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의 파문제자를 4권까지 보고 나서...
어쩌다보니 한성수의 글은 모두 다 보고 또 평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묘한 인연인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여러 많은 글들을 보
면서 한 사람의 글만 잇달아 평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한성수와 무언가 인연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파문제자에서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결론적을 먼저 말하자면, 그는 전저인 무당괴협전에서 보여주었던, 그
발전 가능성을 파문제자에서 모두 까먹었다.
뒤로 가면서 나아지지만, 1권은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
다. 그나마 그런 현상은 1권 후반 몇십 페이지를 남겨놓고 예전으로 돌아
가면서 상당부분 해소된 것이 다행. 무협소설의 특성상, 1권을 보지 못하
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 책이 팔릴 까닭이 없다.
내가 이 글을 굳이 쓰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한성수는 무당괴협전의 후미에 오면서 흐트러짐을 보였고, 다행히 그것
이 6권으로 마무리 되었으므로 큰 무리없이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글로 오면서도 그러한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바로 무리한 욕심과 자신감
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발전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발전하던 것이 어느 순간에 비약적인 깨달음으로 작가에
게 다가온다. 그것은 각자가 노력한 만큼이다. 어떤 경지에 어떤 방법으
로 다가가는가는 바로 그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한성수는 이 파문제자에서 나쁘게 말하면 너무 자신감에 차서
겉멋으로 글을 썼다. 그로인해서 스토리는 단절되고, 문장은 전혀 이어지
지 않는 날림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는 아마도 상당히 고심했을
것임에도.
수많은 원고를 읽고, 수많은 책을 보면서도 그 말도 안되는 글들도 거
의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는 것은 나의 특성이고 고집이다. 후배들이
아니 그런 것도 다 끝까지 봅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왜냐하면 그래도 어딘가 한군데는 봐줄만 한 곳이 있을 것이므로.
그런데 이 파문제자는 1권을 보다 몇 번이나 덮을 뻔 했다.
아주 심한 노력을 기울여서야 비로소 1권 끝까지 볼 수가 있었다.
파문된 제자는 쫓겨나고...
남은 제자들은 어리벙하기만 하다.
그리고 사부가 죽으면서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사문은 흩어진다.
다시 돌아온 제자에게 남겨진 것은 빚 뿐.....
그런 설정이지만 대체 그것을 제대로 이어주는 부분은 거의 없다. 툭툭
사건을 늘어놓고 그저 독자에게 이어서 보라고 강요하고 있다. 문장은 아
주 힘든 형태로 멋을 부려서 상황전달에서 심각한 문제를 노정(露呈)한
다.
시에는 시어가 있고 소설에는 거기에 맞는 언어가 있다.
무협에는 당연히 무협다운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협에는 어떤 정해진 언어를 써야 한다?
그런 공식은 없다. 있어서도 안된다.
무협을 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쓰고자 하는 무협에 맞는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성수는 큰 실수를 해서 과하게 멋을 부렸다.
당연히 읽기가 힘드는 것이 정상이다.
아마 보통의 독자라면 읽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이번 글에 대
해서 찬반양론이 이는 단초를 제공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2권부터는 제자리를 찾아서 문장도 스토리에 맞게 돌아가고 스토리도
안정화 되어 앞에서 보여주던 그 심한 단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진행이나 기타의 상황은 나름대로 평소 한성수의 기준에 준
하지만 앞에서의 실수를 만회할만한 뛰어남은 보기 힘들었다. 무공에 대
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열심히 설명하지만 그것이 눈에 확연히 들어
오지 않는다.
천년이란 세월을 무명의 문파가 내려온다면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하
지만 실제로 그 전혀! 다른 점을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문파가
천년을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그것을 독자들에게 어필시키고 납득시키려면 뭔가 좀 더 다른 장치를
확연히 마련했어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마교와 연관시키면서 지켜준다라
는 것은 어딘지 이해하기 힘든다.
결국 개연성에서 실패했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나이에 비해서 심하다고 할 정도로 한문을 많이 쓰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쓴 한문이 또 심하게 틀리는 작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문 사용을 대폭 줄였다.
그래서 당연히 실수를 줄어 들었고, 또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
만 여전히 오용이 눈에 띠어 안타까웠다. 그런 오용은 어차피 젊은 작가
들에게 많이 보여 한성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안쓴다면 몰라도 쓴
다면, 작가로서 좀 더 철저히 검증을 하고 사용을 하는 것이 옳다.
작가는 글을 씀에 있어서 겁을 내서는 안되지만 또 지나친 자신감으로
글을 내달려서도 곤란하다.
가장 냉정한 존재로서 사물을 관조하는 존재, 창조주의 역할을 수행해
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무협을 쓰면서 가장 고비가 되는 것이 바로 세 번째다 그런 면
에서 한성수는 이 파문제자에서 고비를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어쩌면 이
파문제자는 새로 만들어냈다기 보다는 본인이 전에 모티브를 가졌던지 조
금 썼던 것을 이제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중견이 아쉬운 시점이다.
그가 작가의 무덤이라는 이 고비를 잘 넘겨 당당한 중견 작가로서 자리
잡기 바란다.
단기 4336년 3월 연화정사에서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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