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작품명 : 더 로드
출판사 :
저는 장르소설에서 시점에 좀 민감한 편입니다.
글이 1인칭시점인 경우 굉장히 신경이 민감해집니다. 이거 또 지뢰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일단 들기도 하고요.
무판이 재미만 있으면 되지 무슨 인칭을 따지고 그러냐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재미있게 읽던 무판도 모순되는 설정이라든지 주인공의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이라든지, 인칭의 혼동이라든지 이런게 눈에 띄면 삽시간에 재미가 뚝 떨어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런 부분들은 대체로 글을 쓰는 이가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될 부분이라서 더욱 정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너무 성의 없이 글을 쓴다는게 보이거든요.
어쨌든 이번에 더 로드를 읽고 드는 느낌을 정리해보겠습니다.(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안쓰려 합니다. 일단 시점에 관한 부분만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더로드는 1인칭으로 쓰여진 무판치고는 크게 시점문제로 걸리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무판임을 고려해서 너그럽게 넘어갈 경우 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볼 경우 여전히 1인칭 무판이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눈에 보이기에 그점을 지적해보려 합니다.
우선은 1인칭이었다가 3인칭으로 서술하는 내용이 종종 눈에 띄입니다. 즉 원래 1인칭이면 주인공은 당연히 모르고, 독자도 몰라야 하는 내용을 3인칭시점으로 바꿔서 독자에게 알려주더군요.(그나마 3인칭이 자주 쓰이는 것은 아니어서 모 소설처럼 막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1인칭 소설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걸 왜 문제를 삼느냐 하면 그것이 1인칭소설의 장점을 뿌리부터 부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1인칭소설은 독자에게 거리감을 좁혀줌으로써 마치 주인공 자신이 된듯한 느낌 혹은 주인공과 아주 가까이서 사건을 보고 듣는 느낌이 듭니다. 쉽게 FPS형식의 RPG를하는 느낌이라고 보면 됩니다. 무판에서는 주인공이 보고 듣는 것 외에 '전혀' 다른 사건은 알지 못함으로써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줄수도 있겠죠.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1인칭으로 쓰다보면 주인공은 모르는 일이지만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들이 생깁니다.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이런 부분을 어떻게 매끄럽게 다루느냐가 글쓰는 이의 역량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대다수의 1인칭 무판에서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쉽게 3인칭으로 전환해서 독자만 그 일을 알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알고 있지만 주인공은 알지 못하는 일이 하나 둘씩 생겨버립니다. 이것은 좁아졌던 주인공과의 거리를 크게 멀리하는 것으로써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주인공과 독자의 일체감을 깨버립니다. 이미 한번이라도 3인칭으로 변경해서 독자와 주인공과의 일체감이 깨어진 이상 그 후의 1인칭은 글 속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그저 천덕꾸러기가 될 뿐입니다. 1인칭시점을 계속 고수함으로써 더욱 어색함을 자아내기가 쉽습니다.
물론 무판은 일단 재미가 우선이니 그런 점을 감안해서 계속 보아나가고 계속 글을 읽다보면 또 어느새인가 1인칭 주인공과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하죠. 그런데 또 다시 3인칭으로 거리를 재차 벌립니다. 이런 일이 계속 생긴다면 우선 글을 읽는 흥이 깨집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그러더군요. '누설'이라는 기법이 있으며, 독자에게 무언가 먼곳의 사건을 알려줌으로써 긴박감을 더하는 방법이라고요. 1인칭이라고 그 '누설'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던가요.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는 봅니다.
하지만 만약 1인칭에서 그러한 '누설'이던가 하는 기법이 쓰인다면 그것은 작가의 고심과 고심이 이어진 참으로 중대한 결단이 있은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독자에게만 정보를 주는 행위가 과연 1인칭 시점만의 장점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시점을 바꿔버릴 일은 아니라는거죠. 과연 독자와 주인공과의 거리를 삽시간에 떼어놓을만큼 중대한 일을 그리 쉽게 쓸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무판에서 1인칭소설을 쓰는 분들은 이런 고심이나 결단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그저 편한대로 글을 쓸 뿐입니다.
글쓰는 사정에 따라 쉽게 시점을 오갈 것이라면 왜 1인칭으로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3인칭으로 쓰면 될 일입니다.
두번째는 뭐랄까 굉장히 미묘한 문제인데요. 대다수의 다른 분들은 거부감이 없을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너무 민감한 것일수도 있고요.
이런 문제입니다.
격투기 중계를 한다고 하죠. A와 B가 싸우는데 둘다 실력이 상당한 선수라고 합시다.
간단히 중계내용을 꾸며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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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 B선수 대단한데요. 이거 대단한 역량입니다. 저런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체력과 보통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깔끔한 연속 기술입니다. 상대방을 숨돌릴틈도 없이 몰아세우는군요.
앗. 그러나 그러나 이게 웬 일입니까.
A선수 이 무서운 공격들을 하나하나 다 받아 넘기는군요.
아아아아. 이럴수가 A선수 정말 훌륭합니다. B선수의 기량만해도 언제 세계 챔피언을 갈아치운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텐데 말이죠. 그런 B선수의 무서운 공격들을 다 받아내고 오히려 반격을 시작하는군요.
아.. 이건 이건 ... 놀랍습니다 A선수. 오히려 B선수보다 더욱 뛰어난 기술들입니다. 과연 실전에서 저런 기술들이 실제로 성공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놀랍습니다 A선수!! 삽시간에 주먹과 발의 콤비네이션이 들어가는데요. 하나 둘 셋 넷, 과연 저 짧은 시간에 정타만 몇대가 들어간 건가요? 네대인가요 다섯대인가요? 이거 슬로우 모션으로 확인해봐야 할듯한데요.
인간의 동체시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스피드입니다. 거기다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자 저 슬로우 모션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저 스치듯 들어간 주먹들에 근육이 밀리는것 보이시죠?
이것이 바로 세계 최정상급의 기량이군요. 놀랍습니다.
어쩌구저쩌구...
A선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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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맘대로 지어낸 이야기니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식으로 격투기 중계 보면 아나운서들 막 흥분해서 이야기하는게 오히려 더욱 흥을 돋웁니다. 선수들에대한 민망할 정도의 극찬도 심심찮게 나오고 그런 말들이 상황과 맞물려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A선수가 시합을 하면서 해설까지 직접 중계를 한다고 해보죠.(이건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혹은 나중에 녹음된 화면을 보면서 직접 누구 친한사람한테 자랑하듯이 한 중계가 외부로 유출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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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야.. B저놈 연속기가 대단하지? 봐봐 저런걸 하려면 보통 실력으론 힘든일인데 말이야.
그러나 내가 누구야. 헛둘헛둘 흐흐흐 꽤 빠르긴 하지만 아직 느려. 날 때리려면 백만년은 이르다 이거야.
좋아. 니 공격이 끝났으니 이번엔 내가 공격할 차례인데, 천외천을 보여주지. 이런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사람이 과연 있긴 있을까? 난 빼고. 봐봐 난 저걸 실전에서도 사용하지.
아. 난 무서워. 사람들이 나보고 사람이 아니고 안드로이드라며 해부한다고 하면 어떻하지?
사실 내 역량이 B보다는 한참 위라는 증거인데. B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주먹과 발의 콤비네이션. 몇대냐? 하나둘셋넷다섯. 슬로우모션으로도 다섯대까지밖에 안보이지? 실은 저기에 카메라에도 안잡히는 번개같은 펀치가 두대 더 들어가. 캬. 죽여주네. 저거 바바. 저 슬로우모션 보면 알겠지만 나는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한발한발 꽂힐 때마다 적이 데미지 입는거 보이지? 나는 스피드에 힘까지 겸비한 무적의 철인이시지.ㅋㅋㅋㅋ
캬.. 결국 내가 이겼지? 뭐 어쩌면 당연한거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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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더로드를 읽다보면 좀 뭐랄까 위의 두 예중에 2번과 같은 상황을 수없이 읽고 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3인칭으로 글을 썼으면 웬만큼 주인공을 띄워줘도 훨씬 자연스러웠을 텐데, 1인칭으로 쓰여진걸 보니까 무슨 과대망상 환자가 자화자찬하는 걸 옆에서 들어주는 느낌이죠.
A몹은 굉장히 강하다. 다른 사람들은 떼거지로 몰려와도 상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나한텐 안되지. 난 더더더 대단한 기술과 능력이 있단 말이지. 이제부터 어케하나 잘 지켜봐.. 하고 우쭐대는 느낌들.
이것은 1인칭 시점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라고도 생각할수 있겠지만 대체로 1인칭시점의 주인공은 수다쟁이가 될수밖에 없죠.
설사 설정상 주인공이 과묵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수다를 쏟아내는 겉다르고 속다른 인간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더 로드에서도 1인칭시점 특유의 장황한 설명이 주르륵 이어지는데 이것이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급박한 상황에서 경기중계하듯이 하나하나 어쩌구저쩌구 따져가면서 설명한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는거죠. 여기서 더욱 주인공과의 괴리가 심해집니다.
어쨌든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 의문이 들더군요. 왜 굳이 1인칭 시점을 시도한 것인가. 굳이 그래야할 이유도 없는듯 하고, 오히려 흥미만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3인칭 시점이었으면 훨씬 글이 매끄러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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