 알프스를 넘어 파비아시 교외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군세는 약 2만, 역사상 유명한 파비아전투가 시작됬다.

황제군의 총수는 부르봉공작, 프랑스 부르봉가의 총수로서 프랑소와1세와 대립하고 황제군으로 돌아선 사람이었다. 황제 카를5세는 동시에 스페인왕 카를로스1세이기도 하였다. 그 스페인군을 이끌고 있는 페스카라장군.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황제군의 주력은 프른츠베르크를 시작으로 역전의 용병대장들이 이끄는 란츠크네히트부대였다. 그리고 그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방진이 천오백의 화승총대를 지키는 모양으로 최전선에 섰다.

한편 프랑스군의 국왕 프랑소와1세의 친정이었다. 최전선은 프랑스흉갑기병과 스위스용병부대였다. 당시는 아직 스위스서약동맹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라우뷴덴주의 정예 용병부대, 가스코뉴용병, 영국 리차드 서포크백작이 이끄는 "흑부대(사실 프랑스군에 고용된 독일용병부대)" 등 또한 프랑스군에 참가하고 있었다.

전투는 9시간반동안 계속되었다. 먼저 프랑스군이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밀고들어왔다. 하지만 프른츠베르크가 이끄는 황제군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방진이 서서히 그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의 뒤에는 천오백의 화승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흉갑기병은 점차 쓰러지고, 순간 프른츠베르크부대가 정면으로 에임스부대가 좌측으로 하여 프랑스 "흑부대"에 돌격하였다. 이러한 전투과정에서 보듯, 화기(火器)가 이제는 전투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변화를 읽지 못한 프랑스군과 스위스용병부대는 무너지고 뒤이어 그라우뷴덴용병, 가스코뉴용병도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패주병사냥은 처참하였다. 그야말로 시산혈해의 참상이었다. 파비아 근처를 흐르는 티티노강까지 몰린 스위스용병부대의 대다수는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떨어져 비명과 함께 숨져갔다. 프른츠베르크의 종군서기관 라이스나는 "신은 이날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라고 쓰면서, 이 파비아전투를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라고 불렀다.

수일후 스페인 마드리드궁정에서 머무르고 있던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에게 "폐하, 대승리입니다. 프랑스왕 프랑소와1세는 우리군에 잡혀서 지금은 폐하의 손안에 있습니다."라는 승전보고를 만족스럽게 듣게 되었다. 포로가 된 프랑소와1세는 마드리드로 호송되어 감금되었다. 그러한 포로의 치욕과 함께, 처음부터 무리가 따랐던 왕의 밀라노 공위의 계승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부르고뉴전쟁에서 루이11세가 프랑스왕가로 편입한 부르고뉴공국또한 합스부르크가로 넘겨주는 굴욕적인 양보를 해야한 했다.

이 마드리드조약으로 샤를8세의 이탈리아침공 이후 계속된 "이탈리아전역"은 합스부르크가의 대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후 란츠크네히트를 포함 용병의 대량실업사태가 오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독일농민전쟁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란츠크네히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농민전쟁이었다. 1525년부터 남부독일에서 시작되어 독일 전토를 뒤덮은 농민반란은 독일사회의 변화속에서 농민들이 점차 예농화(隸農化)되는 과정에서 쌓인 불만과 함께, 당시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농민반란을 부정하였고, 그에 힘을 얻는 독일의 각 지방영주들은 농민반란의 진압에 나서게 된다. 물론 그 진압군은 란츠크네히트부대였다.

문제는 란츠크네히트부대의 대다수가 농민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권력자에의해 같은 계급출신들끼리 서로 죽여하는 참상을 거부하고 농민군으로 돌아서는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자신들이 갈고 닦아온 전투 노하우를 농민군들에게 전하게 된다. 따라서 농민군은 점차 란츠크네히트부대와 같은 조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발생적인 농민반란이 점차 각 지역간의 연계도 이루어지면서 지방영주들의 대규모 진압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낸 것도 이러한 란츠크네히트부대원 출신자들의 활약덕분이었다.

남부독일 농민반란 진압의 주역, 슈바벤동맹군의 중심인물이었던 바이에른후국의 관방장 레온할트 폰 에크는 농민진압에 란츠크네히트를 투입하는 것의 위험성을 논하고, 보헤미야나 발칸반도의 용병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헤미야용병이란 마르틴 루터이전의 보헤미야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며 화형에 처해진 얀 후스의 혁명파전사들의 계보를 잇는 용병들로서 이후 란츠크네히트, 스위스용병과 함께 유럽용병시장의 인기를 얻으며 주로 대 오스만투르크전에서 다수 투입되었다.

에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귀환하고 있던 대량의 란츠크네히트부대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실상 대다수의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도 그들 자신의 실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농민부대를 진압한 란츠크네히트부대의 부대원 한명은 "나는 내 자신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서약으로 나리님의 군기에 묶여 있는 것이다 / 너희들을 적으로 삼는다고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결국 농민반란은 진압되었다.

삿코 디 로마

한편, 마드리드에 유폐되어 있던 프랑소와1세는 드디어 귀국이 허락되었다. 프랑소와1세는 조국 프랑스의 땅을 밟자마자 강요받았던 굴욕의 마드리드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할 뜻을 나타내었다. 이에 호응한 것이 로마교황 클레멘스7세였다. 교황은 반(反)합스부르크 신성동맹을 제안한다. 신성동맹의 신성이란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동맹의 일원으로 로마교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카를5세는 격분하여 로마교황을 징벌할 군대를 이탈리아에 보냈다. 농민전쟁후의 란츠크네히트부대에게 또다시 일자리가 생긴 것이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와 스페인용병부대로 구성된 황제군은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용병에 대한 임금지불이 늦는 것은 원래 자주 있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그 정도가 심각했다. 얼어붙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의 보로냐에 도착한 용병들에게 아직도 반개월분의 급료밖에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프른츠베르크가 이끄는 만이천명의 란츠크네히트부대는 그의 약속을 믿고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봉공작을 총수로 하는 스페인용병부대에는 이미 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527년 3월, 드디어 반란이 일어났다. 스페인용병은 부르봉공작을 피의 제물로 삼으려 했지만, 부르봉공작은 프른츠베르크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이제는 스페인용병들의 분노가 란츠크네히트부대까지 전파되었다. 그들은 즉각 병사집회를 열고 급료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진군하지 않는다고 뜻을 모았다. 프른츠베르크는 "로마에서 제군들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설득했지만, 병사들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들은 결국 "우리들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 프른츠베르크에게 창을 들이대었고, 이것이 충격이었을까, 그 순간 프른츠베르크는 뇌졸증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며 망연자실 서있던 병사들 가운데 누군가가 "로마에는 금이있다. 금이다. 로마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병사들은 프른츠베르크의 시체를 뒤로 한채 스페인용병을 선두로 로마로 질주하였다.

1527년 5월6일 아침, 란츠크네히트부대, 스페인용병부대, 이탈리아용병부대의 총합 2만의 군세가 로마성벽 앞에 섰다. 최초의 공격에 황제군 총사령관 부르봉공작이 유탄에 맞아 전사, 이제는 완전히 무통제가 된 황제군이 금세 약탈자로 변하였다. 보통 약탈은 3일로 정해지지만, 이때 황제군은 8일간에 걸쳐 로마시를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 도시의 파괴라고 하기보다는 한 문명의 파괴다"라고 에스트라무스가 말한 악명높은 "로마약탈(삿코 디 로마)"였다.

남미까지 사악한 전쟁을 수출

"로마원정. 이익 만5천굴덴"이라고 용병대장 세바스찬 세르토린은 자신의 수입장부에 적었다. 그가 말하는 로마원정이란 "로마약탈(삿코 디 로마)"을 말한다. 츄빙겐대학에서 학위까지 받은 이 인텔리 용병대장 세르토린은 용병대장도 교묘히, 비양심적으로 굴면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실천해 보인 전형적인 전쟁기업가였다. 그는 프른츠베르크 밑에서 수업을 받았지만 프른츠베르크와는 달리 고용주는 누가 되던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프른츠베르크의 경우가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육성자 막시밀리안1세가 황제가에 대한 충성을 부대에 요구하였고, 이후 합스부르크가에서도 특히 프랑스왕가의 용병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도 여러번 내렸지만, 그것을 어긴다고 해서 란츠크네히트부대를 벌하기에는 그들을 이용해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합스부르크가 그 자신의 목을 죄는 꼴이었다. 그리하여 란츠크네히트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등장하게 되고, 프랑스는 물론, 남미까지 사악한 전쟁을 수출하게 된다.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의 잔학한 행위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것이 란츠크네히트부대의 남미원정이었다. 1526년 황제 카를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금융업자 베루자가(家)에 대해 막대한 자금원조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교환조건으로 남미 베네주엘라에 대한 전면적인 통치권을 양도하였다. 베루자가는 즉각 용병대장 니콜라우스 페더만과 용병계약을 맺고 란츠크네히트부대를 베네주엘라에 파견하게 된다. 이때의 란츠크네히트부대는 군대라고 하기보다는 부랑자 집단에 가까웠다. 스페인인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비판한 라스 카라스는 란츠크네히트부대에 대해 "독일인들은 지금까지 서술한 스페인 무법자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잔혹하고 잔인하게 그 지방(베네주엘라)를 침략했다"라고 말했다. 이 침략은 결국 베네주엘라에 "황금의 도시(엘도라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베루자가가 돈만 많이 드는 베네주엘라 경영에서 손을 떼고 스페인왕가에 그 권리를 돌려주면서 끝나게 된다. 남은 것은 오로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악명뿐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악명

앞장에서 소개한 이엘루크 그라프의 리트에서 란츠크네히트를 "폐하의 밑에 한 기사단이 나타나"라고 서술하였다. 이는 마치 란츠크네히트를 중세전성기의 기사수도회(騎士修道會)의 후예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수도회란 한마디로 수도회와 기사의 신분을 하나로 한 단체로 십자군원정당시 하나둘씩 창설되었다. 성요하네기사단, 템플기사단, 독일기사단이 삼대 기사단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기사단의 후예임을 내세우는 란츠크네히트는 자신들을 신이 만들어낸 3개의 신분,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밭을 가는 사람" 중의 "싸우는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믿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이러한 기사수도회중에는 실제로 돈에 고용되서 전쟁에 참가한 곳도 꽤 많았기 때문에 용병부대와 기사수도회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란츠크네히트는 그 자신들을 "자유로운 전사", "용감한 전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베네주엘라의 일을 꺼낼 것도 없이 "로마약탈(삿코 디 로마)"로 란츠크네히트의 평가는 정해져 버렸다. 란츠크네히트의 고향 독일남부, 슈바벤지방에서 태어난 16세기 신비주의자 세바스찬 프랑크는 란츠크네히트를 "그들은 자신들을 용감한 전사라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용감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주스러운 말을 내뱉고, 목을 조르고, 강탈하고, 약탈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살인이나 파렴치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처녀를 능욕하고, 약자를 습격한다...." 등의 말로 탄핵하고 있다.

이와 같이 란츠크네히트는 여러곳에서 공포에 둘러싸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악명은 "로마약탈(삿코 디 로마)"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때부터 란츠크네히트는 그 붕괴의 제 1보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용병의 수요과다시장이었던 16세기 유럽

그러나 란츠크네히트 붕괴의 조심이 보인 것은 그들의 잔악무도한 행위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두려워할수록 란츠크네히트의 수요는 높아져만 갔다. 유럽용병시장은 완전히 수요가 판매량보다 많은 시장이었다. 다시 시작된 "이탈리아전역"을 비롯해서 전쟁은 여러곳에서 되풀이 되었다. 독일은 1546년 슈마르칼덴전쟁이 시작된다. 일종의 종교전쟁이자 독일내전인 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제후가 슈마르칼덴동맹을 맺고, 황제가 합스부르크를 중심으로한 카톨릭세력과 대치했다. 프랑스에서는 1562년부터 이또한 종교내란인 위그노전쟁이 30년이상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는 영국과 스페인이 각각 상대방을 지원하며 내정간섭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이후 더 큰 전쟁의 무대가 된다.

"페스트, 이리, 투르크" 이것이 16세기 유럽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세가지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술레이만대제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육지에서 바다까지 투르크는 유럽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아니 바다에서는 이미 1538년 9월 무적오스만해군은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와 로마교황이 베네치아의 요청으로 파견한 기독교연합함대를 그리스 서부해안 프레베사만에서 무찌르고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를5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왕이 된 펠리페2세는 로마교황, 베네치아, 제노바, 사보이, 나폴리 등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유럽국가의 연합함대를 결성하고 그 유명한 레판트해전에서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당시 해전은 아직 함선간 포격전보다는 배와 배가 접근하여 육상전과 같은 전투를 벌였는데, 레판토해전에서 이 역활을 담당했던 것이 란츠크네히트부대였다. 이처럼 당시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란츠크네히트 또한 쉴틈도 없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렇다면 란츠크네히트 붕괴의 조짐은 어디에서 보인 것일까?

봉건제도에서 군사시스템에서 용병제도는 분명 시스템밖의 조직이었다.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그 기사계급을 차지하고 있던 중소 귀족 영주들, 즉 중간 권력자들 또한 함께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소 귀족의 몰락은 대귀족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고, 군주는 이들 귀족의 군사력 대신, 대량의 보병, 즉 용병을 동원하여 점차 국가권력의 독점을 이룩하게 되었다. 앞서 서술했던 것과 같이, 란츠크네히트는 비교적 상당한 민주적인 군대였고, 그들 자신이 추구하는 자신들의 정체성 또한 자유였다. 하지만 군주에 의한 권력독점이 진행되면서 란츠크네히트들에게도 한 군주에 대한 충성심또한 요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급료를 지체하지 않고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쟁시 필요할 때만 소집해서 그때만 급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닌, 평시에도 급료를 지불하면서 자신의 군대로 묶어두는 것이었다.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육성자이자 최대 고용주였던 합스부르크가조차 전쟁시 동원한 용병부대에 대한 급료지급도 가끔씩 늦춰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였다. 다른 유럽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시, 평시를 막론하고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서 항상 자국의 군대로 유지하는 것, 즉 상비군적인 용병부대를 만들 수 있는 재정적 힘을 가진 국가는 당시 유럽에는 없었다. 군주의 국가권력의 독점이 그러한 재정적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진행된 것은 30년전쟁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30년전쟁에 앞서 당시 유럽의 최고 부자국가였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란츠크네히트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군제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페인제국의 생명선

장창부대의 사다리형 편성이라고 하는 스위스풍 전술이 확실히 시대에 뒤쳐졌을때, 군제개혁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글자그대로 "돈없는 곳에 스위스병사는 없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용병부대의 본질을 그 뿌리서부터 뒤집는 것이었다. 여하튼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영지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카를5세 이후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1세가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상속받았고, 장남 펠리페2세가 스페인왕이 되었다. 이렇게해서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야 등의 거느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스페인, 남미대륙, 그리고 네덜란드를 거느린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로 분리된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 있어서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존재였다. 네덜란드 17주는 이탈리아의 1/5정도의 면적에 불과했지만 350여개의 도시가 번영의 절정에 달해있었다. 세계무역의 중심이었던 네덜란드에서의 세금은 남미대륙에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오는 금과 은의 총액보다도 많았다. 금이나 은의 광맥은 언젠가는 다하겠지만, 네덜란드라고 하는 부의 광맥은 마를줄을 몰랐다. 여하튼 이러한 남미의 금,은과 네덜란드에서의 세금 등으로 쌓이는 부에 정작 스페인 본국은 자국의 산업발전에 태만하게 되고, 단순한 소비위주의 경제로 전락하게 된다. 게다가 스페인은 카톨릭 광신국가였다.

펠리페2세는 농업을 장려하면서도 농업에 관련된 토목의 전문가들이었던 무어인들을 이교도라고 탄압하였고, 무적함대 건설을 위해 무수히 많은 나무를 베어 토지를 황폐하게 하였다. 또한 유태인들을 추방한 덕분에 스페인의 금융시스템은 파괴되어 남미에서의 막대한 금과 은은 국제금융업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펠리페2세는 3번에 걸쳐 파산선고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스페인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유럽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어느정도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감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에게 자신의 직업 또한 그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설교한 것이 칼뱅파였다. 농민전쟁에서 현실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을 금지한 루터와 달리 칼뱅은 현재의 주권에 대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저항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상업이 융성했던 네덜란드에 이 칼뱅파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막기위해 스페인에서는 철저한 종교탄압에 들어가게 되었다. 네덜란드 각주에 설치된 종교재판소에서는 수많은 네덜란드 시민들이 이단심문에 걸리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펠리페2세가 파견한 알바공작은 네덜란드총독으로서 약 만8천명을 처형하고, 가혹한 세금을 물리는 등의 악정을 거듭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과세로 인해 네덜란드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된다.

1568년 네덜란드 17주중 자유도시가 많았던 북부 7주는 드디어 반란의 깃발을 들게 된다. 이후 80년간 지속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지도자는 13세기말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던 독일의 명문 낫사우가의 혈통인 오라니에공작 윌리엄1세와 에그문트백작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스페인군의 군사적우세에 밀려 에그문트백작은 알바공작에게 처형당하게 된다. 윌리엄1세는 간신히 독일로 도망쳐 권토중래를 꾀하게 되었다. 1578년 윌리엄1세는 유트레히트동맹을 결성하고 네덜란드 북부 7주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된 윌리엄1세는 1584년 카톨릭 광신주의자인 제랄에게 암살당한다. 물론 스페인은 이러한 독립선언을 인정하지않고 독립전쟁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윌리엄1세의 장남, 마우릿츠 오라니에가 새로운 네덜란드의 지도자로서 선택되어 대 스페인전쟁을 이끌게 된다.

마우릿츠의 네덜란드 군제개혁

마우릿츠는 독립전쟁 초기 패전의 원인은 네덜란드독립군의 군사기구에 있다고 생각했다. 독립군이 고용한 용병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스페인의 압도적인 군세에 도주할 뿐이었다. 따라서 마우릿츠는 동생 프레드릭 핸드리크, 사촌형제인 지겐후작 요한 등과 협력해서 대담한 군제개혁을 착수하게 된다. 참고로 지겐후작 요한은 독일의 지겐에 유럽 최초의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었다.

개혁은 우선 병사들에게 급료를 확실히 지급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로서 병사들의 사령관에 대한 반항의 원인을 제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엄격한 훈련과 군율을 네덜란드군의 중심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평시에도 3만의 보병과 2천6백의 기병이 상비되어, 대포의 집적소도 확보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놀라운 일은 병사들의 급료가 확실하게 지급되어, 병사들의 기강확립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신의 집이 병사들의 숙사가 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내나 딸을 병사들과 함께 나눈채 집을 비우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베네치아공화국의 네덜란드주재대사가 본국의 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베네치아대사가 놀란 것처럼 유럽 어디에도 이와같이 기강이 바로선 군대는 없었다. 마우릿츠의 군제개혁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전투에 필요한 토목공사에 대한 자세도 네덜란드군 병사들은 다른 용병부대와는 달랐다. 당시 공병은 천시받는 병과였다.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은 그런 것은 우리들 자유전사가 할 일이 아니라고 참호를 파는 일따위는 일절 손대려 하지 않았다. 공병은 란츠크네히트부대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공병대의 깃발도 비단이 아닌 아마포였으며 자수등으로 마크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천에 직접 그린 조잡한 것이었다. 또한 공병의 모집에서는 보통 란츠크네히트부대원을 모집할 때처럼 악대가 풍악을 울리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스위스용병부대, 스페인용병부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네덜란드군의 병사들은 적극적으로 삽을 들고 토목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결국 참호를 활용한 마우릿츠의 전술에 고전하게 된다.

또한 마우릿츠는 스위스식 밀집방진의 진형을 바꿔서 많은 종열(縱列:세로줄)로 편성한다고 하는 획기적인 전법을 만들어 내었다. 방진전법에서는 1개중대 400에서 600명의 보병이 필요했지만, 이 진형에서는 백명정도로 충분했다. 남는 보병에게는 화승총을 소지한 "소전투대"를 편성하고, 본대의 창보병과 나란히 배치했다. 이러한 종열을 이용한 전법은 사실 동로마제국황제 레오3세(717-741)의 전술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네덜란드에 신설된 라이덴대학에 초빙된 리프시우스라는 당대의 고대로마관련 최고의 문헌학자에 의해 레오3세의 저서가 번역되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마우릿츠는 장교계급을 새롭게 일신한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연대정은 전장까지는 말을 타고 갈지라도, 전투가 시작되면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그때의 연대장은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1명의 병사와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마우릿츠는 중대의 명령계통을 명확히 했다. 중대장이 스스로 지휘관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휘관의 명령이 정확하게 전달되기 위한 필요최저한의 명령어, 호령어가 새롭게 정해졌다. 또한 란츠크네히트중대의 약 1/4정도 인원인 네덜란드군 중대에서는 명령, 호령이 정확하게 전달되기 위해 엄격한 침묵이 요구되었다. 이와같이 네덜란드군의 완벽한 군의 통제를 이루어갔다. 란츠크네히트부대나 스위스용병부대가 1천명의 병사를 배치하는데 1시간이 걸린다고 한다면, 네덜란드군은 그보다 배는 많은 병력을 20분만에 진영을 갖추게 하였다.

란츠크네히트의 부대원들은 앞서 말한듯이 자신들이 자유전사라고 하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한 사상은 사실상 조직적인 전투를 저해하는 요소였다. 네덜란드군 병사들은 "나"라는 의식을 적극 억제하고 공병이든, 창보병이던, 화승총병이던 정말로 칼뱅파의 사람들답게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급료의 확실한 지불, 엄격한 훈련과 군기강의 확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네덜란드 독립군은 종주국이자 당시 유럽의 초강대국 스페인군과 상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군의 상대였던 스페인군의 주요한 진형은 1534년 스페인의 장군 코르도바가 고안한 테르시오라고 하는 진형이었다. 그것은 스위스식 밀집방진을 수배로 확장한 형태로서 화승총병과 창병으로 이루어진 1중대 250명, 10-12개중대 약 3000천명으로 이루어졌다. 횡으로 100, 종으로 15열 정도의 창병이 늘어서고, 그 사방을 화승총병이 둘러싸며, 각각의 구석에는 화승총병 밀집부대가 배치된다고 하는 그야말로 적을 두렵게하는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은 형태였다. 물론 기동성이 떨어지고 부대의 방향전환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 대단한 훈련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시에 도시의 빈민층이나 농촌의 소작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보병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스위스용병부대, 스페인용병부대, 스코틀랜드용병부대, 그리고 란츠크네히트부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분위기에 휩싸여 그저 창을 들고 전진할 뿐이었다.

보병, 기병, 포병의 확립

마우릿츠의 군제개혁이 목표로 한 것은 앞장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른, 보병전에 있어서도 보병전의 프로에 의한 전투이자,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행동하는 전투집단의 형성이었다. 따라서 부단한 군사훈련과 엄격한 군기강확립이자 급료의 영구적인 지불이었다. 이렇게 네덜란드군은 프로 보병부대가 되어갔다. 그것은 기병또한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군의 기병은 결코 기사가 아닌, 단순히 말을 타고 있는 병사일 뿐이었다. 중무장의 갑옷도 없이 기사의 창도 없이, 검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거대한 전투집단에서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싸우는 병사였다.

또한 마우릿츠는 포병의 개혁을 시작한다. 당시 포병은 공병과 마찬가지로 보병에게는 천대받는 병과였다. 란츠크네히트중에는 포병을 악마의 수하라고 부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사실 그것은 포병들이 가지는 폐쇄성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포술은 특수기술이었다. 란츠크네히트들처럼 어느날 갑자기 쟁기를 버리고 창을 듬으로써 란츠크네히트의 일원이 되는 것과는 달랐다. 포병대는 전문가집단으로서 비밀결사에 가까운 일종의 동업자조합이었다. 이러한 폐쇄성은 15세기중반 한 독일인 포술관계자가 화약제조, 대포단조, 장진, 조준, 발포의 기술을 기록한 "화기독본(火器讀本)"이 16세기에는 인쇄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우릿츠는 대포의 경량화와 포병대의 폐쇄적인 성격을 바꿔서 보병, 기병, 포병의 3개 병과를 조합하여, 보다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군대를 만드려 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약진

이러한 마우릿츠의 군제개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북부 7주)는 대 스페인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남부)까지 침공한다. 그에 더해서 1585년이래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은 공공연하게 네덜란드 북부 7주를 지원하게 된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에 펠리페2세는 1588년 131척 2만4천명의 병력을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영국으로 출격시킨다. 하지만 무적함대는 영국의 사략함대 제독, 즉 바다의 용병대장에 해당하는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함대에 의해 괴멸되고 스페인은 제해권을 잃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과 포루투칼에 의해 독점되었던 동양과의 무역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참가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국책회사인 네덜란드연합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동양진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세계최초의 주식회사는 3천척의 배를 거느린 군사회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동인도회사가 거느린 네덜란드 해군은 서인도제도에서 스페인을 향한 배를 약탈하기 시작, 스페인군이 네덜란드 남부에 주둔시킨 군대의 급료지불조차 어렵게 한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독립을 얻어내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독립은 스페인, 네덜란드 2개국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이 당시 유럽의 정세였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유럽의 세력지도 자체를 크게 뒤바꾸는 것이었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로마교황 등등의 유럽의 모든 열강들이 그 문제에 얽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증유의 국제전쟁이었던 독일 30년 전쟁의 무대가 펼쳐지게 된다.

마우릿츠의 군제개혁은 네덜란드 1개 국가에서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고대 그리스이래의 가장 중요한 군사제도의 하나였던 용병에 의한 군제도가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이 시기까지 유럽 각국에 있어서 용병부대는 군사기구의 중추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펼쳐지는 독일 30년 전쟁에서는 사상최대의 용병들이 투입되게 된다. 마우릿츠의 군제개혁이 유럽각국에 침투하여 국민군(國民軍)이 성립되는 것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작성 : 강영훈

스위스 용병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8A%A4%EC%9C%84%EC%8A%A4_%EC%9A%A9%EB%B3%91#.EC.9A.B0.EC.9C.84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판타지백과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29 종족 내가 생각해본 자그마한 종족 - 더스트(Dust) +4 Lv.1 이온음료ㅋ 10.08.18 1,254
428 용어 제 소설속 방패기술 +1 Lv.18 리안토니오 10.08.14 1,732
427 종족 제가 만든 종족 - 프로스트(Frost) +7 Lv.1 데블론 10.08.09 1,216
426 무기 더크(Dirk) +3 Lv.7 염화질소 10.07.18 1,182
425 무기 스틸레토(Stiletto) +4 Lv.7 염화질소 10.07.18 1,376
424 무기 소설에 흔히 나오는 판타지 무기들 -기사- +17 Lv.1 DHKERS 10.07.14 3,233
423 종족 걍 만든(1)-(몬스터)이루전- +7 Lv.1 마의 조각 10.06.26 1,196
422 종족 내가 만든 종족-룩스 루나이(lux lunae) +11 Lv.27 하츠네미쿠 10.06.26 1,886
421 상식 절대주의 개관 +3 Lv.1 redrush 10.06.21 2,117
420 상식 범선의 역사와 종류 +4 Lv.1 redrush 10.06.21 3,401
419 종족 제가 가진 정령에 대한 정령관 +4 Lv.1 하느구름 10.06.20 2,009
418 문화 유럽 중세 성에 대해서 알기 +3 Lv.1 여름빛하나 10.06.20 3,219
417 신화 천지창조 - 3마리의 마수 +6 Lv.10 Spaz 10.06.15 2,380
416 종족 타락천사 푸시퍼에대한 질문요 +9 Lv.1 스릭스 10.05.27 1,531
415 계급 중세유럽 직위 귀족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기사 +4 Lv.26 웅곰 10.05.18 7,141
414 신화 늑대인간과 흡혈귀 +8 Lv.2 악식가 10.05.13 1,772
413 용어 바람의 이름 +4 Lv.1 redrush 10.05.12 2,425
412 무기 판타지 등장하는 무기들과 방어구 +6 Lv.2 악식가 10.05.07 2,739
411 신화 한국의 신화 +4 Lv.1 까만고양이 10.05.05 2,061
410 상식 흑마법은 서클별 마법이 따로 있나요? +7 Lv.1 백수남자 10.05.04 2,532
409 오컬트 제가 사용하는 판타지 세계의 마법관입니다.~ +3 Lv.27 하츠네미쿠 10.04.28 2,217
408 계급 뜻있는 이름들 +13 Lv.2 악식가 10.04.27 3,376
407 상식 소설등장인물 이름 자료 +4 Lv.2 악식가 10.04.27 3,764
» 상식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 +3 Lv.1 redrush 10.04.26 2,661
405 상식 중세유럽 복장 +2 Lv.1 redrush 10.04.26 5,266
404 문화 중세시대 화폐 단위와 물가. +9 Lv.1 읽어볼래 10.04.22 9,319
403 문화 작명에 참고할 수 있는 이름들. +9 Lv.1 읽어볼래 10.04.20 5,622
402 상식 마법의 정의 1~9서클 +23 Lv.11 김청 10.03.28 7,750
401 종족 몬스터들 A~Z +4 Lv.11 김청 10.03.28 3,697
400 종족 천족의 정리 +2 Lv.11 김청 10.03.28 2,154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