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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14 알투디투
작성
15.07.11 16:26
조회
3,126

제목 :  바람의 열두 방향

작가 :  어슐러 K. 르 귄

출판사 :


오래 전에 썼던 르 귄의 단편집에 대한 비평입니다. 일전에 잠깐 올렸다 지운 일이 있었는데, 다시 올려둡니다.


1. 어슐러 K. 르 귄과 장르문학.


어슐러 K. 르 귄은 1929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부모는 문화인류학자인 알프레드 크로버와 작가인 테오도라 크로버였다. 그녀는 레드클리프 칼리지에 재학했고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르 귄이라는 성은 1953년 파리의 역사가인 찰스 A. 르 귄과의 결혼을 통해 얻게 된다. 1958년 이래 오레곤의 포틀랜드에서 거주해오고 있는데, 등단은 1962년 판타스틱 잡지에 (바람의 열두 방향에도 선집된 작품인) 「파리의 4월」을 게재하면서 이뤄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1969년 발표되어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한 『어둠의 왼손』이나 세계 3대 환상문학작품으로 꼽히는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으며 이 여작가를 당연히 SF나 판타지 작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르 귄의 작품 세계는 넓고 다양하다. 시와 산문을 넘나들며, 시와 일반소설, SF, 판타지, 연극 극본과 영화 대본, 동화, 수필의 다양한 영역을 통해 저작을 남겼다. 시작(詩作)이 여섯 권, 소설이 스무 권, 단편이 일백 편 이상, 네 권의 수필집과 열한권의 동화를 집필했고, 네 권의 번역물을 냈다.


다방면에 문학적 소양을 보여주던 르 귄이 SF나 판타지와 같은 다소 비주류적인 장르에 애착을 갖는 것은 의외의 일일지 모른다. (장르 문학이 보다 활성화된 서구라 할지라도 편견은 뚜렷이 존재하며, 이는 『어둠의 왼손』의 머리말에서 ‘과학 소설은 좀 별난 소설로 취급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그렇고 그런 류의 소설로 정의된다’라는 르 귄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바람의 열두 방향』의 각 작품 앞에 나오는 간략한 소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르 귄의 첫 소설 출판은 그녀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가능했지만 몇몇 시의 경우엔 스무 살 무렵부터 서른 살 사이에 이미 출판이 된 듯하다.


『어둠의 왼손』에서 르 귄은 작품이 ‘사고실험’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길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질서를 가정하고 그 질서에 맞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 거짓말’ 혹은 ‘상징’ 혹은 ‘비유’라 부를만한 것을 선택했다. 그녀는 그것이 예술가이자 거짓말쟁이의 작업이라 말했다. 아마 그녀의 장르 문학에 대한 애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허구와 거짓말에 충실한 직업적 소양과 ‘사고실험’이란 방식의 결합이 판타지나 SF라는 장르적 표현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녀의 SF 작품이나 『바람의 열두 방향』에 선집된 작품들을 읽다보면 SF와 판타지의 경계가 모호해 보일 때가 많다.


 이를테면 단편집에 수록된 첫 단편 「셈레이의 목걸이」는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 구조는 르 귄의 섬세한 표현을 통해 풀어진다. (그녀 스스로의 말을 빌리자면 낭만적인 분위기라 한다.) 현실과 동화적 분위기의 교차되는 연출을 통해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좀더 몽환적인 느낌이 강렬하다. 몽환적 분위기는 르 귄의 단편 작품 전반에 걸쳐 종종 나타나는 것인데, 후에도 다시 언급을 하게 될 단편 「멋진 여행」의 경우를 살피면, 토마스 핀쳔의 「49호 품목의 경매」에서처럼 때로는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이지만 때로는 두서없어 보이는 사건 흐름을 보여준다. - 르 귄의 단편에서는, 마약에 취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이러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또,  「셈레이의 목걸이」나 「겨울의 왕」은 기본적으로 「로캐넌의 세계」 및 「어둠의 왼손」과 같은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시리즈와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언급된 장편들이 그러했듯 SF 작품이면서 고전 판타지 작품의 향내를 풍기고 있다.


 이런 점으로 살펴 보건데 그녀는 자신이 과학소설에 적합한 사고실험의 방식을 취했다 말하고 있지만 따지어본다면 엄밀히 ‘장르라는 틀 아래’ 이야기를 풀어냈다기보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귀착된 것이 ‘장르라는 틀’이었을지 모르는 것이다.



2.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고 60년대의 미국.


『바람의 열두 방향』은 르 귄의 초기 단편들을 선집한 단편집이다.

말머리에서 저자가 밝히듯 이 단편집은 회고전과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그 때문인지 각 단편의 머리마다 글을 집필하게 된 이유나 과정, 작품을 발표하며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나 감상 등을 짤막하게 적어두고 있다. 르 귄의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선물이 되고 있다.


한편, 이 곳에 선집 된 작품은 총 열 일곱 작품으로 연도별로 정리가 되어있지는 않지만, 앞서 말한바와 같이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선집이 되어있고 시간적으로는 62년의 데뷔작인 「파리의 4월」로부터 74년의 작품을 아우르고 있다. (이 기간에 집필한 단편을 모두 수록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작품이 집필된 시기는 60년 초를 즈음하여 70년대에 걸쳐있는 셈이다. 그녀가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을 저술하던 60년대의 미국은 어떠했으며 그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


미국의 6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존.F.케네디는 63년 11월에 암살당했고, 케네디를 승계한 린드 존슨은 65년 7월의 베트남 파병으로 베트남 전에 대한 본격적 개입을 시작했다. 이 베트남 전쟁의 시기에 미국은 반전 여론과 인권 문제의 결합으로 다시 한번 국론이 양분되던 때였다. FBI는 히피들의 체계 없는 반전, 반정부 조직과 연일 신경전을 벌여야 했고, 이들의 자유라는 것은 퇴락의 상징인 마약 소비에까지 뻗어가고 있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89년도 영화 『7월 4일생』은 그러한 미국 사회의 보수적 기조(톰 크루즈의 가정) 및 진보적 기조(반전주의자들)의 대비 내지 주전파와 반전파의 대립. 그리고 개인의 존엄과 가치의 상실감을 비교적 밀도 깊게 다루고 있고, 이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또한 이 시기의 사회상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희화적으로 다뤄진 바 있다.


이 시기, ‘전쟁’이라는 이슈와 미국 정부가 반전주의자들과의 대치에서 보여준 ‘폭력성’과 ‘기만’은 개인과 인명의 가치에 대해 소홀한 듯 보이던 억압적 권력 구조(정부)에 대한 반발 심리와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어둠의 왼손』에서는 권력자가 다리의 쐐기석에 바르던 붉은 모르타르가 과거에는 사람의 뼈와 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국가의 가치와 행위를 위해 인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가 공공연히 벌어짐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은 겐리 아이가 안도했던 오르고린의 안정되고 발달된 듯한 민주적 사회의 이면에서 오히려 보다 뚜렷하게 부각된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가치와 행위는 ‘애국심’이라는 광기로 포장되기도 한다. 카르하이드 사람인 에스트라벤이 에큐맨의 선발대원(일종의 사자)인 겐리 아이에게 묻는다.


“아이 씨. 당신의 경험으론 애국심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만.”

 아이의 대답에 에스트라벤은 말한다.

“아니오, 제가 말하는 애국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공포’입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결코 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증오와 분쟁, 침략, 이 모든 공포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후략)”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그에 대한 르 귄의 해석이 엿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에 대해 르 귄은 기본적으로 불신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전략) 에스트라벤은 왕의 신하이고 정치가이며 나는 그를 믿었던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있는 에큐멘 사회에서도 정치가란 보통 사람들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다. …(후략)

(이상, 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 中)

정부와 거대권력에 대한 불신. 특히,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소개된 「명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르 귄의 사고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일례가 된다. 여기에서는 ‘수’의 비밀과 계산의 범위를 통제하며 감시를 행하는 사제 집단이 등장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조지 오웰의 1949년 작품인 『1984』년에서의 ‘대형(大兄)’들과 맥락이 같지만 가장 비근한 예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 수록되었던 단편 「수의 신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의 이야기의 구조나 소재의 활용은 상당히 유사하다. 블랙-숄즈-머튼 모형의 예처럼 각기 무관한 다른 연구자가 서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경우가 아니라면 후자가 전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 개입 상황에서 실제 사실들을 국민들에게 왜곡 선전시키며 정보를 통제한 것에서도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


 한편, 여기에 수록된 70년도의 단편 「멋진 여행」은 L.S.D의 환각 상태에서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약어를 이용하는 방식이나 작품의 독특한 서술 방식 및 분위기를 두고 보자. 비록 그 주제의 범위, 소재의 활용과 내용에 있어 큰 간극이 있겠지만, 토머스 핀쳔의 작품에서도 에디파가 약물에 취한 것과 다름없이 진실을 보지 못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그를 표현하기 위한 몇 가지 기법들의 유사성을 두고 볼 때. 「멋진 여행」과 『49호 품목의 경매』는 여러 접점을 갖고 있다. (해석에 따라서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물론 소재의 유사성에 있어서는 마약이 사회문제화 되던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는 까닭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진실에 대한 관심과 접근은 그녀의 판타지 대표작인 『어스시의 마법사』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 중 「해제의 주문」과 「이름의 법칙」에서도 살필 수 있듯 어스시 시리즈를 관통하는 ‘참이름’의 법칙은 감춰진 진실을 이해함으로써 깨달은 상태이자 힘을 얻는 상태에 이름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 그 자체니까요. 그리고 참이름은 사물의 참된 본질이에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물을 통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슐러 K. 르 귄, 「이름의 법칙」 中)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힘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명인들」에서 수에 대한 이해(지식)의 독점이 권력을 창출했고, 「해제의 주문」에서는 이러한 힘을 얻은 사악한 마법사 볼이 마법을 다룰 줄 모르는 이들을 노예로 부리며 ‘참이름’을 다룰 줄 알던 마법사와 현자들을 지하 감옥에 가둔다.


어슐러 K. 르 귄이 어스시의 세계를 흑인들의 중심 세계로 설정한 점이나 성역할과 그 도덕성에 대한 담론을 『어둠의 왼손』에서 풀어낸 것 역시 인권 운동 등의 당시 시대상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일이다. 특히 르 귄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흑인이나 여성, 양성을 통한 차별적 요소의 배제에 대단히 깊이 신경을 써왔다. 글로 추정하건데 에큐맨이나 게센의 주류는 현실의 흑인과 유사하며 이는 어스시의 세계에서도 그러하다. 『아투안의 무덤』에서 보듯 백인들도 소설 속의 세계에서 존재하지만 현실에서와 달리 이들은 흑인들에 비해 일종의 비주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일곱 번째 수록작인 「겨울의 왕」에서는 그녀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양성인인 게센 사람들에 대해 지칭의 대명사를 ‘he’ 로 쓴 채 출간하였고 이후에 게센 인들에 대한 보통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는 코멘트를 달아두고 있는데, 역시 시공사에서 출간했던 『어둠의 왼손』에서도 게센 사람들은 여전히 ‘그’로 지칭되고 있다. 원문을 구해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이 것이 역자의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어둠의 왼손』에서도 케머 (양성인이 성적 구별을 갖게 되는 교배기) 기간의 역할에 관계없이 ‘he’로 사용되었으며, 게센 사람들에 대한 여성형 대명사의 사용은 바람의 열두 방향을 출간하며 「겨울의 왕」의 재집필 과정에서 정정된 듯 하다.


각설하고 이와 같이 그녀의 작품에는 60년대의 시대상과 그녀의 주관들이 반영되어 있으며, 물론 르 귄의 주관이란 대체로 「혁명 전날」의 코멘트에서처럼 그녀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던 ‘오도주의’. 즉, 일종의 무정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여행」이 마약을 옹호하는 작품으로 오해받은 것도 르 귄의 이러한 경향과 무관할 것인가?



3. 개인에 대한 성찰과 이름의 상징


에스트라벤은 ‘사람은 다 저마다의 그림자를 지니고 살게 마련’이라 말한다. 양성인은 텔레파시에 대한 두려움을 보인다. 겐리 아이는 그(르 귄의 표현대로라면 ‘그녀’)가 완성체로서 타인에게 자신의 영역을 침해받는 것을 좀더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르 귄은 그렇듯 자신의 글에서 각자의 고유한 영역이 있던 개인에 초점을 맞춰보고 있다. 핀쳔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는 에디파 개인보다는 사회 풍자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겠지만, 「멋진 여행」에서는 환각상태를 극복하고 멋진 여행을 떠나는 루이스에게 집중되고 있다. ‘어스시 시리즈’에서도 각각의 연작 작품에서 ‘게드’에게, ‘테나’에게, ‘아렌’에게, ‘테루’에게 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고독이야, 알았어? 고독이 주문이었던 거야. 고독은 아주 강한 힘이 있어.”

(어슐러 K. 르 귄, 「파리의 4월」中)

그리고 개인에 대한 관점은 이제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확장된다. 그녀의 데뷔작인 「파리의 4월」에서 1961년의 고고학자 페니위더와, 두려움에 떨던 북부 갈리아의 노예, 7000년 후 견우성의 여인 키슬크를 루이 11세 시대의 르누아르의 집으로 불러 모은 것은 ‘고독’이었다. 단편 말미에서 보여지는 ‘고독’의 해소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는 ‘어스시’의 세계에서 자신의 참이름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는 상징적 행위와도 그 궤를 함께한다.


이러한 개인 및 타자와의 관계로의 확장은 단순하게 두고 볼 이야기들은 아니다.


‘참이름’이라는 것은 개인의 관계를 확장하는 상징이며, 한편으론 권력의 도구 내지 독점적 정보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의 공유는 권력이 분산되어 억압이 사라지고 개인의 신뢰와 존엄성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어둠의 왼손』에서 에스트라벤이 말했던 애국심. 즉, 공포와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 대입해보자.‘참이름’을 공유함으로써 인간 신뢰라는 기본적 틀 안에서, 태극의 도형적 상징. 즉, 양극의 조화를 통해 ‘타인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애국심이라는 ‘공포’ 하에 벌어지던 분쟁과 증오, 침략이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기실 이런 ‘조화’를 통한 ‘완성’이 이런 사회적 층위에서 역으로 다시 개인의 층위로 돌아간다면, 『어스시의 마법사』의 말미에서 보듯 게드가 시련을 극복하고 자아를 완성하는 과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으로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어둠 상자」와 같은 단편들에서나 여러 장편 작품에서 ‘그림자’가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되는 것은 눈여겨 볼 일이다.)



4. 단편집의 묘미


단편과 장편은 표현상으로도 ‘Short story'와 ’Novel'로 그 장르가 완연히 다른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단편은 단일한 주인공과 사건, 갈등을 촘촘하게 짜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할 수 있다. (창비 136호에 실린 최재봉의「장편소설과 그 적들」에서.)


따라서 이러한 짤막하지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갖춘 단편은, 그 상징이나 언어미학적 부담이 있다 할지라도 장편에 비해 시간적, 심적 부담은 덜하기 마련이다. 또한 경제학의 이론에서처럼 선호체계의 볼록성을 가정한다면 하나의 긴 이야기보다 좀더 다양하게 구성된 짧은 이야기의 다발에 어떤 이점과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르 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은 헤인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 네 편, 어스시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 두 편으로 나름으로 편중성이 있다 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는 단편집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어둠 상자」와 같이 작품의 의미를 짚기 힘든 작품들은 읽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짤막한 이야기를 즐기기에 큰 부담은 없는 듯이 보인다.


르 귄의 단편들에서는 앞에서 길게 부연했듯, 각각에는 적절한 시대상이 반영되고 그에 대한 르 귄의 주관적 관점이 녹아들어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여기에 대해 그녀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명확히 드러내는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를 얘기 속에 던지고, 거기에 대한 호불호는 읽는 이에게 맡겨두거나 은유적으로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감춰두는 셈이다. 따라서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을 읽는 동안 독자는 그녀의 어조나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주제적 접근이 아니라 할지라도 르 귄의 섬세한 필치는 등장인물들을 조정하고 그를 통해 적절한 갈등과 심리를 생생히 전달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플레이보이 지에 수록되던 중의 재미있는 일화를 남긴 「아홉 생명」은 작중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흐름을 펼쳐내는 능력이 돋보이는 수록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에 담긴 일화가 이 작품의 역자로 하여금 「바람의 열두 방향」에 대한 번역 의지를 끌어냈다고 하니,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가 탄생한 셈이다.)


 이 단편집은 일정한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주제나 내용에 있어 다양성과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5. 글맺기


나는 르 귄의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찾아 읽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읽었던 여러 르 귄의 작품들에 대해 나름의 경의와 애착을 갖고 있다. 어슐러 K. 르 귄은 어스시 시리즈나 헤인 시리즈를 통해 이미 확고한 입지를 다진 저명한 작가이며, 대중적인 동시에 ‘SF 작가 중 노벨상을 받는다면 1순위는 르 귄일 것’이라는 상투적이고 상업적인 문구에 동의하게 되는 작가이다. 그녀가 받았던 유명한 상들과 극찬에 대해 좋든 싫든 긍정적인 관점에서의 선입견을 갖고 어떤 품위라던가 가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현재 한국의 장르문학 시장은 다소 정형화된 틀에 갇혀있고, 거기에서 또 취향에 따라 여러 갈래가 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일반의 도서 시장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이 장르작품을 소비하는 시장에서 갈래진 일부의 매니아 층을 제외하고 다른 매니아 층에서 얼마나 선호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근래에는 문학/영화/만화/음악을 막론하고 보다 빠르고 간결하며 신나는 컨텐츠가 선호되고 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토이의 최근 앨범과 원더걸스의 앨범 판매량 비교에서 보듯 구매력이 강한 매니아 층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며 시장의 다양성을 유지시켜주지만, 앞으로 장르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애착을 보내줄 독자들이 그러한 매니아 층의 수요 시장을 승계하고 이어줄 수 있을까?

이런 배경을 두고 보자면 르 귄의 작품은 글에 담긴 사고의 깊이나 무게는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다. 그 것은 일종의 품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루하다’는 짧고 무성의하지만 가장 솔직담백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내가 뭔가 무게감 있는 작품에 더 높은 점수를 매겨두고 가치의 우위를 논하는 어설픈 우월감의 소유자로 오해할 지도 모르겠다. - 어쩌면 그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몇 마디 변명을 해두자면. 나는 가치의 우위를 논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며 보다 다양한 컨텐츠가 수용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품을 읽는데 있어 필요한건 약간의 인내심이다. 글에 몰입하기까지의 아주 짧은 인내심이나 차분함. 이 것이 이런 유형의 작품에 담긴 환상의 묘미와 사색을 즐기는 대가라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 값 비싼 것은 아닐성싶다. 물론, 이런 유형의 작품을 즐기고 싶지 않다면, 혹은 다른 작품에서 자신이 원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 것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나는 자기 취향을 남들이 공유해주길 바라며 음악을 권하고 어떤 영화를 권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권유를 거절한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한번쯤 사색을 즐겨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것을 장르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찾아보고 싶고 또 좀더 부담 없이 즐겨보고 싶다면. 분명 단편집인 『바람의 열두 방향』은 거기에 대한 좋은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

http://en.wikipedia.org의 표제어 The Left Hand of Darkness. Background 항목 中


... Throughout the novel Gethenians are described as 'he' whatever their role in kemmer. This was also the case in the unrelated Gethenian short story Winter's King when it was originally published; but in the interests of equity, when she republished it in her collection  The Wind's Twelve Quarters, Le Guin rewrote it so that all Gethenians are referred to as 'she'. ...


어슐러 K. 르 귄의 공식 홈페이지 中 Biographical Sketch

http://www.ursulakleguin.com/BiographicalSketch.html




Comment ' 5

  • 작성자
    Lv.25 김상규
    작성일
    15.07.11 19:39
    No. 1

    제가 sf를 좋아함에도 어둠의 왼손은 끝까지 읽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책에 담겨있는 사색과 분위기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거나 너무 어렸을 때 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 나이들고 읽어서인지 함축적이고 곱십는 듯한 문장이랑은 정말 안맞는데도 바람의 열두방향은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 어딘가에 어둠의 왼속이 있을텐데 지금 다시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나이를 먹으니 예전에는 읽기 힘들었던 작품들에서 재미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반대로 예전에는 재미있었던 작품을 도저히 손대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水流花開
    작성일
    15.07.11 22:19
    No. 2

    훌륭한 비평글이네요. 익숙한 책 제목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안타깝게도 어둠의 왼손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네요. 읽을 때는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후기작들이 더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5.07.11 22:41
    No. 3

    훌륭한 비평을 위해서는 훌륭한 작품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7.12 22:13
    No. 4

    개안하고 갑니다. 다른 비평글도 있다면 환영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구작가
    작성일
    15.07.14 12:24
    No. 5

    말이 필요없네요. 좋은 글의 특징을 잘 배우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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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SF 제로섬게임 Lv.17 [탈퇴계정] 21.12.31 104 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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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SF 취미용으로 쓰고 있는 글 비평 부탁드립니다 +2 Lv.48 치즈돼냥이 19.04.19 595 0 / 0
29 SF 현직 바이러스다 질문 비평부탁드립니다 +4 Lv.13 빌드업 18.06.15 724 2 / 0
28 SF [파국의 끝에서] 혹동한 비평 부탁드립니다. +6 Lv.33 글로틴 18.06.11 751 1 / 0
27 SF '리턴' 비평 부탁 드립니다. Lv.14 기울어진달 18.05.29 542 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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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SF [일연/SF현대판타지] The Exodus:탈출기 비평 요청... Lv.32 즐펜 16.08.16 1,382 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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