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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란

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작성자
Lv.28 애기동백
작성
07.11.24 08:10
조회
2,064

순리(順理)와 이에 역행(逆行)하는 것, 이것이 글이 이루는 프랙탈(Fractal)의 기본이자 더 넣을 수도 없는 장대한 원리이다.

창의(創意)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창의는 순리에 대한 역행의 독특한 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이 될 지, 1년이 될 지, 100년이 될 지, 알 수 없지만 깨어져야할 패러다임이다.

추후에 이루어져야할 창의의 새로운 정의는 "순리와 역행구조의 뒤틀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이 변하고, 강산이 깎이고, 그곳에 빌딩이 세워짐으로 대변되는 변천사는 점점 빠르게 쓰여지고 있다.

인간은 지금보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임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분명한 것은, 내가 수명이 다하여 죽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 인간은 그 스스로의 `틀`을 벗어나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틀` 즉 순리와 역행의 방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도래할 것을 인간 스스로가 예고하고 있다.

무서운 이야기지만, 순리와 역행은 인간의 `틀`의 범주를 넘어 필연적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또는 그렇게 되었다.) 이러한 틀의 범주에서 제시될 수 있는 인간의 사고는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인간이란 그릇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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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 복고풍이다. 인간의 생각의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앞만 바라보고 뛰었고, 복고는 인간이 달리기를 `멈추고`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앞으로 갈 길을 재는 구간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앞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날아 야만`한다. 지금 인간은 활주로의 끝에 온 것이다.

추후의 글은 창의(새로운 개념)의 비중이 날로 높아져 갈 것이다. 앞서 말한 "순리와 역행 구조의 뒤틀림"은 과도기적인 성향이 짙은 정의이다. 기본개체구조의 변환은 컴퓨터의 연산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思卽答)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도 "순리와 역행 구조의 뒤틀림" 즉, 과도기적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제 1의 안정기는 창의에 어떠한 정의를 내릴 것인가? 그것은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찾는다"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달라짐이 없는 정의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규칙(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중에서 많은 점을 인간이 알고 있고, 기존의 글은 그 규칙에 따라, 또는 그 규칙에 소소한 변화를 주어 쓰여진 글이다. 즉, 큰 규칙속의 작은 변화를 다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땅에서 뜀박질을 하면서 발생된 규칙과 창공을 가르며 만들어지는 규칙은 분명 다르다. 나는 과거의 인간으로서 그 비상의 규칙을 `불규칙`으로 본다. 그러므로 미래의 글은 불규칙을 찾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규칙`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써야할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무한하지만, 무한한 생각을 담을 틀은 항상 한정되어왔다는 것을 기억하라. 人之思無限(인지사무한) 人之器限憶(인지기한억)

本1

현세의 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有에서 유를 생산하는 것, 둘째는 무無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두 부류의 작가 모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통의 유는 일반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유를 분해하고 재조합하며 거기에 몇 가지의 유를 합성할 수 있는 것은 범인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무無는 무엇인가? 사실 무는 없다.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다만, 나는 인간이기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무라고 칭하여 약속한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위의 말에 따라 모순이다.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유를 담을 새로운 `틀`을 창조하는 것이다.(여기서의 창조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 언택(言擇)이다.)

그러므로 유의 변화로 글을 쓰는 것과 유의 틀을 창조하는 것은 전자는 안을 풍성하게 함이요, 후자는 안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니, 둘 모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유`라 할 수 있는 것은 세기 조차 어렵다. 이러한 `유`는 모두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유`의 변칙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수작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껏 당신이 읽었던 수작, 또는 남이 말하던 수작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의 변칙을 잘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모두에게 유는 항상 동등한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강남의 재벌가라던지, 판잣촌 거지라던지, 이도저도 아니던지 말이다.

유의 동등은 그 유가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해줌을 말한다. 이러한 동등을 작가는 변칙으로 깨고 있으며, 유의 동등을 글의 진행에 따라 강제로 조정시키고, 아직 창조(여기서의 창조는 발견과 같다.)되지 않은 것을 짐작하여 그 인위적 동등의 변칙에 적절히 분배한 것이 바로 수작의 기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의 변칙을 다루는 작가의 근본된 힘은 동등된 기회를 글의 상황에 따라 인위적으로 바꿔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비평 또한 그 구조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무릇 글이 있어야 비평도 할 수있 듯, 비평은 글을 아주 세밀히 분석하여 섬세히 들여다 본 후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을 비평한다.

그에 추후에 비평은 그 촛점이 규칙적용일 필요성이 있다. 앞서 말한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찾다."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불규칙을 규칙으로 변환하는 작업은 책장을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소설인 경우 직접 규칙을 제시하기 힘드니 더 어려울 것에 무엇을 더 말하랴.

그러나 이 작업은 인간의 등에 날개가 트게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불규칙은 인간의 지향점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에따라 인간으로서의 불규칙은 불규칙은 불가해(不可解)의 규칙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불가해의 규칙이 앞으로의 패러다임이 될 점이라는 것이다. 불가해의 규칙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불러오는 블랙홀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가해의 규칙을 대중적 규칙으로 변환(정제)하여 욕망을 막는 것에 큰 의의를 두개 될 것이다.

적당선의 욕망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문학, 즉, 글이 필요할 것이고, 이 엄청난 사명을 맡은 작가는 당연 그 어깨가 무겁다 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규칙적용`은 당연 인간의 존망이 걸린 문제로 다양한 의견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비평 또한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져 최대한 합리(.)적인 규칙적용을 이루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서 세워야 할 것이다.

반대로 비평이 글을 잡아서는 안 된다.  비평은 글에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글이 나아가야할 부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도울 뿐이다. 정도를 넘는 비평은 과거/현재/미래를 아울러 긍정적효과를 이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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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2 小說

소설은 생산되기도하고, 창조(인간을 기준으로한)되기도 한다. 전자는 당연히 후자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 하지만 현대, 특히 지금 `탈현대`의 과도기에서 소설은 절대 다수가 `생산`되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접하고, 쓸 수 있게 됬으나, 정작 (전업)작가는 금전적이익을 보기 힘들어 부업으로 간간히 하거나, 외면되가고 있다.

소설을 논하는 시점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터넷의 보급은 소설의 대중성을 촉진했지만, 보다 깊이있는 소설은 사라져가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인터넷의 보급` 보다는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인터넷의 장점` 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많은 소설이 생산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소설의 가치값지불을 하지 않아도 불법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고전(근현대~6월민주항쟁)의 노련한 작가는 작품을 문집이나 책으로 올리기에 인터넷에 비해 대중성(파급효과)를 얻기 힘들다. 이러한 현실은 잠정적으로 소설의 퇴보를 논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문제점이다.

따라서 작금의 소설을 논할 때, 개인적 완성도를 논하기 전에 전체적인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면, 위의 문제점을 개선할 방안은 없는가?

매우 지루하고 자주 들어온 말이지만, "의식 개선"이 첫째다. 무얼 하던 결국 인간이 행하고 그에 대한 결과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에서만의 의식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전반적인 의식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각하듯 급속한 현대화가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적 의식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안겨 주었으며, 그 사회를 반영하는 소설 또한 문제점을 낳게 된 것이다.

두번째는 작가의 장인정신에 있다. 창조는 장인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다. 어떤 소설을 쓰든 진정으로 혼과 열정을 담아야 소설의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의 사항이 지켜지면 지금보다는 나은 작품이 많이 나올것이라 본다.

하지만 작가와 사회뿐만이 아니라, 독자 역시 정말 중요한 구성원이다. 작품에 의미부여를 하는, 즉, 작품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바로 독자라는 점이다. 독자에서의 작품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의도한 것을 효과적으로, 일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도와 주는 장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글을 바라보고 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 작가가 그것을 보며 `장치`의 어디가 부적합한지 알아가는 것이다. 즉,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사회, 작가, 독자, 모두가 만들어가는 다시점종합장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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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땅, 하늘, 행성, 계(界), 은하, 우주.

이것들의 공통점은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세상은 가장 작은 것에서 겹이 싸여 가장 큰 것이 된다. 하지만 근원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공간을 점(占)하는 것이 “곡선”이라는 점이다. 땅, 하늘, 행성, 계, 은하, 우주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주 다음 단위에서 곡선이 그것을 이루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애매한 것은 “존재”의 끝이다. 존재의 끝이야말로 우리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볼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존재의 끝은 자아로부터 시작 돼서 자아로 끝난다. 자아의 종말, 즉 죽음이 곧 존재의 끝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사람들은 “소우주”라 한다. 그가 곳 세상의 시작이며 끝이 되니까, 즉 풀기가 불가한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색적인 것은, 이러한 소우주(물론 소우주에서 우주는 포괄적 의미이다.)만이 곡선이 아닌 “직선”을 병용하여 사용한다는 점이다. 직선의 이용은 역행(逆行)의 극(極)이고, 곡선은 순행의 극으로서, 존재 중에서 유일하게 상극이 소우주아래 조화하니, 그것을 인간으로서 표기하기에 제일 적당한 것이 “태극(여기서의 태극은 한자표현이 불가하다.)”이다. 소우주 위에 그려진 태극은 인간의 상상력을 촉진하지만, 세계에 반하는 직선이 세계를 이기지 못하고, 존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곡선, 즉 세계의 힘이 직선을 누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직선이 사라질 때, 태극이 깨어지면서 인간의 “정신적” 수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곧은 정신은 반드시 쉽게 늙지 않는다. 육체적 나이의 감축을 불러올 수는 있겠지만. 다른 것들은 처음부터 세계의 곡선을 따르니 정신은 일찍 죽고,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란 것이 몸을 지탱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엄한 것이다. 그게 살인자든, 노동자든, 부자든, 기부가든. 물론 정신적 나이는 육체가 소멸 되도 따라 소멸되니, 육체를 제 때 죽이기 위하여, 인간들은 그들만의 규칙을 세운다.

그리고 그 규칙에서 살다 인간은 죽는다. 여기서 “죽음”의 정의를 내리자면, 육체에서 정신이 사라지면서 육체를 가짐으로 생긴 “자아”가 사라질 때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영”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것은 다음 쉼터 코너에서 다뤄보겠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의 내용을 지금 논한 것들에 대입하는 것이다. (향후의 패러다임은 인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할 것이다. 가속화의 속도 말이다.) 인간에게 시대의 가속화는 인간 본연의 정신적 성숙, 즉 태극의 노련한 유지능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소우주는 불규칙한 패턴을 계속 받을 것이고, 전에 말했듯이 불규칙은 인간 본연에 반하는 것이라 결국, 소우주에 혼란이 오게 되고 소우주에 바탕을 둔 태극이 흔들리는 것이다. (규칙적 패턴으로 오는 불규칙은 적절히 소우주를 자극함으로서 더욱 완고한 태극을 만들지만, 가속화된 불규칙의 도래는 때린데, 또 때리는…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本3 장르문학

최근 들어 장르문학이 ·킬링타임·용  소설이라며 혹평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어떻게 보면, 그 혹평은 장르문학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장르·라는 것 자체가 특정 장르 안에서만 상상력이 허용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장르문학은 어떤 해법을 생각해야 하는가?

장르문학은 똑같은 세계관에서 각기 다른 인물을 이색적으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곧, 절대 다수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곧 주인공이 되므로, 작가의 사고방식을 경직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너무 글에 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보다 냉철하게 작품 전체를 봐야 한다. 작품이 ·무의미·는 작가로부터 나온다.

단지 주인공의 행보를 써내려가는 소설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비판되어야 할 책인 것이다. 독창적인 주제, 사고방식, 의미부여가 장르는 같아도 새로움을 부여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세상에는 장르문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계열의 문학에서도 ·똑같은 주제를 다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글들이 굉장히 많다. 그것은 장르문학작가가 자각해야할 점이다. 序에서 말했듯이 지금의 장르문학은 복고풍의 무한 반복과도 같다. 원래 복고라는 것은, 진보 후에 일어나는 부작용을 다듬기 위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된 문학의 적응도를 위해, 진보 이전의 문학과 현재의 문학의 조화를 위해, 그러한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장르 문학이 지속적인 진보를 이루어 왔는가? 물론 개인적인 필력은 향상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장르하나의 틀로 복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즉, 진보 없이 의미 없는 복고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작가에게 요구하고 있다. 작가는 무슨 존재인가? 단지 사전적 의미의 직업인가? 작가는 열린 사고를 필요로 한다. 내가 요구하는 “열린 사고”는 매우 광범위하다. 작금의 장르 문학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병아리와 같다. “계란 속의 병아리는 계란이 한 세계이다. 곧, 병아리는 태어날 때 한 세계를 깨야한다.” 라는 것이다.

작가는 지금의 틀 밖의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건 마치 장르 문학에서 혁명과 같다. 물론 혁명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 모두에게 가능성은 존재하고, 이런 가능성을 그대로 묻히고, 단지 현재에 안주하는 작가의 태도를 “비판”한다.

틀을 깨는 것에 대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장르 문학이란 말을 버려라.”라는 말이다. 장르 문학이라는 분류자체가 작가의 사고를 막고 있다. 장르가 문학을 수식함으로서, 문학은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작가는 이 장르 문학이라는 말을 버려야한다.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제목도 바꾸기로 했습니다.  연담지기님께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Comment ' 9

  • 작성자
    Lv.8 트랄라
    작성일
    07.11.24 12:06
    No. 1

    공감합니다.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장르문학을 읽는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1 케찹고추장
    작성일
    07.11.24 13:50
    No. 2

    어려운 말들의 연속이라 읽기가 상당히 힘들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판탄
    작성일
    07.11.24 22:38
    No. 3

    잘 읽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터군
    작성일
    07.11.25 10:34
    No. 4

    재미만을 위해 읽고 싶은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만, 지금 장르 소설에서 재미 빼면 뭐가 남습니까?
    저에게 이미 '장르소설=만화책' 이란 공식이 성립되어 버렸습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57 하늘까시
    작성일
    07.11.26 09:34
    No. 5

    재미만을 위해 읽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봅니다.
    그 재미라는 것은 감동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말초적 흥분이나,
    교훈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지식의 습득 등등의
    여러가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장르문학 뿐아니라 모든 책(심지어 백과사전 까지) 재미로 읽습니다.
    물론 가끔은 필요한 지식을 얻기위해 억지로 책을 읽는 경우도 있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테프누트
    작성일
    07.11.26 13:08
    No. 6

    즐겁게,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의 하나인 독서와 글쓰기. 생각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무거운 말씀이 받아들이기 너무 버겁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91 Nanami
    작성일
    07.11.27 12:27
    No. 7

    제목과는 상반되게 독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에 해당하는 답변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무분별한 인터넷이나 제도장치 등등은 알겠으나 그외에는 ....
    독자에 입장에선 뚜렷한 제 시책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 작가님들이 한 번씩은 읽으면 좋을듯한 글이 많네요.
    같이 토론하고자 무엇이 있을까라는 화두를 던진 것으로 알고 글을 적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시를 못 한 것이 아니라 제시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독자는 좋은 작품을 위해 자신에 소중한 돈을 투자해 가치 있는 책을 보는 독자입니다.
    그에 있어 올바른 자세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에 의견들과 같이 작가나 제도에변화 등으로 변화에 발 맞춰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인터넷 등 그러한 매체로 이용하는 사람이 지금은 많겠으나, 만약 그것을 금지 시킨다고해도 독자에 욕구나 재미 흥미 등을 유발하는 작품이 많이 나온다면 아니 볼 수 없지 않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
    그와 다르게 그러한 작품이 지금 시장에는 점유율이 높지 않은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얘기를 한다면 작가님들에 입장에서는 열심히 글을 써봐야 구매는 하지않고 대여를 하고 인터넷으로 본다는등에 이유를 말씀하실수 있겠으나 이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근본적이 문제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한쪽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올수 없다고 생각 됩니다.
    먼지 좋은 질에 향상이 있은후 좋은 글을 보호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작가와 독자가 '윈윈' 할수 있는 그러한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p.s 절대 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따라야 겠죠.
    '주제' 에 맡게 하나의 의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의도랑 좀벗어났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빅데디
    작성일
    07.11.27 17:51
    No. 8

    살인자라는 어감이 좋지 않군요. 설정 중에 굳이 살인자라는 표현을 넣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마치 유리 그릇에 돌맹이를 얹은 것 같아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빅데디
    작성일
    07.11.27 18:09
    No. 9

    3번 읽으려다 포기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내용을 읽어보면 뭔가 변화를 요구하는 것 같긴 한데 말이죠;; 요지를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괜찮겠지만 아니라면 곤란하네요;
    제 생각은 어느 시대를 가나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섹스는 언제나 즐겁지요. (딱히 다르게 표현할 것이 없어서;) 달라져 봐야 거기지 그 재미가 어디 갈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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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 기타장르 장르문학을 읽는이유. +5 Lv.20 해모수아들 07.11.21 1,512 2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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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 기타장르 책을 펼치는 방법에 대하여. +23 Lv.4 레디오스 07.11.21 2,134 5 / 20
837 기타장르 달빛조각사; 게임판타지와 판타지의 모호성 +26 Lv.1 초매 07.11.21 2,987 8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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