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터 이곳 무협논단란에 글을 올리라는 부탁으로 가장한 명령을 금강님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거기 글을 쓸 자격이 되는가, 거기 올릴만한 글이 있는가 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압박이 심해져서 결국 한 달에 한 편 꼴로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마침 한상운이 독비객을 모 출판사에서 재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곳 편집장으로부터 추천 및 소개의 글을 써달라는 부탁까지 받아서 이 글을 쓴다.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말은 추천과 소개의 글이라고 해서 듣기 좋은 칭찬만 늘어놓았구나 하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추천할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없는 것을 있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글을 쓰는 재주는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비객은 잘 쓴 무협소설이다.
무협적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장치들을 유효적절하게, 부럽도록 절묘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협이고, 소설로서의 기본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다. 이 양자를 조화시키기란 참 어려운 노릇인데 한상운은 그걸 잘 해냈다. 그러니 한상운도 훌륭한 작가다.
진리를 설파하는 수단으로는 우화가 적합하다는 말이 있다. 무협은 장르소설이 가지고 있는 내적 논리에 의해 우화가 되기 쉽지 않은 분야다. 우화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논리에 밀접해 있고, 지나치게 심각하다. 장르 바깥의 독자에게는 무협이라는 것 자체가 뻥쟁이 작가의 농담처럼 보이겠지만 장르 안쪽의 애호가에게는 무협이란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협이란 우화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것이 독비객을 보면서 깨졌다.
독비객은 잘 쓴 무협소설이면서, 동시에 잘 쓴 한 편의 풍자소설이다.
그것은 현실을, 사회의 어떤 단면만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여러 양상들을, 우리 자신을 풍자하고 있다. 한상운은 데뷔작인 양각양 이후 무림맹 살인사건, 도살객잔 등 이미 여러 작품을 냈고, 독비객은 그 중에서도 초기작에 속하는 두 번째 작품이다. 후기의 무림맹 살인사건이나 도살객잔은 노골적인 풍자, 혹은 농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 있지만 독비객은 풍자를 목적으로 쓰여 지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풍자의 명확한 대상, 그래서 집중적으로 풍자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독비객에서의 풍자는 ‘걸리는 대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무협 이야기를 쓰다가 어느 부분이 걸리면 그대로 비틀어버리고, 꼬아놓았다는 느낌이다. 이건 작가 자신이 가진 현실 감각의 반영이고, 그게 보기 흉하지 않고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 결국 무협의 흐름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한 편의 풍자소설로도 읽히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재능 덕분이다.
이러한 작품을 스물두 살에 썼다는 것이 놀랍고(물론 아주 뛰어난 사람들은 어리다고 걸작을 못 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같은 대개의 범재들에게 그건 아주 부러운 일이다), 그게 두 번째 작품이라는 것도 놀랍다. 첫 번째 작품의 성취도 또한 이미 무림의 전설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몇 가지 사소한 오류나 약점들은 이 작품이 가진 장점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해서 덮어버리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이미 작가는 이 부분을 통과해서 저 멀리에서 달리고 있는데 어렸을 적의 실수를 지적해서 무엇할 것인가. 게다가 수정본에서는 이러한 오류들이 이미 교정되고 보완되었으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한두 가지 더 잘됐으면 좋겠다는 부분은 있다.
첫째로 지나치게 잘 쓴 전투장면의 묘사다. 이게 무슨 고칠점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가가 이 부분도 생각하고 작품활동을 해주기 바란다.
안성기나 한석규가 람보의 근육까지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특히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우람한 근육까지 선보일 필요는 없고, 그것이 오히려 작품의 균형을 망치기도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독비객의 전투장면은 어떤 건 너무나 상세하고 박진감이 있어서 오히려 그 전까지 유쾌하게 이어져 오던 이야기의 흐름과 어색하게 비틀리는 부분이 있다. 그게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근육을 보인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투장면이 적절히 조절되고, 다른 작품에 사용되었다면 칭찬받아 마땅하겠지만 독비객 안에서는 전체 이야기의 균형을 깨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한상운은 초기 작품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입했을 것이다. 묘사의 균형을 잡고, 이야기의 전체 모양을 만들어가는 노련함을 초보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는 대단히 노회한 솜씨를 보인 한상운에게 이런 요구도 지나친 것은 아닌 듯하다.
둘째로는 무협이라는 장르가 가진 원시적인 힘이라고나 할 그런 느낌이 약하다는 것이다. 글을 못 썼어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아 말도 안 되는 듯이 보여도 긴장해서 권을 넘겨가며 끝까지 눈을 못 떼게 하는 그 말초적이기까지 한 욕구와 기대치를 한상운은 아직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사실 무협작가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고, 누구나 일정정도 성공하고, 일정정도 실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걸면 걸리는 대로 맥 놓고 맞을 수밖에 없는 펀치이긴 하다. 때로는 작가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그게 넘치는 만큼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상운의 경우 이건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소설을 쓰는 방향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가 이 부분을 의식하고 쓴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질 것 같은데, 앞으로 그가 이런 것을 쓰려고 할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한상운을 알고 만나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이 인색한 업계에서 천부의 재능을 마모시키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게 지켜보았었다. 그런 위기들을 잘 넘기고 조금도 재능을 깎아먹지 않은 채 잘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쁘다.
한상운이 무협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건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협소설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부분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단지 독자의 눈에 띌 기회와 행운이 적었을 따름이다. 그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은 바로 그 기회와 행운뿐이다.
작가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2003년
화성에서
좌백
주: .도서출판 '씨알'에서 1998년 고월, 한상운 공저로 출간된 판본으로 읽었음.
(지금은 대단히 구하기 힘듬. 당시 출판부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
.공저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출판 관행 상 고월은 이름만 걸어준 것이고
전적으로 한상운 혼자 쓴 것임.
. 3월 경 재출간될 것으로 알고 있음.
(준비중인 출판사 이름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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