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시 하
작품명: 무제본기
출판사: 청어람
출간일: 2008년 6월 14일 // 1,2권 발행
<미리니름(스포일러) 없습니다. 기본적 설정만.>
작가 시하는 전작 윤극사전기에서 강한 인상을 주었고 신작 무제본기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몽환적인 내음을 풍깁니다. 익숙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세상은 독자를 예측불가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그러한 기묘한 주술적 능력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서 기인합니다.
글에 세월을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글을 무겁고 딱딱하게 적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장중함 속에 부드러움을 품을 줄을 알아야 하며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마치 지식을 채우고 비워내는 과정 속에 퇴적된 지혜가 생각의 빗자루에 쓸려 세상에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글은 자연스럽고, 또한 부드럽습니다. 때문에 독자를 편하게 만듭니다. 이야기를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가독성이 높다고 우습게 본다면 큰 코 다칩니다.
한 입 거리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가 한 꺼풀 한 꺼풀 껍질을 벗어 나가기 시작하고 미각을 넘어 어느 순간 호흡마저 잠식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설에서 흠칫 깨어나게 되면 후욱 하고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놀라지요. ‘어라, 이 작가는?’
그렇게 독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그가 마주나무에 매인 소를 풀러 멍에를 얹었습니다.
감히 전인미답의 초지에 쟁기질을 하겠다는 포부로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는 가히 신화에 근접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기원전의 고대세계를 소설에 끌어오겠다며 나섰습니다
“무공이 마법과의 친연(親緣)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화와 전설이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명(未明)의 시절!”
무의 시초이자 시조인 무제(武帝)들을 소설의 축으로 삼아 무의 역사를 체계화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작가 시하는 결국 첩첩히 쌓인 수천년의 먼지를 걷어내고 춘추전국시대 전국칠웅의 화려한 빗장을 열어 우리의 앞에 대령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무제본기입니다.
기원전 4세기 전국 칠웅(연, 제, 초, 한, 조, 위, 진)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격동기였습니다. 수많은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다 사라져 갔으며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유능한 인재를 끌어 모을 때입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총칭되는 수많은 학자들과 수많은 학설들이 번성하였습니다.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일신에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성공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주인공 황산고는 그러한 전국칠웅의 시대에 전쟁을 위한 목적으로 병사(병법가)와 일당백의 무사를 양성하는 마을, 즉 진둔을 이끌던 장군의 손자로 태어납니다. 조산으로 어미의 배를 갈라 태어나야 했던 그.
한없이 약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일선의 전쟁터에서 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공의 씨앗이 발화하게 되면서 누구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신비한 무도의 길을 개척해 나가게 됩니다. 독자는 그러한 황산고의 예측 불허한 행로를 감상하면 되는 것입니다.
독자는 무제본기에서 현실에 혼재된 몽환적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이는 마치 눈에 천을 두르고 작가의 손에 이끌려 걷는 기분과 같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땅의 촉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다보면 어느 순간 눈에서 천이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 대기의 조화가 이룩한 영롱한 빛 무리가 눈에 내려앉습니다.
모르는 사이 가슴이 열려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아아, 이러한 세계가 있었구나....”
무제본기를 읽다보면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신수, 도술, 신선과 같은 신화적 요소들은 송대의 설화집 태평광기나 서유기 등에도 다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무제본기는 그 관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의 도술소설들에선 도술이라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공기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거나 혹은 아예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근원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선택받은 자만의 전유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무제본기는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주인공의 시각에서 법술을 마주하게 하였으며 이에 맞서며 도술이 가진 한계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도술을 행하는 자가 그 비밀과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무지함과 그 구현의 제한점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도술을 만능적인 무언가에서 끌어내리고 지위를 격하시킬 수 있었습니다. 마치 평범한 인간이라도 그 원리와 비의를 배운다면 이를 얼마든지 익힐 수 있을 거란 직관을 가지게 만듭니다.
독자가 몽환적 요소를 마주하면서도 현실감이라는 굵은 끈을 부여잡고 놓치지 않게 되는 데에는 그 외에도 또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독자의 머릿속에는 기존의 무협적 세계관이 충실히 들어 차 있기 때문입니다. 무제본기는 무의 시작을 기술할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후대에 이르게 된다면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무공들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어떻게 무제본기의 도술적 요소가 후대의 무공의 체계로 귀결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절충점을 계산하기 마련이며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 합니다. 예컨대 대부분은 맥이 끊겨 소실될 것이나 일부는 진법과 같은 요소로 승계될 거란 추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덕분에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사이에서도 현실감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괴리감을 즐기는 과정에서 무제본기만의 큰 매력이 탄생한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매력적인 요소는 많습니다.
소설의 시작부터 주인공을 위기상황에 적절히 몰아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살려내었고, 황산고와 더불어 강해지는 동료와의 우정을 바탕으로 정서적 충족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본기가 워낙 좋으니 글솜씨가 뛰어난 작가란 말 이외에 더 이상 세세히 덧붙일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무엇을 예상하건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다만 시하 작가에게 약점이 있다면 작가적 역량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소가 풀을 뜯어먹는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흥취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소설의 스토리를 진행할 때 독자가 손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다소 쉬운 길보단 자칫하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어려운 길을 일부러 찾아 들곤 합니다.
문학가로서의 재능이 더 많은 것을 담길 원하니 이 곳 저 곳에 들러 수레를 채우게 되고, 능력이 큰 만큼 그 욕심도 크다보니 서서히 차오르는 번민에 독자는 버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제본기 집필에 용단을 내리기 전 작가가 틈틈이 창작하여 모았던 주옥같은 신화나 여러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소설을 읽으며 놓치고 싶은 것이 없었으나, 시원하고 호쾌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움이 더 큰 완성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작가가 한 시대의 역사를 과거와 현재를 이어 포괄적으로 담는다는 크나큰 포부를 가진 이상, 가진 그릇만큼 담고 싶은 것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작가적 욕심을 이해하기에 일개 독자로서 그저 웃을 뿐입니다. 작가의 욕심을 그 누가 말릴 수 있을까요.
무제본기는 이처럼 작가의 힘이 충실히 담긴 포만감 있는 책입니다.
마치 우스갯소리마냥 단점조차 장점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만큼 이 소설은 장르문학의 하나의 보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필이 뛰어난 만큼 문장과 대화 하나하나에서 감성적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또 한편으론 읽으며 식자로서의 만족감 또한 얻을 것이 분명하기에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꼭 한 끼 식사를 굶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독자가 섣불리 상상할 수 없을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무제의 좌(座)에 오를 황산고의 성장기. 신화 속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를 저 멀리 시간을 넘어 들고 온 작가의 정성은 당신의 가슴 속에서 깊은 감동을 깨울 것입니다. 그 감동을 배부르게 즐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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