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허상을 쫓고 있다.
0. 서론
우리는 장르시장에 도래한 기나긴 불황에 대해 이때까지 출판사 혹은 작가, 혹은 독자를 문제 삼아 왔습니다.
“잘못되었다! 변화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열심히 이야기 했습니다. 출판사의 관행을 비판하기도 하고 작가들의 프라이드 부재를 문제 삼기도 하고 혹은 독자의 수준을 꼬집기도 했습니다. 대여점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몰랐을 겁니다.
사실 그들에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순간 저에게 화가 날 것입니다. 분명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그들이 어째서 죄가 없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그들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가게 만드는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흐름이라고 합니다. 경제법칙에 의한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고치려 노력하는 것은 헛됩니다. 바로 그걸 알기 때문에 한참 논쟁하며 한탄하던 작가들이 지쳐서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생계가 장르문학과 동떨어진 이들은 잘 체감하고 있지 않지만 현 사태는 분명 파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대처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풍을 바꾸고 독자의 수준과 입맛에 맞는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책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요? 만약 우리가 속고 있다면?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지만 실제로 그들이 독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허상에 속고있을 뿐이라면?
전 이 글을 통해 문제의 본질적 원인과 해결책. 그리고 작가들이 유일하게 찾아낸 자구책이 어떠한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진정한 범죄자는 누구인가.
여기서 잠시 저를 따라 야외로 나와 자연의 순리가 작용하는 비옥한 환경을 상상합니다.
여러분 눈앞에 큰 강이 보입니다. 하류의 자연환경을 촉촉이 적셔주는 강입니다. 이 지류가 키운 숲에서 나온 좋은 목재는 특색을 갖춘 독특한 가구제품으로 재탄생하곤 했습니다.
어느 해 난민(대여점주)이 발생합니다. 관청의 관리(정부)는 일자리 없는 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척박한 농토밖에는 줄게 없었습니다. 그는 지류(장르 문화에 지불되던 돈의 흐름)를 보고 생각합니다.
“아 이 물줄기를 난민들의 땅으로 돌리면 되겠구나.”
그는 하류로 가는 물살에 커다란 암석을 빠뜨려 임의로 둑을 만들었습니다. 물살을 틀어 난민들을 향한 농토로 돌렸습니다. 물길을 바꿔버렸습니다.
이게 문제의 시작입니다.
숲에 물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난민들의 땅에 물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난민들에게 지불해야할 경제적 부담을 숲(장르문학)에 떠안겨 버렸습니다.
처음엔 다 좋아보였습니다. 난민들은 하류의 자연환경에 일정량의 거름을 제공합니다. 비록 많진 않지만 어느 정도 숲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대신 거기서 나오는 땔감을 팔아서 먹고 삽니다. 공생관계입니다. 난민들은 숲에 안정적인 영양공급원이 되어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물 공급이 줄어든 하류의 자연환경은 메말라 가기만 합니다. 자생능력을 잃은 자연은 물줄기론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난민들이 주는 비료에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난민들은 냉철하게 돈이 되는 품종만 선별해 비료를 주기 시작합니다.
외국산 잡목(날림 소설)이 그것입니다. 비록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 正木(소설가)보다 품질이 떨어지지만 잡초보다 빨리 자란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난민들에게 땔감을 공급하는 벌목꾼(출판사)들도 쑥쑥 자라는 잡목들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잡목의 씨앗만 키워 나갑니다.
숲에서 잘 자라던 정목(소설가)들은 그런 차별을 보고 경악합니다.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할 물줄기가 사라지고 이젠 비료를 먹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며 자라난다 해서 그들에게 비료가 더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잡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몸집이 작아졌고 빨리 씨앗을 퍼트리고 빨리 자라납니다. 언젠가 거대한 물줄기가 자신들을 향해 흐를 때 다시 바뀔 거라 변명하며 위기를 넘기려 합니다.
이제 하류의 자연환경은 난민들의 이득에 맞추어 외국산 잡목들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수려한 정목들은 잡목들에 영양분을 뺏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숲은 이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난민들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류의 숲”은 우리나라 장르소설과 만화 등이 자라나는 문화입니다.
여기에 “물살”, 즉 돈입니다. 자금의 흐름입니다. 사람들이 문화시장에 지불하는 돈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살은 좀더 크게 보면 즉 장르시장의 생산물에 돈을 지불하여 문화적 소비를 하는 독자를 말합니다.
숲은 바로 장르문화가 커가는 공간입니다. 그 속의 나무들은 작가입니다. 물살이 숲이 아니라 난민들에게 가기 시작한 이후부터 숲은 자생능력을 잃게 됩니다.
난민들이 제공하는 비료 없이는 영양분이 모자라 살아남기 어렵게 된 숲처럼 작가들 또한 이제 대여점을 떠나 자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자신의 창작물의 수준에 맞는 올바른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난민은 IMF로 인해 직장을 잃은 대여점주들입니다. 이들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 도서대여점을 시작했고 대여점 전체적으로 일정 수량의 책을 구입하여 마치 “거름”을 숲에 공급하듯이 기본적 책값만을 장르시장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장르문학시장에 지불하던 부, 즉 물살을 대여점이 삼키게 되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판매량을 대여점이 독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대여점이 장르시장의 돈줄을 움켜지게 되었고 대여점은 숲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이제 작가들은 마차에 매인 말이나 다름없이 대여점 채찍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뛰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정말 비통하지만 장르문학 시장 전체가 대여점의 노예화 되었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이건 소신있는 작가 몇이 뜻을 갖고 어떻게 한다고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곧 돈이고, 돈이 많은 자가 큰소리도 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게 되었는가?
바로 국가의 정책때문입니다. 이야기에서 관리의 행동은 “정부의 정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장르시장의 생산물에 지불되어야 할 돈을 대여점주를 살리기 위해 물길을 돌리면서 자연적인 성장의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벌목꾼(출판사)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들은 실질적인 돈을 주는 난민들이 원하는 것을 공급해 주었을 뿐입니다. 내가 그러지 않더라도 다른 벌목꾼은 그리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 또한 어쩔 수 없이 잡목에 영양을 공급하고 이를 난민에게 보낸 것입니다.
난민과 벌목꾼, 숲, 물살은 모두가 그저 자신의 직업에 맞는 행위를 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물살을 틀어버려 장르문화에 전해지던 부를 끊어버린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야 말로 장르시장의 질적하락현상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원흉이자 문제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부가 문화로 전환된다는 것은 시드마이어의 문명시리즈에서 시도되기도 하였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개념입니다.
모든 문화는 돈이 유입될 때 황금기를 맞습니다. 문화라는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라 흔히 돈과는 거리를 두며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4명의 천재들이 동시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술가에 대한 그만큼의 대우와 금전적 지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조차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더운 여름에 채찍질당하며 일하는 노예들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무지가 만들어낸 상상일 뿐입니다.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가 “강제적으로 전 국민을 피라미드 건조에 내몰았던 쿠푸왕”을 기술하고 있지만 최근 조사에서는 반대로 드러났습니다. 노동자들이 왕을 높이 받들고 기꺼이 그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의식주 모든 것이 충분히 지급되었고 전용 주택에 살며 노동 후 맥주를 마시고 피로를 푸는 등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집트의 천문학, 건축 관련 기술력을 보면 고도의 지식을 갖춘 전문인력이 필요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정부의 정책적 실수로 인해 부가 직접적으로 장르시장을 향하지 않고 도서대여점을 거쳐 움직이게 만든 순간부터 이미 우리나라의 상상문학이라는 문화적 자원은 볼모지로 변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자생능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던 겁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물살을 다시 숲으로 돌려놔야 합니다. 정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즉 대여점을 없애야 합니다.
안 그러면 숲이 죽어버립니다. 잡목들만 남습니다.
독자, 작가, 출판사 모두 자신의 기능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이클에 대여점이 끼어들면서 문화적 성장에 영향을 미쳐야 할 돈이 그와 전혀 상관없는 제 3자의 생계에 소모되고 있습니다. 대여점주가 잘못인건 아닙니다. 그를 대여점으로 내몬 정부야말로 이 모든 암울한 전개를 만들어낸 장본인입니다.
‘독자가 변해야 한다, 작가가 변해야 한다, 출판사가 변해야 한다, 대여점이 변해야 한다.’
말도 안 됩니다. 누구도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공자왈 맹자왈을 떠나 자본주의 사회가 윤리적 경쟁을 우선으로 하길 바라는 순진함을 벗어 던지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내야만 합니다. 물살을 원위치로 돌려놓지 않는 한 모두가 그릇된 방향으로 휩쓸려가는 것은 필연입니다.
현 장르시장의 질적 저하와 끝없는 불황, 그리고 조막만한 성장가능성마저 소거시킨 진정한 범죄자는 바로 정부라 할 수 있습니다.
2. 작가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독자에 속고 있다.
숲이 환경이나 기후에 맞게 살아남기 위해 변하듯 작가들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살을 틀지 못하는 바에야 결국 작가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여점의 입맛에 맞게.
정부의 정책실수 때문에 대여점에게 돈줄이 묶여있는 한 이제 숲 전체는 대여점에 꼬리를 흔들어야 합니다.
소양 있는 작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거름이나마 먹기 위해 잡목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변합니다.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처지가 바뀌었는데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홀로 꼿꼿해도 결국 패자(敗者)가 될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 요즘 자주 듣습니다.
“네가 뭔데 이해하기 힘들게 쓰나? 독자가 읽기 좋게 글을 써야지. 수요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가 잘못이다.”
맞는 말입니다. 대여점 체제의 실수요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글을 쓰면서 대여점에서 살아남길 바라는 것은 멍청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전 항상 여기서 뭔가 알 수 없는 오류를 느껴왔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대여점에는 장르문학에 맛 들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에 취향에 맞는 책을 요구합니다. 대여횟수를 통해 이들의 의견은 반영됩니다.
이런 취향의 이들에 맞추어 출판사는 책을 출판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책을 위주로 읽습니다. 다시 말해 시장은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재 하에서는 장르문학은 호황을 맞아야 합니다. 시장이 원하는 물품을 꾸준히 공급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취향에 맞춘 글을 출판할수록 장르시장이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독자가 좋아하는 글을 썼고, 독자는 그러한 소설들을 열심히 선택해 주었는데 도대체 왜 장르시장은 더 움츠러들기만 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작가들이 쫓고 있는 “대여점의 독자”라는 것은 장르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완벽한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이견을 제시하기 전에 왜 그들이 허상이며 유령인가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거품입니다. 원래는 장르시장에 존재할 수가 없었던 이들이며 장르시장의 문화적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도 못할 인물들인데 대여점이란 기형적 기생체가 이들을 끌어 모아왔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대여점의 조각파편일 뿐이고 대여점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이들이지만 마치 장르시장에 금전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듭니다.
즉 실질적 문화소비자가 전혀 될 수 없는 자들이 장르시장의 독자인 척 행세하며 작가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좀 더 스케일이 크고 민감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 현 대여점 체제 하의 독자의 대부분이 독자를 표방하는 가짜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대여점 독자의 대략 90%은 거품이자 허상입니다.
그들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이 없어지더라도 장르문화엔 어떠한 타격도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재화는 장르문화를 향해 단 한 차례도 움직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여점에 돈을 지불하여 대여점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
제가 이야기했던 부의 흐름, 즉 물살론을 머릿속에 그려 보세요. 그들의 돈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나요?
그들의 돈은 대여점주의 생계를 위해서만 움직였고 장르시장의 숲에 공급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장르문학의 실소비자가 아니며 대여점의 실소비자에 불과합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부의 이동을 좀 더 따져 봅시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양의 장르소설들을 읽는다고 해도 대여점이 매달 숲에 지불하는 영양분의 양은 균일합니다. 사람들이 대여점에서 이것저것 많이 읽어준다해도 대여점이 책을 더 사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그들은 대여점의 조각파편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숲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들의 “입맛”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입맛이란 것은 "내 맘에 들게 행동해라. 알았냐?"라는 엄포나 다름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은 잘 쓴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쉬운 작품을 좋아할 뿐입니다. 그들로 인해 대여점주가 좋은 작품을 열심히 들여놓는다는 이야기는 강아지도 믿지 못할 이야기니 아주 좋게 말해서 “음차원의 에너지”를 숲에 공급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정도로 변호해 드릴 순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야 합니다. 그들 모두가 허상인 것은 아닙니다.
현재로선 문화 소비력에서 절대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던 경제적 허상체라 할지라도 그건 단지 1차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일 뿐입니다.
왜냐면 종래의 “물살”이 정부의 정책적 오류로 인해 대여점 체계로 빨려든 순간부터 정상적인 독자 또한 대여점체제에 함께 매몰되어 버린 경우도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가 “대여점이 만든 거품” 사이에 끼어있는 경우는 반드시 구별지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제 주장이 성립됩니다.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는 대여점이 없다면 책을 구입할 이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대여점이 이를 대체해 주면서 소설을 구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현재로서는 경제적 허상체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대여점이 없어진다면, 혹은 경제적 여유를 갖추게 된다면 장르문학에 직접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해줄 잠재적 물살입니다. 그런 당신은 비록 지금은 E-북이나마 구매한 적이 없지만 장르문학의 매력에 언제고 빠져있을 실질적 독자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여점이 만든 거품”은 다릅니다. 그들은 대여점이 있어서 찾아온 이들이며 대여점이 없어지면 떠날 이들입니다. 이들은 대여점이 있는 현재에도 장르문학의 숲에 어떠한 물을 보낸 적이 없으며 대여점이 없어진다면 장르문학의 숲에 물을 보낼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대여점주에게 돈을 지불하여 그들의 생계에 보탬을 주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장르 충성도도 없고 책을 구매할 만한 경제적 능력도 없습니다. 다시말해 이들은 장르문학의 발전에 있어선 허상입니다.
물살론에 따르면 그들이 장르문화소비에 영향을 주는 경제적 가치는 제로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대여점이 만든 거품”이 현 대여점 소비자의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단언합니다. “대여점이 만든 거품”은 대여점 소비자의 90%이상입니다.
장르적 충성도로 따져보아 그들이 곧 대여점마저 질려버리면 쉽사리 떠나게 될 완벽한 불청객들입니다.
제가 대여점이 소거된 상태에서 E-북의 가격경쟁력에 대한 찬사를 했을 때 한 분이 이런 요지의 이야길 하셨습니다.
“대여점이 없어진다 해서 대여점의 고객층이 E-북으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들은 책이 아니더라도 다른 즐길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넘어가버릴 것입니다. 아마 E-북의 성공가능성을 쉽사리 점치지 않을 정도로 이탈인원이 많을 걸요.”
순간 전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들을 우리가 이제까지는 장르문학의 범주 안에 넣으며 독자의 취급을 해왔지만 실제론 절대 장르문학의 독자가 될 수 없는 가짜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 소비에 대가를 치뤄 문화발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이가 어떻게 독자일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가짜다! 대여점이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이들이다. 정상적인 시장 상황에선 절대 존재할 수가 없었을 거품이다! 그들은 대여점 뒤에 개떼처럼 모여 장르문학의 독자임을 표방하며 자신의 입맛을 장르시장에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장르소설에 없으니만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르문학을 살리기 위해 근래 신세대들의 입맛과 추세를 따라간다는 모토를 가진 이들이 많은데... 존재하지도 않는 이들의 입맛에 맞춰간다는 것은 장르문화소비계층의 입맛과 점차 거리를 두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자충수가 아닐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3. 누구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바로 앞에서 전 대여점에 소속된 경제적 허상체들을 두 분류로 나누었었습니다.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와 “대여점이 만든 거품”
다음은 대여점의 현 추세와 문피아 독자들의 반응등을 토대로 구성한 프로파일입니다.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의 특징>
이들은 아직까지 장르문화를 소비하면서도 아직 대가를 지불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대여점이 없어지더라도 장르시장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서서히 맘에 드는 책은 살까말까 고민도 되지만 아직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게 더 익숙합니다. 꽤 많은 책을 읽었고 매니아가 된 부분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취향이 고정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고 일정수준 이상의 책을 선택하고 있을 것이며 서서히 현 대여점체제에 쏟아지는 질 나쁜 책들에 반감이 쌓이는 형편입니다.
반면 “대여점이 만든 거품”의 특징>
이들에게 대여점이란 그저 잠시 스쳐 지나는 오락거리일 뿐입니다. 책을 평소에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기 때문에 책의 선별능력이 부족하며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이슈가 되는 몇몇 장르소설만 잠깐 뒤적이다 떠날 뿐입니다.
대부분 경제력이 부족한 10대일 것이며 싼 것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나이 대 때문에라도 같은 나이 또래의 작가들이 쓴 책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소설들에 쉽게 행복해지고 쉽게 화냅니다. 장르문학의 팬들이 재밌다며 극찬하는 작품들이 자신에겐 별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의 취향은 화끈하게 때려 부수는 먼치킨 류입니다. 하지만 한때일 뿐이고 곧 읽다 질리면 책 읽는 것 외에도 즐길 일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똑같은 경제적 허상체인데도 “대여점이 만든 거품”의 숫자는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보다 숫자가 9배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여점의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잠재적 독자가 아닌 대여점이 만들어낸 거품들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복잡한 책은 싫어하고 대화 많고 독해가 쉬운 책들을 좋아합니다.
작가들은 “대여점이 만든 거품”을 보고 ‘아 독자들은 ~을 좋아하는 구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맛에 맞춘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허상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게 어떻게 장르시장에 호황을 가져다 줄까요?
“대여점에 소설이 많이 팔렸다.” 이것은 다른 작가의 책의 반품량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소설을 멋들어지게 잘 써봐야 대여점이 소설을 구매하는 총량은 별로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 장르시장의 숲을 향해 들어오는 물줄기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는 “대여점이 만든 거품”과 취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잠재적 장르시장의 독자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책"들을 원하고 현 출판실태에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일정 교집합 부분은 있겠지만 다른 점이 더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우리는 모순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장이 원하는 글을 쓰면 쓸수록 시장이 작아지는 모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합니다. 장르시장의 독자가 떠난 겁니다. 정상적 소비주체들이 떠나는 것입니다. 이는 거품의 취향만을 맞춰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허상에 취해 허상을 만족시키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작 현실속에 존재하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대여점을 만족시키면 만족시킬수록 장르문학에 충성도가 높았던 독자들은 떠나가고 있습니다. 실질적 문화소비 주체들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문화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즐기는 이들만이 남게되니 이는 장르문학의 자생력을 더 크게 쇠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장르문학은 영원히 대여점에서 먹이를 받아먹어야 하겠지요. 물론 대여점이라고 해서 그러한 척박한 공간아래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진 의문입니다만.
이래서 현 상황은 진퇴양난입니다. 정부의 정책실패가 만든 끝없는 수렁입니다.
수준 높은 작품을 쓰면 대화 적은 거 싫어하는 "거품들”이 대여점에서 쫓아냅니다. 장르시장의 독자들은 만족스럽긴 한데 사긴 좀 그렇습니다. 왜냐면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작품들도 아직 구매를 안 한 상태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대여점을 통해서 볼 밖에요. 대여점이 없다면야 어쩔 수 없이 구매라도 해서 보겠지만 있는데 구매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준 낮은 작품을 쓰면 대화 많은 거 좋아하는 "거품들”이 대여점에서 반깁니다. 장르시장의 독자들은 분노합니다. 대여점에 돈을 낸 게 아깝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소설이 대여점에서 꽤 팔려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장르시장의 작가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성토합니다. 장르시장을 떠나야겠다며 실망을 표합니다.
작가들은 항의합니다. “니들이 그걸 원했잖아요.”
대여점에 목줄이 잡힌 순간부터, 대여점 뒤에 버틴 거품들이 실질적으로 돈을 내지도 않으면서 대여점을 쥐고 흔든 순간부터 이미 장르시장의 진실된 독자들은 힘이 없어졌습니다.
작가도 힘이 없어졌습니다.
거품에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장르문학은 이제 대여점들이 주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취향을 맞추고 있는가?
이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거품의 취향을 맞추고 있습니다.
더이상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여점에게 먹이를 얻기 위해서.
4. 결론
거품. 언제고 가볍게 떠날 대여점이 만든 기형적 허상입니다.
떠날 애들의 취향에 맞춰서 어떠한 호황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거품의 수준에 맞추다가 끝도한도 없이 질이 떨어져 대여점과 함께 망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고만고만하게 살겠지요.
독자를 욕하지 마세요. 출판사를 욕하지 마세요. 작가를 욕하지 마세요. 대여점주를 욕하지 마세요. 그들은 그렇게 내몰렸을 뿐입니다. 정부의 정책이 그렇게 내몰았습니다.
장르문학에 개목걸이를 매단 것은 정부입니다.
정부는 정책을 수정해서 물살을 돌려놔야 합니다.
장르문학이 대여점 없이 망하든 살든 자생능력을 갖추도록 바꿔야만 합니다.
대여점의 순기능이고 뭐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더이상 자유가 없는 상상문학에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문화에 대한 부의 흐름이 끊겨 이젠 장르시장이 대여점이 주는 부에 사육당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품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야 작가가 살아남는 처지가 되는 수순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대여점이 생겨난 그때 예고된 필연적인 순리를 당신은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해결책은 그거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대여 철폐.
그래야 작가들을 움직이는 거품들의 농락도 끝납니다.
작가가 잘하라 독자가 잘하라 출판사가 잘하라 외쳐봐야 다른 모든 방책은 공염불일 뿐.
Comment '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