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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진향
    작성일
    03.04.18 18:36
    No. 1

    동창서창

    정난(靖難)의 변(變)을 일으켜 제위를 빼앗은 영락제(永樂帝)는 정통파(正統派)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환관을 첩자로 이용하는 한편, 금의위(錦衣衛:親衛軍)에도 같은 임무를 맡겼다. 베이징[北京] 천도 후인 1420년 황제직속의 첩보기관으로 동창을 설치하고 금의위도 여기에 소속시켰다. 그 장관인 제독동창(提督東廠)에는 황제가 신임하는 환관을 임명하였고, 그 밑에 첩형(貼刑) 2명, 당두(頭) 100여 명, 번역(番役) 1,000여 명을 두었으며, 첩형이하의 관원은 금의위에서 선발된 자로 충당하였다.

    처음에는 관리의 부정이나 모반(謀反)의 정탐을 주요 임무로 삼았으나, 차차 민간의 사소한 범죄까지 확대 취급하고, 구금(拘禁) ·처형의 권한을 갖게 되면서 그 폐해가 커졌다. 환관 중에는 이를 통하여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린 자가 많았는데, 헌종(憲宗) 때의 왕직(汪直)과 무종(武宗) 때의 유근(劉瑾)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동창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다시 서창을 증설하고 세력확장에 힘썼으며, 유근의 경우는 내행창(內行廠)이란 것을 새로 설치함으로써 동창 ·서창과 함께 3창이라 불렸다. 그가 죽은 뒤 동창 이외의 것은 폐지되었으나, 16세기 말 서창이 내창(內廠)으로 부활되고, 동창은 외창(外廠)으로 개칭되었다. 즉, 이들 기관은 일반관료에 대항하는 환관세력의 정치적 거점이 되어 명나라 정치에 큰 암영(暗影)을 드리웠다.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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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모모야
    작성일
    03.04.18 23:30
    No. 2

    친절한 답변 감사 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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