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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9 근경
작성
19.05.29 12:22
조회
279

제목 : 망겜의 성기사

작가 : 검미성

출판사 : 


  2000년대 초반까지 소위 '1세대 장르문학'으로 분류되는 판타지/무협/SF 소설은 대체로 교양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초기부터 비교적 RPG적/소년만화적 경향이 짙었던 홍정훈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드래곤 라자』, 『룬의 아이들』, 『하이어드』 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1세대 장르문학 작품들은 분명 저마다 약간씩은 교양소설이었다; 관념소설이나 대하소설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 이영도나, 교양소설적인 '성숙'이 곧 소년만화적인 '성장'이기도 했던 전민희와는 달리, 『하이어드』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낭만주의 교양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메이런과 아이라 두 주인공의 성숙은 소년만화적이라기보단 낭만적 - 미숙하고 순수한 자아가 잔혹한 세계와 마주하며 조금씩 내면의 깊이를 더해간다는 의미로의 낭만 - 인 것으로 읽혔다. 이러한 1세대 장르문학의 교양소설적 경향성은, 거의 그에 대한 반동에 가까운 2세대 장르문학의 반-교양소설적 경향성과 부딪혔다. 인터넷 세대 혹은 2세대 장르소설이 그 이전 세대와 단절된 부분이 있다면, 이들 작품들은 교양소설에서 설교하듯 가르치는 '성숙'의 가치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쾌락추구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이어드』에서 낭만적이었던 성숙은 소년만화적인 성장과 자본주의적인 축부로 변화했고, 때로는 그러한 성장 혹은 축부의 과정마저 생략된 채 일확천금(기연)의 꿈을 꾸는 작품들도 있었다.



  나는 장르문학의 반-교양소설화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갖지는 않았다. 오히려 21세기의 기준에 비추어본다면 낭만주의 교양소설은 극히 시대착오적인 도덕극으로 느껴졌고, 그러한 노스탤지어의 상태에 머무르느니 차라리 말초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까지도 했다. 현대인인 우리가 전자에서 어떤 동시대적 교훈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반면, 최소한 후자의 작품들에는 철없는 독서의 가치라 할만한 것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반-교양소설적인 경향 정도에 머물렀던 장르문학은 대여점 세대를 거쳐 웹소설 세대로 이행하면서 우울할 정도로 속물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조금 성급하지만 일반론적인 의견에 따르자면 장르문학 독자층의 외연이 10대와 20대에서 3040 세대까지 넓어진 탓일지도 모른다. 사회학적인 논리를 통해 보자면 이전 세대에 비해 계층이동이 어려워진 현실과 '헬조센' 담론의 확산, 금융자본주의에 의한 소외 등등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장르문학이 보다 거대한 '문화산업'의 일부로 포섭되면서, 시장논리가 작동한 것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인에 대한 피상적인 수준의 분석을 굳이 제시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웹소설 세대의 장르문학에는 오직 범속적인 것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비교적 덜 상업적인 2세대까지의 소설들에 비해, 3세대 이후로 장르문학은 뚜렷한 상업적 지향성을 갖게 되었고,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이 더는 엄밀한 구분이 되지 못하는 지금에 와서도 분명한 '상업문학'으로 남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을 제공할 능력은 없고, 그러한 분석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크게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분석은 장르문학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과 의도에 관한 하나의 해석뿐이다. 4세대 남성향 장르 문학 전반을 놓고 봤을 때, 나는 그 서사를 지배하는 감정을 크게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원한(ressentiment)', 그리고 원한으로부터 출발해 종말론적 모티프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메시아에 대한 '동경'으로 이해한다.



  니체에 따르자면 원한은 자기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더 귀족적인 인간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악한 것'을 찾고 그러한 '악한 것'에 대비되는 자신을 '선한 것'으로 놓으려는 태도다. 사제 도덕, 노예 도덕, 혹은 범속성이라고 달리 불리는 이 원한 감정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반드시 부정적이기만 한 개념은 아니다. 니체 본인도 말하는 것처럼, 이는 인간의 내면에 사악함과 깊이를 더하는 것이도 하고, 가라타니 고진에게는 근대성의 동력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됐든 원한이란 속물들의 도덕이고 하찮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밟지 못하면 삶에는 의미가 없다’라고 하는 전형적인 원한의 표현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속물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4세대 장르문학에서 그러한 원한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제는 상투적이다 못해 너무 상투적이라 신선해지기까지 한 '실연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그 예시로 제시할 수 있겠다. 이 도입부에서 전적으로 악한 것, 잘못된 것은 이 세상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더 강한 자들이며, 힘도 돈도 권위도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여자친구다. 이런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평범하고 선량한' 보통의 인간으로 재현되고, 그들은 대체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기연을 얻고 '약자'에서 '강자'로, 그러나 진정 스스로 강한 자는 아닌 인간으로 재탄생한다(만약 그들이 스스로도 강한 인간이 되었다면, ‘갑질’처럼 타인에게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원한감정을 가진 주인공들은 물리적, 사회적으로 더 강한 인간이 된 다음 소위 말하는 갑질을 통해 대리만족을 제공하는데, 자신을 버린 전 여자친구를 모욕적으로 내치는 것이 갑질의 필수적 과정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주인공의 원한이 유치하고 개인적인 원한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작품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통속적인 종말론적 모티프와 결합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동경으로 나아가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다. 조금 오래된 작품 중에는 김정률의 『소드 엠페러』가 있으며, 비교적 최근에는 『환생좌』나 『전지적 독자 시점』과 같은 굵직굵직한 히트작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심지어는 『납골당의 어린 왕자』조차도 이러한 종말론적 모티프로부터 그렇게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통구스카의 이 작품은 4세대 소설들의 속물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시도하고는 있지만, 결국 뻔해 빠진 종말론적 모티프로 돌아오고 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뻔해 빠진 종말론적 모티프가 기껏해야 미국식 영웅주의와 결합된 억지스러운 구원의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딱히 더 낫다고 하기 어렵다.



  내가 '종말론적 모티프'라고 칭하는 것은 말 그대로 묵시록적인 종말을 의미하는데, 어떤 '너머의 세계' 혹은 '너머의 존재'가 현실로 닥쳐오며 주인공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메시아로 대두되는 상황을 뜻한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같은 기존의 이념들이 해체되고 국가가 종언을 맞이하며, 인간의 존엄이나 개인적 자유와 같은 현대의 자유주의 도덕이 파국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한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에서는 아즈마 히로키가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칭하는 요소들, 즉 차이와 반복의 서사가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데, 주인공들은 회귀, 환생, 귀환, 혹은 독자로서의 지식 등을 활용하여 몇 번 씩이나 반복되는 재난을 헤쳐나간다. 대부분의 종말론적 작품들에서 그 결말은 초인적인 정신과 인내력을 가진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며, 마치 예수가 묵시록의 모든 환란을 해결하고 지상에 왕국을 임하게 하듯 세상을 구원한다.



  나는 이 종말론적 소설들에 특별히 분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작품들이 단순한 좌절과 원한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아도르노가 『미학이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현실은 복잡한 종합이며 현실적인 소설에서 한 인간의 초인적 노력과 같은 단순한 해결책이 제시되는 것에는 핍진성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진정성 있는 작품들에서 언제나 그 결말은 파국으로 끝나기 마련이며, 그러한 무의미성과 비사회성이야말로 이른바 '진정한 예술'의 기능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지나치게 낡은 텍스트기는 하지만)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주는 교훈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말과 메시아와 구원의 이야기는 현실을 극복해내려는 진정성 있는 시도라기보다는,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좌절과 원한의 반영에 가깝다. 조금 폄하해서 말하자면, 4세대 장르문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메시아에 대한 동경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원한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악한 것으로 파악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바꿔나갈 실질적인 방법은 부재할 때 득세하는 것이 종말론이며, 니체라면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서가 묵시록으로 끝난다고 말할 것이다. 원한과 원한에서 나오는 동경만으로 4세대 장르문학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 두 감정의 작용을 빼놓고 4세대 장르문학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우리라고 믿는다.



  『망겜의 성기사』에서 전적으로 탁월하다고 할 만한 부분은 원한과 동경이라는 감정의 동학을 충실하게, 그러나 풍자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매력이 4세대 장르문학 특유의 클리셰들을 해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데 있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인물상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4세대 장르소설의 전형적인 인물상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가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세속적인(wordly) 인간들로 그려지며, 그러한 세속적 인간들이 빚어내는 '사소한' 악담과 갈등이 주된 이야깃거리가 된다. 또한 갑작스럽게 세상이 게임으로 변해버렸다고 하는 종말론적 모티프나, 종말 이후에 찾아오는 구시대적 가치의 해체와 새로운 가치 사이의 충돌, 종말의 상황에서 영웅이자 메시아로 등장하는 주인공, 5회차에 걸쳐 진행되는 차이와 반복의 요소 등등 현세대 장르소설에서 특징적이라고 할만한 서사들을 찾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하나하나만 놓고 본다면 이제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요소들을, 빠른 템포로 교차해서 보여주며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 『망겜의 성기사』의 강점이다.



  물론 그러한 클리셰들의 배치는 강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심리묘사는 (김정흠이 가끔 초인적인 행동을 할 때를 제외하면) 기껏해야 세속적인 수준에 그대로 머물고 있을 뿐이고, 전투 장면은 즐거움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탁월하다고 하기까지는 어렵다. 기존의 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세상이 들어서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꽤 괜찮은 편이지만, 그것마저도 4세대 장르문학의 전형적인 클리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장르문학 속 감정의 동학에 대한 풍자라는 측면에 이르면, 이 소설의 단점들마저 갑작스럽게 빛나는 장점들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인물상의 문제가 그렇다. 황건욱, 김정흠, 김선우와 같은 인물들은 '4세대 장르문학 인물'의 이념형과도 같은데, 황건욱은 이제까지 장르문학에서 등장한 이상적인 메시아형 주인공의 상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인물이다.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올바름과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인 고려를 잊지 않으며, 오승훈과 같은 인물들을 감화시키기까지 한다. 반대로 김선우는 좀 더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인물인데, 심지어 플레이어로서 성장한 그의 배경은 그런 설정에 상당한 설득력까지 제공한다. 그런 만큼 독자들 중 황건욱보다 김선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김정흠은 메시아형 주인공의 곁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전형적인 조연인데,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황건욱과 같은 영웅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며 또한 동경하기도 한다.



  이 이념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빛이 나는 까닭은, 그런 인물들이 그대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메타픽션적 인물인 VIP=독자는 메시아형 주인공인 황건욱을 좋아하고, 이태동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증오하며, 소시민적인 김정흠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이러한 동경과 원한의 감정이 독자와 작가, 작가와 서술자 사이에 놓인 간극을 느끼게끔 한다. 당당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인 황건욱을 동경하는 것이 단지 '아스퍼거 환자'에 불과한 VIP라는 사실은, 그리고 등장인물인 유피테르의 입을 빌려 VIP를 비웃는 부분은, 소설 속 서술자 뒤에 서 있는 작가가 독자를 직접적으로 비웃는 풍자적인 장면 중 하나다. 장르문학 속 메시아란 아스퍼거 환자와도 같은 유아론적이고 미성숙한 자아가 동경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런 장면들에서 은연중에 암시된다. 더 나아가 서울에 핵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VIP가 좋아하는 장면은, 종말론적 모티프를 취하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시아에 대한 동경'이라는 것이 원한과 그리 멀리 떨어진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속물적인 인간들을 비웃고 초인적인 메시아를 찬양하는 것 같은 『망겜의 성기사』에서 진정으로 비웃음이 향하는 곳은 독자들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인간의 범속함에 대한 비웃음은 자기 자신의 범속함에 대한 비웃음이 되고, 어떤 의미로는 그러한 글을 써야만 하는 작가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 된다. 이런 탁월한 아이러니는 4세대 웹소설에서, 아니 흔히들 '명작'으로 칭하는 1세대 소설들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나는 『망겜의 성기사』를 4세대 장르문학의 가장 탁월한 작품들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아직까지 결말이 나오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망겜의 성기사』가 원한과 동경의 정동에 대한 풍자로 씌어진 소설이라고 한다면 그 결말이 전형적인 장르문학의 그것과 같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과연 메시아적 주인공이 또 다른 '너머의 존재'가 되어 종말론적 사태를 해결하는 것 대신에, 어떤 결말이 그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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