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권용찬
작품명 : 상왕 진우몽
출판사 : 드림북스
(권작가의 글은 모두 시작은 했지만 2권 넘어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짜증이 난다고 할까? 하여 한 작품을 골라 지리나 역사 기술이 나오는 부분을 한번 철저분석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장문이 되어 무한 스크롤의 압박이 있지만...)
(1권)
“진대의는 호북성 무한 태생으로...” (1권 13p)
“호북의 성도 무한성 내부는 가운데 배가 다닐 정도의 커다란 수로가 가로지르고, 크게 서북구, 서남구, 동북구, 동남구로 나누어진다.” (1권 22p)
‘진우몽은 그런 서남구를 빠져나와 수로를 가로지르는 긴 석조다리를 건너...“ (1권 22p)
어느 분의 지적대로 호광성이 동정호를 기점으로 호북성과 호남성으로 나뉜 것은 청대이므로 명대에는 호광성(호광승선포정사사)이 타당하다.
그런데 무한(武漢)이라는 명칭은 장강 이북의 한양부(漢陽府)와 이남의 무창부(武昌府), 하구진(夏口鎭; 나중의 한구)의 세 지역(무한삼진)을 아우르는 강역의 이칭으로 명대부터 사용된 것이므로 무한성 어쩌구 하는 것은 완전한 개뻥이다. 현재의 무한시 중심에는 수로가 아니라 장강(양자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장강을 성벽으로 잇지 않는 한 무한성(城)이란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무한의 남북, 한양과 무창을 잇는 무한장강대교는 1957년에야 개통되었으며 그 길이는 무려 1670m이다. 명대에 석조로 지었다면 긴 석조다리이기는 하겠지만...
“... 주방 안에 있어야 할 노 주박사(酒博士: 술파는 요리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1권 24p)
“... 그리고 주점의 주인이자 숙수인 노 주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1권 25p)
이 노 주박사라는 인물은 ‘상왕 진우몽’의 초반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데, 주박사라는 직호 뒤에 착실히 ‘술파는 요리사’란 설명까지 붙여 놓았다. 술파는 요리사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술 안파는 요리사는 따로 있다는 말인가? 작가 자신도 어색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페이지에서 ‘주점의 주인이자 숙수‘로 부연설명해 놓았다. 워낙 차의 종류가 많으니 다관(茶館)의 주인은 소믈리에처럼 다박사(茶博士)가 되어야 하는데, 줄줄이 술의 종류를 꿰고 있는 주박사(酒博士)가 필요한 곳은 주점(酒店)이다. 주점은 음식을 함께 파는 곳이 아니라 취권 등 옛날 성룡 영화에 곧잘 나오듯 술항아리를 쌓아놓고 국자로 퍼서 근수를 달아 파는 곳이며, 이런 주점의 주인이 주박사다. 요리사를 존칭하고 싶으면 술을 팔건 안 팔건 주사(廚士) 또는 그냥 박사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면발을 삶은 후 다시 기름에 비벼 말려 두었다가, 끓는 물에 넣어 간장, 파, 실고추, 무 등을 버무려 먹던 열간면(熱干面)을 먹던 공판부는...“ (1권 100p)
권작가도 무한의 지방음식이 열간면이라는 얘기를 듣기는 한 모양인데, 열간면((熱干緬) 또는 열건면(熱乾緬)은 1920년대에 만들어져 1930년에야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음식이다. 국수(緬)가 아닌 ‘열(熱)로 말린(干) 얼굴(面)‘이라는 의미의 열간면(熱干面)은 명대부터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실고추가 들어간 열간면(熱干緬)은 고추가 전래되었을 명말 이전에는 못 먹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들 몰래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무한성 행정기관)의 참의(參議: 종사품 보좌관)를 매수했다거나,...”
승선포정사사의 뒤에 친절히 ‘무한성 행정기관‘이라고 설명을 달았는데, 무한성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명대의 ’승선포정사사‘라는 긴 명칭은 원대의 ’성(省)‘에 대응하는 것으로 승선포정사사는 성(城)급 행정기관이 아니라 성(省)급 행정기관이며 호광승선포정사사(호광성)의 치소가 무창부에 있었던 것이다.
"철관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1권 159p)
"철관음은 청심오룡차의 어린 찻잎만을 골라...“ (1권 160p)
철관음은 복건성 안계현에서 생산되는 우롱차(오룡차)의 한 품종으로 당대부터 유명하여 원래 위음차(魏蔭茶)라고 불렸는데, ‘철관음’이란 이름은 찻잎의 모양이 관음 같고 무겁기가 철과 같다고 하여 청나라 건륭제가 하사한 이름이므로 명대에는 나올 수가 없는 명칭이다.
“형의권은 회족의 비전무공인 심의육합권을 보고 만든 무공이다. 다만, 형의권은 외공을 바탕으로 한 심의육합권과는 달리 내공을 기초로 삼고, 도교적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 ...” (1권 187p)
아무리 작가적 상상력이 동원된다고 해도 형의권과 심의육합권은 엄연히 현존하는 권법이며 전승과 명칭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양 권법의 개파 시조가 동일한 실질적으로 동일한 권법이다. 먼저 형의권 측의 전승으로는 명말 산서성 대동 출신의 희제가(姬際可)가 육합심의권을 창시하여 하북, 하남 등으로 전파되었으며 형의권이라는 명칭은 1856년 하북의 권사 이비우(李飛羽)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현재는 하북 형의권과 산서 형의권, 심의육합권의 세 유파가 있는 것으로 본다.
한편 심의육합권 측의 전승으로는 청초에 숭산 소림사에서 수행하던 산서성 노산(魯山) 출신의 희제가가 창술에서 힌트를 얻은 뒤 고향에 돌아가 심의육합권을 완성시켰으며, 소림사에도 심의파(心意把)라는 비전 기법으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희제가의 사망 후 2, 3대가 지나자 조계무(曹繼武)의 두 제자 대룡방(戴龍邦)과 마학례(馬學禮)에 의해 심의육합권은 대가(戴家)파와 회족(回族)파로 분리되어 각각 대가심의문과 심의육합문으로 이어졌다. 회족파인 마학례에 의해 하남성에 전승되던 심의육합문은 청말 매장도(買莊圖)에 의해 잠시 반짝했을 뿐 현재는 존속이 불명하고 현재의 심의육합권은 상해로 이주한 대가파를 통해 전수되었다.
권작가는 회족이 관련되어 팔극권과 혼동한 듯 하지만 팔극권조차 신강이나 몽골이 아닌 북경 아래 창주의 회족 마을 맹가촌에 전수되던 권법이고 심의육합권의 회족파조차 하남성 남양의 회족에게 전수되던 것이다.
서역의 도사 ‘나’가 전수했다는 전설뿐인 팔극권과는 달리 심의육합권은 기원이 상당히 명확한 권법으로, 형의권 또는 심의육합권은 명말 청초 사이에 산서성에서 희제가에 의해 창시되어 회족에게도 전승되었을 뿐 회족의 비전은커녕 회족에서 유래하는 권법이 아니다.
“그래서 황하를 건너 대흥안령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난 뒤에 몽고의 성도인 호화호특에 다다를 수 있었다.” (1권 188p)
황하 이북에 있다고 해서 하북성이고 대흥안령산맥은 만주와 몽골 사이에 있으며 사막은 몽골고원(외몽골)보다 북쪽에 있는데, 황하에서 북상하여 북경에서 동으로 틀어 만주로 갔다가 서로 틀어 대흥안령산맥을 넘은 뒤, 북으로 틀어 사막에 도달하고 서남으로 틀어 내몽골의 호화호특에 도달했다는 말인가?
더구나 호화호특이 몽고의 성도(省都)라니? 명나라에도 내몽골자치구 같은 게 있었다는 말인가? 호화호특은 한때 오이라트를 누르고 북경까지 침입했던 북원의 군주, 알탄칸이 1565년 한인 등 정주민 백성을 위해 세운 성곽도시로 그 이름조차 ‘백성’을 몽골어로 음역한 ‘바이신’이었다. 겨우 몇 년 안 된 1571년에 명나라와의 강화에 의해 알탄칸은 순의왕(順義王), 바이신은 귀화성(歸化省)이라는 귀순용사삘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1634년 내몽골을 점령한 청나라가 호화호특 동북에 팔기병이 주둔하는 수원성을 세우고 귀화성과 두 성을 아울러 ‘귀수’로 호칭하였고 국민당 정부도 귀수현으로 호칭하였으므로 몽골어로 ‘푸른 성’이라는 뜻의 후흐호트가 정식 명칭이 된 건 1950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므로 명나라 시절 호화호특은 귀화성으로 부르건 바이신으로 부르건 몽골인의 땅으로 명나라와의 교역중심지였을 뿐이며 성도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건 내몽골을 점령한 청나라 이후이다.
(2권)
“여하튼, 그 복씨한테 객잔을 사들인 지금 주인은 이름이 서고국인데, 무한 동쪽 황강현의 정구품 주부를 지내다가 퇴임을 했다는군. ...” (2권 108p)
무창 동남에 위치하는 황강은 수당원명청 내내 황주(黃州)로 명청대에 황주부(府)였다가 중화민국이 황주현으로 바꾼 것을 중국 공산당은 투쟁지구 명칭으로 ‘황강지구‘로 불렀으며 내전에 이기자 황강현으로 하고 1995년에 황강시로 승격시켰다. 무려 2000년의 유래를 가지는 황주라는 지명을 황강으로 바꾼 중공도 그렇지만 20세기의 지명을 명대에 사용한 권작가는 더 거시기하다.
“노 주박사님은 요리의 시작은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라고 하셨는데... 마파두부는 어떨까?” (2권 117p)
“마파두부에서 ‘마’는 얼얼하게 맵다는 의미이고, ‘파’는 매운 맛이 스며들어 두부를 흐늘흐늘하게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2권 117p)
중국음식이 연원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매운 요리는 고추가 전래된 명말 이후에야 시작되었으므로 대개 청대에 시작된다. 특히 마파두부는 유래가 아주 명확한 음식으로 청나라 동치제 1년, 성도(成都) 북쪽 만복교(萬福橋)의 음식점 점주 진삼부(陳森富)의 처 유(劉)씨가 처음 만들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유씨는 얼굴의 마마자국 때문에 진마파(陳麻婆)로 불렸으므로 그 음식은 ‘진마파두부‘로 불렸으며 이것이 지금의 ’마파두부‘가 된 것이다. 동치제 1년은 서태후가 날리던 1861년이므로 19세기에 처음 나온 마파두부를 명대에 만들어 먹었을 리는 없다.
또한 삼(모시)이나 천연두를 가리키는 ’마(麻)‘는 마비시킨다는 뜻도 있으므로 얼얼하다는 설명을 갖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를 가리키는 ’파(婆)‘에 흐늘흐늘하다는 의미가 있다는 권작가의 설명은 출전이 의심스럽다. (권작가가 1권에 언급한 동안자계(東安子鷄)라는 요리는 당대에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대의 매운 동안자계는 고추가 전래된 후인 청대에나 나왔을 것이므로 당대의 동안자계와는 다른 음식일 것이다.)
(3권)
‘무한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라전현.
육 년 전 호북에서 안휘성으로 넘어가는 관도가 뚫리고, 양 성의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3권 79p)
청대에 호광성을 호북과 호남으로 나눈 것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안휘성은 명대에 강소성과 함께 남직예성이었다. 여기서 ‘직예성’은 ‘경기도‘와 마찬가지의 뜻으로 남경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남직예성이고, 하북성은 북경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명대에는 북직예성이었다.
남직예성은 청의 정복 후인 1644년 강남성이 되고, 강희 6년(1667)년에 이 강남성을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분할했다. ‘안휘‘라는 명칭은 당시의 성도인 안경(安慶)과 휘주(徽州)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므로 명대에 미리 안휘성 같은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을 염려는 전혀 없다.
호북과 안휘 간의 관도가 명대에 처음으로 뚫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한 자체가 장강 남북의 삼진(한양, 무창, 하구)을 아우르는 명칭이고 안휘의 중심인 안경도 장강변의 도시이므로 양자 간의 교통은 주로 수운을 이용했을 것이므로 라전현이 지도 상에서 양 성 간의 접경에 위치한다고 무슨 이점이 있을 것인가? 장강 변의 안경과 내륙인 휘주 간에 관도가 새로 뚫린다면 혹시 모르지만...
“...라전현은, 유사한 이점으로 번화해진 북쪽의 홍안과 동쪽의 무혈보다 더욱 큰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평가되고 있다." (3권 79p)
"호북에서 하남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역인 홍안(紅安)과 강서로 넘어가는 접경지역인 무혈(武穴)까지 해서,...“(3권 327p)
관할을 피해가기 위한 범죄단체도 아니고 권작가는 두 성의 접경지역이면 무조건 경제적 이점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행정구역의 단위가 지역중심을 관할하는 성(省(포정사사 포함): 송, 명, 청)이나 그 지역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의미하는 도(道: 당나라나 현대 한국), 로(路: 원나라)이므로 두 성의 접경지역은 오히려 양 지역중심으로부터 가장 멀어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될 것이다. 홍안도 무한에서 하북을 향하는 관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라전현과 촌구석 사정이 마찬가지였겠지만, 무혈은 역시 장강 변이므로 강서와의 접경지역이 아니라 무한과 안경 사이의 중계도시로 번성했을 것이다. 즉 호북과 안휘 간의 접경지역은 라전현이 아니라 차라리 무혈로 그렸어야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라전현은, 유사한 이점으로 번화해진 북쪽의 홍안과 동쪽의 무혈보다 더욱 큰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평가되고 있다."
그 안쪽에 북경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어떤 지역보다 소비인구가 많은 하북쪽 관도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3권 79p)
도대체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 지리 설명이다. 강소성과 안휘성이 명대에 남직예였던 것은 남경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인데, 남경 옆에서 난데없이 하북과 북경 타령이라니... 무한(장강 변)에서 북경을 가는 길은 하남 정주(황하 변)를 통해 하북 석가장을 거치는 길이고, 남경(역시 장강 변)에서 북경을 가는 길은 산동 제남(역시 황하 변)을 거치는 길인데 호북-안휘 접경인 라전현이 하북쪽 관도가 될 턱이 있는가?
(4권)
“연청무관.
백결선생이 차 한 잔 대접받을 곳이란 바로 연청권(燕靑拳)을 가르치는 무관이었다.“ (4권 35p)
연청권 역시 현존하는 권법으로 곽원갑이 바로 연청권의 한 유파, 미종권(迷踪拳)의 권사다. 북송 시절 연청이 창시하여 연청권이라고 하고, 연청이 양산박으로 도망갈 때 종적을 지웠다고 하여 미종권이라는 전설도 있지만 양산박이 나오면 일단 뻥이 되고, 역시 북송시절 노준의가 소림사에서 배워 나와 연청에게 전수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소림사 곤법 자체를 원대에 라마승이 전수했다는 게 정설이므로 소림사가 나오면 역시 뻥이 된다. 더 확실한 전설은 청나라 건륭제 때 산동의 손통(孫通)이 전수했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은 청나라 가경제 때(18 내지 19세기) 손통정(孫通精)이 연주(兗州)의 장(張)모씨에게 사사한 뒤 소림사에서 수련하며 연청권을 완성해 나왔다는 것이다. 손통정이 하북 창주에서 기른 제자 손후은, 손만년이 곽씨 집안, 곽원갑의 증조부에 전한 것이 곽씨 미종권이다. 다른 연청권 유파들은 그리 유명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연청권이 명대에 산동도 하북도 아닌 호북에서 전수되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임두명은 장내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염공자가 펼치는 공격이 팔괘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4권 65p)
대부분의 중국무술들이 양산박, 소림사를 들이댈 만큼 그 기원이 불명하지만, 특이하게도 팔괘장만은 창시자의 생몰 연월일까지 아주 명확하다. 즉 팔괘장을 창시한 동해천 선사는 청나라 가경 2년(1797년) 10월 13일, 하북성 문안현에서 태어나 광서 8년(1882년) 10월 15일 사망했으며, 1851년에서 1861년 사이에 안휘성 구화산에서 화장하 도인에게 번자권(파자권?)을 배운 뒤 팔괘의 역학을 깨우쳐 팔괘장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괘장이 창시된 것은 19세기, 아무리 빨라도 1861년이므로 명대에 진우몽이 연청권의 제자를 상대로 팔괘장을 날렸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안경.
안휘성 남서부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와 광철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휘성에서 가장 큰 선착장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4권 205p)
안휘성은 명대의 남직예성을 청대에 강남성으로 바꾼 뒤,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분할한 것이며 안휘성은 안경과 휘주의 앞 자를 따서 명명한 것임은 1권에서 이미 알아본 바 있다. ‘광철’은 당연히 ‘철광’을 잘못 쓴 것일 텐데, 도대체 권작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리 잘 알지도 못하는 지식들을 억지로 만들어내 열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글을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모양이지만 독자가 알고 나면 깡통 취급을 할 텐데...
“고가장은 선착장에서 대략 한식경 거리에 있었다. 기반을 닦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게 물길 덕분이라고 생각한 고가장 사람들은 장원을 선착장과 수로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의 정면에 두었다.” (4권 218p)
안경은 장강(양자강) 북안에 위치한 도시인데, 안경 근처에서 강폭이 1km에 가까울 중국 최대의 강, 장강을 물길이나 수로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권작가의 스케일이 놀라울 뿐이다. 또한 수로로 부를 쌓았다는 고가장은 한식경(30분 거리면 2km 정도?)이나 걸릴 만큼 왜 그리 선착장에서 멀리 자리를 잡았을까 생각해보니, 안경이 수많은 호수로 뒤덮여 장강에 홍수가 나면 수해를 입곤 하는 저지대이므로 안경에 드문 절벽을 찾아 장원을 세운 거라고 생각해줄 수 있을까?
“안경을 떠난 진우몽은 곧바로 하북을 목표로 해서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말이나 마차를 타지 않고서 큼직한 보따리 하나를 등에 메고 오직 도보에 의지한 이동이었다.“ (4권 230p)
"이곳은 산동성 초입의 단현(單縣)을 지나 금향(金鄕)을 앞에 둔 낮은 야산이었다. 안경을 떠나고 팔일이 흐른 뒤였고 이번으로 일곱 번째 노숙이었다.“ (4권 231p)
권작가는 안경에서 하북을 가는데 말이나 마차를 타는 게 당연함에도 진우몽의 성격이 이상해서 도보로 간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안경에서 하북으로 가는 가장 정상적인 길은 운하를 이용하는 것일 것이며 그러지 않을 거면 왜 운하를 뚫었겠는가? 말값이나 마차삯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삯이 없거나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걸어간 듯한데, 굳이 안경에서 하북을 향해 도보로 북상했다면 합비, 서주를 거쳐 산동성 제남을 향하는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서주의 북쪽에는 남북으로 긴 미산호(微山湖)가 위치하는데 제남으로 직행하려면 호수의 동안을 따라 가야하고 제녕(공자, 맹자의 고향)을 거쳐 가려면 호수의 서안을 따라 북상해야 한다. 권작가가 얘기하는 단현과 금향이 산동성 경계지역에 있는 건 맞지만 이 길은 미산호의 서측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는 길로, 진우몽이 합비에서 굳이 호주(毫州), 상구(商邱)를 거쳐 멀리 우회한 것이 아니라면 권작가가 또 쓸데없이 지명을 나열하여 자충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천진은 송나라 때 이고해구(泥沽海口), 금나라 때 신안해연, 원나라 때 직고(直沽) 또는 해진진(海津鎭) 등으로 불린 조그마한 항구였다.
하지만 원나라 때 강남으로부터 해마다 세량(稅糧)을 바다로 날라 이곳에 하역하면서 급속히 발전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천진위(天津衛) 혹은 천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4권 271p)
천진은 고(古)황하인 고수(沽水) 하구의 진흙(泥) 퇴적지형이므로 이고해구란 이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고, 해연은 해변을 의미할 것이므로 각각 지명은 아닐 것이다. 중국 위키에 의하면 금나라 때인 1211년에 직고새(直沽塞)를 설치한 것이 천진의 가장 이른 명칭이라고 했고, 원대에 이 직고새를 해진진(海津鎭)으로 개칭하였다고 하고 있다. 명대에도 초기에는 그대로 해진진으로 부르다가 영락제가 정난지변에 성공한 다음 해인 1404년 크리스마스 쌍이브(12월 23일)에 ‘천자가 건넌 나루’라는 의미로 천진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천진위의 ‘위(衛)’는 지명이나 행정단위가 아니라 군사단위이므로 ‘천진위 혹은 천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건 무식한 소리이고, 명대 천진에는 천진위뿐 아니라 천진좌위, 천진우위의 세 위소가 있다가 청대에 들어서서 단일한 천진위로 통합되었다.
(5권)
"천진을 벗어난 진우몽은 북경을 거쳐 선화, 장가구를 지나고, 하북의 북쪽 끄트머리인 장북에 당도하여... (4권 87p)"
‘...상단은 관문이 있는 대청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객잔에 들리지 않는다는군요. ...“ (4권 94p)
권작가는 명청대의 역사적 지식이 전혀 없이 현대의 하북성 지도를 보며(사실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명을 나열한 것이 확실하다. 자료실에 첨부한 내몽골 지도를 보면 북경에서 호화호특을 향하는 현대의 110번 공도는 확실히 장가구(張家口)를 지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명나라 당시에는 지도의 창평(昌平) 바로 위를 지나는 내장성과 장가구를 지나는 외장성이 있었으며, 내장성을 나가는 관문이 거용관(居庸關), 외장성을 나가는 관문이 장가구(張家口)였다. 1449년 명나라 영종이 에센에게 포로가 된 토목보조차 장가구와 거용관 사이의 회래(懷來: 지도에는 간자로 표시됨) 근처이므로 명초에는 내외장성 사이도 완전히 명나라가 장악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장가구는 1429년에 만리장성(외장성)의 주요관문인 대경문(大境門) 밖에 세워진 장가보(張家堡)에서 유래하는 곳으로, ‘문’이라는 의미의 몽골어 칼간으로 불리며 이름에 구(口)가 들어가듯 원나라 시절부터 몽골과 명을 경계짓는 관문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기술한 것처럼 장북(張北)까지 올라가서야 관문 통과를 앞두는 것이 아니라, 거용관에서 한번, 장가구에서 또 한 번 관문을 통과해야 하며 이미 장가구를 통과하여 관외로 나간 다음 새삼 듣보잡 관문인 대청구를 통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본인이 아는 대청구는 훨씬 동쪽, 길림성 옆의 통요(通遼)로 나가는 관문이다.)
또한 선화(宣化)는 명나라 때 만전도지휘사사(萬全都指揮使司)가 설치되어 있던 선부진(宣府鎮)을 청나라가 선양교화(宣揚教化), 즉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몽골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개칭한 이름으로 작품의 배경인 명나라 때는 선부 또는 선부진으로 불렸어야 맞는다.
원나라 시절 공화로(共和路)였던 장북(張北)은 장가구 이북이라는 의미일 것인데, 당시 북원의 영토였고 이후 내몽골을 점령한 청나라가 몽골부족을 재편하여 황제 직속의 차하르부(部)를 조직하고 이를 통괄하는 차하르 도통(都統)을 장북에 설치했다. 청나라 시절의 명칭이 장북구(張北口)였던 것으로 보아 명나라 시절 장가구에 있던 관문이 장북으로 북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명나라 시절에는 몽골 땅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북이라는 명칭도 문제가 되는 것이 삼국지에서 원소가 놀던 하북이나 당나라 시절 하북도(河北道)는 이보다 훨씬 남쪽이고 원나라 때는 상도로(上都路), 명나라 때는 북직예성, 청나라 때는 직예성으로, 명나라 시절에 하북이라 불렸을지는 심히 의문시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장가구 이북, 장성 너머까지 하북이라 불렸을지는 더더욱 만무하고... (명대에 북경을 둘러싼 하북이 북직예성, 남경을 둘러싼 강소와 안휘가 남직예성이었음은 1권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작가가 현대의 하북성 지도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첨부된 지도로도 알 수 있는데, 110번 공도 표시로 알 수 있듯 호화호특으로 가려면 장가구에서 서쪽으로 틀어야지 장북으로 올라갈 이유가 없다. 더구나 명나라 당시에는 내외장성이 있었는데 이련호특으로 가려면 북경 북쪽의 거용관을 거쳐 장가구로 나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고 호화호특으로 가려면 징기스칸의 침입 경로를 거꾸로 거슬러 북경 서쪽의 자형관(紫荊關)으로 나가 산서성 대동의 북쪽 관문으로 나갔을 것이므로 장가구로 나가 외장성 밖에서 몽골을 서로 횡단하여 호화호특에 도달한다는 권작가의 경로는 터무니없는 설정이다.
"내가 가고자하는 곳은 이련호특으로 몽고인들의 땅에서도 북쪽 끝에 있는 땅입니다....“ (4권 90p)
이련호특(二連浩特, Erenhot)이 몽골 북쪽 끝이라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이련호특은 중국의 내몽골자치구(내몽골)와 몽골공화국(외몽골) 간의 국경도시일 뿐이다. 내몽골의 이련호특과 외몽골의 대응 국경도시 자란우드는 청나라가 내몽골을 점령하고 나서야 국경도시가 되었지 그 이전의 역사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명대에는 아직 몽골고원의 초입에 해당하는 이름 없는 한촌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련호특이 몽골의 북쪽 끝이라면 그 위의 몽골고원은 시베리아란 말인가? 권작가는 내몽골이 터무니없게도 몽골의 전부라고 알고 있지만 이련호특은 몽골의 북쪽 끝은커녕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내외몽골의 국경이므로 내몽골자치구의 북쪽 끝도 아니다.
“...하북을 넘어 몽고에 가는 상인들은 거의 성도인 호화호특을 목적지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단 이곳을 지나는 상단이나 표국행렬을 따라 몽고에 들어간 다음 이련호특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4권 94p)
호화호특이 몽골의 성도(省都)라는 설명이 틀렸음은 이미 살핀 바 있고, 장가구를 기준으로 할 때 호화호특은 서쪽이고 이련호특은 북쪽인데, 호화호특으로 가서 이련호특의 길을 찾는다는 건 지리에 어두워서 그렇다고 치지만 산서성 대동도 아닌 장가구에서 이미 장북으로 길을 잘못 들어놓고도 여전히 호화호특 가는 길을 찾고 있지 않은가?
"관문을 지나 호화호특으로 향하는 상단들의 뒤를 따른 진우몽과 고묘화 등은 몽고인들을 견제하고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화덕을 지나 양황기에 다다랐다.“ (4권 138p)
(146p, 147p에는 ‘양황기’가 아니라 ‘양화기’로 나옴)
내 짧은 지식으로 1932년 이전의 화덕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명나라 당시 이 지역은 관외였고 화덕(化德)이라는 역시 귀순용사삘의 명칭을 볼 때 이는 청나라의 내몽골 점령 이후에 생긴 지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드디어 이 글을 쓰게 만든 동기가 된 양황기(鑲黃旗)가 튀어 나왔는데, 양황기는 만주 8기 중에 상삼기에 속하는 명칭이 아닌가? 지도에서 그 우측을 보면 정양백기(正鑲白旗), 정람기(正藍旗)가 차례로 위치하며 정람기 우측에 원나라의 여름 수도였던 상도(上都) 유적이 표시되어 있다. 이들은 청나라가 몽골로부터 북경을 방어하기 위해 만주 8기 중의 3기를 주둔시켜 생긴 지명이다. 명나라를 배경으로 무협을 쓰는 작가라서 청나라에 대해서 무지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려면 현대지도를 펴놓고도 지명을 잘 모르면서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어줍쨚은 짓을 안 하면 될 것 아닌가?
“...진우몽은 자신들이 이련호특의 회족들을 만나고자 이 땅에 들어왔으니 도와 달라 청했다.” (5권 159p)
"은인들께서 우리 회족들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5권159p ~ 160p)
"심의육합권의 전인을 만나고자 합니다.“ (5권 160p)
내몽골에 회족이 안 사는 건 아니지만(현재 내몽골 인구 중 몽골족 17.13% 대 회족 0.9%) 하필 신강도 아닌 몽골 초입(이련호특)에서 회족을 찾는 이유는 뒤에서 알 수 있다.
심의육합권이 명대가 아닌 청초에 회족이 아닌 한족에 의해 창시되어 한족과 회족에 나뉘어 전승되었음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작가는 회족을 한족과 다른 이민족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회족에 전승되는 팔극권과 심의육합권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를 믿는 회족들은 풍장(風葬)을 한다. 원래부터 시신을 대지에 놓아두고, 짐승들이 뜯어먹게 하는 것이다.” (5권 163p)
점입가경이다. 라마교를 믿는 것은 티벳인과 몽골인이며, 그 중에서도 풍장을 하는 것은 티벳인뿐으로 몽골인은 매장을 하며 설사 라마교를 믿는 회족이 있더라도 이들 역시 풍장이 아니라 매장을 할 것이다. 이로써 몽골 초입(작가의 관점으로는 몽골 북쪽 끝)인 이련호특에서 회족을 찾는 이유는 권작가가 회족과 티벳인, 몽골인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권작가가 가장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회족이 민족적 구분이 아니라 종교적 구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회교(이슬람교)를 믿는 한족들을 회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회족은 현재 중국 내의 전체 무슬림 2000만 중 약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대외무역이 성행했던 당대부터 원대까지 아랍계나 페르시아계 외래 무슬림과 접촉하여 통혼 및 개종한 한족으로 종교적 차이에 의한 생활습속의 차이로 한족과 구분될 뿐 언어로도 민족적으로도 한족인 것이다. 주원장의 마황후나 영락제의 정화가 회족 출신이라는 것은 이들이 회교를 믿었다는 것이지 이민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무함마드(마호멧)에서 따온 ‘마(馬)’씨가 좀 많았을 뿐 한족과 다른 성, 다른 이름을 쓴 것도 아니다.
이 한족 회교도들을 따로 구분하여 한회(漢回)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중국 내 이슬람 인구의 나머지 절반은 투르크 계통이지만 투르크제국을 이은 위구르제국이 9세기에 붕괴한 이후 신강 등 중국 변두리에 정착한 이들이 위구르족이고, 유라시아 서측의 투르크족도 오스만투르크나 티무르제국 등 정주국가를 이뤘으므로 명대까지 유목전통을 유지한 투르크족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나 키르키즈 등 일부뿐이다. 즉 권작가가 위구르족을 회족으로 착각했거나 회족이라는 이름으로 위구르족을 지칭하고자 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몽골이 아닌 신강에 사는 정착민족이었다는 것이다.
“눈이 내렸다.
숲을 빠져 나오자마자 저 하늘 끝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지던 작은 눈발은 얼마 있지 않아 당혹스러울 만큼 굵어졌고, 하루 동안 끊임없이 내렸다.“
“무릎까지 쌓인 눈과 온몸을 회초리처럼 때려대는 바람. ...” (5권 167p)
몽골고원이 초원인 이유, 몽골인들이 유목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고비사막 등 사막 주변의 연 강수량 200mm 이하의 반건조지대로 풀밖에 자라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몽골에 눈이 아주 안 오는 것은 아니지만 무릎까지 쌓일 정도(뒤에서는 살수가 눈 속에 숨을 정도)의 폭설이라면 가축이 떼죽음 당할 만한 큰 자연재해다. 몽골에서 자연재해를 조드라고 하는데, 폭설에 의한 자연재해는 차강(하얀) 조드, 반대로 눈비가 전혀 오지 않아 생기는 가뭄은 하르(검은) 조드라고 부르며 대략 60년을 주기로 큰 조드가 생긴다고 하는데, 가축이 재산인 몽골어 속담에 ‘조드를 이겨낼 부자는 없다“고 하고 있다.
어쨌거나 진우몽은 몇 십 년만의 큰 자연재해를 몰고 몽골로 들어섰으므로 환대는커녕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회족들의 마을은 특이하네. 마을은 없고 둥글한 천막 같은 것만 잔뜩 있으니.”
“파오라고 하는 겁니다. 이 척박한 환경과 유목생활을 하는데 몽고인들이 만든 주거형태죠.” (5권 186p~187p)
회족은 한족과 사는 곳이 동일하므로 몽골에서 파오에 살 리 없고, 파오(包)란 중국어로 만두란 뜻으로 만두를 닮은 천막이라는 비칭(卑稱)이므로 몽골인들에게 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몽골인들은 게르, 투르크인들은 유르트라고 부르는 이 천막은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굳이 연원을 따진다면 기원전의 흉노에서 연원할 것이다. 8세기 경 흑룡강 상류에 살던 몽골인들의 선조, 몽올실위는 움집 등 고정주거를 가지고 있었는데 10세기 경 몽골고원으로 진출하며 유연이나 투르크 등 선주 유목민족에게 게르 만드는 법을 배웠을 것이므로 원조는 아니며, 유연을 몽골계로 보더라도 흉노보다 몇백 년이 뒤지므로 역시 원조는 아니다.
"저들은 회족이쟎소? 왜 몽골인들의 집을 사용하는 거요?“
“집의 쓸모를 따지는데 족속을 가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회족들 역시 유목민족에 속하고, 한족들보다는 몽고인들과 더 가까운지라 그들이 파오를 사용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죠.” (5권 186p)
팔극권이 나온 회족 마을은 북경 청진 사이의 창주에 있었고 심의육합권이 전수된 회족 마을도 하남성 남양과 강소성 상해에 있었듯, 회족은 회교를 믿는 한족이므로 유목민족일 턱이 없고, 위구르족조차 유목민족이었던 것은 당송대의 얘기로 명대에는 이미 통상, 농경이나 목축으로 정주민족화되었으므로 명대에 회족이 몽골에서 유르트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련호특시 동쪽 사간낙이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구안다족의 파오.” (5권 203p)
“... 쌓인 눈과 사막의 지형을 고려할 때 반시진이면 운선달극사지(運善達克沙地: 사막)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5권 204p)
난데없이 시(市)가 튀어나오는 이련호특시는 애교로 봐주기로 하고, 사간낙이(査干諾爾)의 사간은 흰(Quagan), 낙이는 호수(Nur)라는 의미이므로 내외몽골에 차간과 누르가 들어가는 지명뿐 아니라 차간누르라는 지명도 많지만 권작가가 얘기하는 차간누르는 최근 누르사우루스 등 공룡화석으로 유명한 이련호특 옆의 차간누르(Quagan Nur)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지도에는 빨간 점에 공룡화석지향이라고 간자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운선달극(運善達克)은 훈산다크(Hushan Dake) 사지를 가리킬 것이므로 혼선달극(渾善達克)을 잘못 옮겨 쓴 것일 것이다.
이련호특은 시링골(錫林郭勒) 지방의 북쪽 끝이고, 혼선달극 사지는 남쪽 끝에서 시작되므로 양자의 거리가 몇백 km네 하는 시비는 너무 자주 해서 이젠 유치하므로 삼가기로 하자. 문제는 사지(沙地) 뒤에 번연히 괄호를 열고 사막이라고 토를 달아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날아드는 황사의 3대 근원이 고비사막, 황토고원, 훈산다크 사지라고 매스컴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들도 사막과 사지를 곧잘 혼동하니 권작가만의 잘못은 아니다.
사지는 모래 토양 위에 옅은 풀들이 자라고 있는 사막과 초원의 중간지대로, 봄의 건조기나 가뭄에는 모래먼지를 날리기는 하지만 훈산다크 사지는 별명이 ‘화원(花園)사지’일 만큼 갖가지 들꽃들로 덮여 있다. 그러므로 바람이 모래를 날려 형성되는 사구(砂丘) 등 사막 특유의 지형은 나타나지 않으며, 굳이 따지자면 사지의 특징은 끝없이 펼쳐진 옅은 초지라고 할 수 있을까?
“...회족 장정들의 복장과 장비들 또한 몽고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족들은 양가죽과 대충 무두질한 가죽상의를 걸친 채, 옻칠한 가죽 흉갑을 입었다. 안쪽에는 가공하지 않은 비단옷을 입는데, 활촉이 천을 뚫지 못한 채 천을 밀고 살속에 박히는 효과가 있어 큰 상처가 나는 것을 예방해 준다.“
(이후 장황하게 장비를 설명하는 세 문단 생략)
(5권 209p)
권작가가 회족은 몽골인과 유사하다고 계속 반복하는 것은 회족이 창시했다는 심의육합권을 이련호특에서 찾기 위해서임이 분명한데, 이후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몽골인과 유사하다는 회족의 장비에 대해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12세기 초반의 몽골인들의 전투장비 설명에 해당하며, 그것도 한 사람이 싸 짊어지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장비의 나열이다. 경기병과 중기병 설명을 섞어놓은...
권작가 등 많은 무협작가들이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은 주원장이 야만적인 몽골인의 원나라를 패퇴시키고 명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유라시아를 동서로 꿰는 세계제국기의 몽골은 마르코폴로가 기록하고 있듯 당시 세계 최선진국이었다. 강남에서 일어난 유적떼들을 피해 잠시 대도(大都; 북경)를 비우고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로 피난했던 것이 북원(北元)이며, 사가들은 북원의 구성원 중 한족이 작게는 50%, 크게는 70%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패퇴가 아니라 피난이었으므로 상류층이 아닌 몽골인이나 색목인들은 그대로 명에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명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명의 국민이 되었으며, 몽골 군벌들도 모두 북원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 상당수는 명에 귀순했다. 특히 1387년 명에 투항한 요동 군벌 나하추의 군단은 다음 해인 1388년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를 치는데 선봉이 되어 쿠빌라이 왕가의 숨통을 끊었다. 이들 몽골 군단들은 이후에도 명나라 북방 방어의 선봉이었으며 특히 영락제가 10대 1의 병력의 차이에도 정난지변을 승리하는 원동력이었다.
북원 왕실이 무너진 후 공백이 된 몽골의 패권은, 징기스칸 당시에는 몽골인이라고 쳐주지도 않던 중가리아 분지의 오이라트(서몽골)가 차지했고, 북만주에는 징기스칸 동생들의 동방 3왕가(동몽골)가 여전히 존속했는데 이후 청나라 8기 중 3기를 구성하여 새로이 편입된 몽골팔기(내몽골)들과 함께 중원을 점령하고 18세기에는 청나라의 일원으로 오이라트의 중가르제국과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었다.
어쨌건 몽골군의 군장은 동쪽에서는 청나라와 조선에 남아있고 서쪽에서는 러시아에 남았다. 청군과 조선군의 갑옷과 투구는 신기할 정도로 유사한데 이는 몽골군의 군장을 그대로 물려받은 탓이며, 특히 내부에 찰갑을 달아 안팎이 뒤집힌 듯이 보이는 두정갑은 화기에 대한 방어를 위한 몽골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백호-천호-만호로 이뤄지는 몽골의 군사제도는 조선과 명에 명칭조차 그대로 남았다.
즉 명대의 몽골인의 군장은 조선군 또는 청군의 군장 그대로일 것이며, 북원이건 오이라트건 아직 국가 체제 내에서 움직이고 있던 때이므로 수백 년 전의 야만적인 부족사회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번엔 해당되지 않지만, 특별히 상행을 위한 먼 장정을 떠날 때는 여벌의 옷과 강을 건널 때 부풀려서 사용할 방수가죽, 말을 위한 꼴 주머니, 그리고 훈제 고기와 응유 등의 기본식량을 소지하기도 한다.”
군장을 꾸리고 떠나는 상행(商行)이라니 뭔 생각으로 써놓은 건지 모르겠고, 초원을 따라 이동하는 몽골인에게 난데없이 꼴 주머니라니...? 더구나 몽골인이 훈제고기를 소지했다는 소리도 황당하다. 몽골인이 휴대하던 식량은 고기를 건조시켜 말린 뒤 가루를 낸 보르츠라는 것으로, 가뜩이나 연료가 없는 몽골에서 뭔 재주로 훈제를 하겠는가? 또한 응유(치즈)는 몽골인의 주식의 하나지만 젖을 내줄 말을 끌고 다니는데 짐이 되게 그걸 왜 휴대하겠는가? 몽골인이 원정시 말젖을 안장에 매달아 하루 정도 발효시킨 요구르트를 먹었다는 기록은 있다. 권작가가 나열해놓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인데, 시대도 사실도 맞지 않는 설명을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것만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구표국?”
“우마차에 달려있는 표기를 본 진우몽은 표사들이 무한을 대표하는 삼대표국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조금 더 세심하게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5권 p310)
무한이 장강 남북의 무창, 한양뿐 아니라 하구진(한구)까지 삼진으로 구성된 이유는 장강의 지류인 한강(漢江) 하구(河口)의 변동 때문이다. 본래 한강의 하구는 한양 밑을 지나고 있었는데, 이 하구가 점차 지금의 한구(漢口) 측으로 이동해 간 결과 종래 한양의 역할이 한구로 이동해 간 것이다. 하구진의 하구는 한강의 고명인 하수(夏水)의 하구라는 의미이며 한구는 한강의 하구라는 의미이므로 명대에도 한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겠지만 한구가 행정적인 명칭이 된 것은 1949년이 되어서였다.
한구는 이동한 한강 하구 변의 퇴적지 위에 세워졌는데, 지금의 한구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영종때(14세기) 장천작일가라고 명확히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한구순검사가 설치된 가정제 때인 1545년에는 1395호가 살고 있었고, 명말인 만력제 때에 처음으로 호광성의 조운을 담당하기 시작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즉 한구는 명대에 처음 생겨 한양의 역할을 분담하기 시작한 도시로 무한을 대표할 정도의 성세를 보인 것은 청대 이후의 얘기라는 것이다. 뭐 한구표국이 한구의 성세와 무관하게 한강 하구에 세워진 표국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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