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파한
작품명 : 장천무한
출판사 : 서울북스
0.
지난 24일, 인터파크 도서에서 정체불명의 택배가 들어왔다. 수취인이 본인이라 무엇인지 확인했더니, 파한(문피아 별호 : 비인)님께서 보내주신 <장천무한> 전 4권이 모두 들어있었다. 아마추어에 불과한 본인에게 비평을 요청하며 당신의 저서를 자비로 구입하여 보냈던 것이다. 필시 서울문화사의 장르문학 부서가 정리되며 남아있는 저서가 없는 탓이리라.
하여, 본인이 비록 비평을 전문적으로 배운 바 없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나, 감히 허술한 평을 하기에는 저자이신 파한님께 지극히 실례가 되니 눈을 부릅뜨고 책을 읽었다.
<장천무한>은 2007년 말경에 전 4권으로 조기 완결된 작품이다. 어째서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는지, 그리고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지, 이하에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1.
<장천무한>은 어떤 이야기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장천무한>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 장천이 장악하고 눌러앉은 흑산채의 이야기다. 본래의 채주를 잡아죽이고 눌러앉아서는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만 죽인다. 그런데 빈둥거리려는 그의 의사와는 달리, 전 채주가 남겨둔 문제, 산채의 식구들이 먹고 사는 문제, 지나가는 흉적의 등장 등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주인공 엽장천 본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겉보기에는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청년이거나 반로환동한 고수인 듯하나 실제로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 흠신(欠神)이라 불리는, 1500여 년을 살아온 불로불사자다. 그런 그는 죽음을 추구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고자 한다.
보통의 경우,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을 기준으로 맞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천무한>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흑산채의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정리되고, 장천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향해 유람을 떠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자의 이야기는 갈피를 잃고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장천무한>에서 가치있는 이야기는 오직 '장천은 어떤 인물인가?'에 한정되며, 소설의 절정과 결말은 흑산채와 전혀 관계없이 흘러간다.
2.
<장천무한>에서 눈여겨볼 것은 소설의 배경이다. 장천이 흑산채에서 지낸 날들은 별로 큰 가치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날들이 가지는 가치는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에게 향해 있다. 주인공 엽장천의 정체와 그가 살아온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발판일 뿐이며, 그것은 독자에게는 좋을지언정 주인공에게는 좋다고 할 수가 없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별 것 아닌 나날에 불과하다.
곧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고, 그의 과거를 추적하며, 주인공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다만 흘러가는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바로 흑산채라는 배경이다. 주인공은 4권에서 보여주듯 흑산채를 떠나는데 아무런 주저함도 없으며, 손수영을 제외한 다른 인물에게는 별다른 감흥도 없다.
오히려 흑산채는 독자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저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주인공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채주의 처소에 처박혀 있는 엽장천과 손수영의 로맨스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헤쳐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흑산채는 게으른 주인공을 움직일 필요성을 제공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소설이 이야기로서의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고 마는데, 주인공을 강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렇듯, 흑산채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배경이 아니라, 다만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연결하고, 다른 사건들을 마무리 짓는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천무한>이라는 소설에 있어 흑산채라는 배경은 결국 쓸모없이 버려지는 배경에 불과하나, 조기종결에 쫓겨 버려지기 전까지의 흑산채는 배경으로서 매우 훌륭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3.
<장천무한>에서 눈여겨볼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점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는 분명한데, 당최 주인공의 내면만큼은 보여주질 않는다. 다른 이의 내면은 거리끼는 기색이 없으나, 오직 주인공에 한해서는 다만 표정이나 행동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3인칭 관찰자에 가까운 서술을 보인다.
이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특정한 관점에 대해 제한을 두는 현대소설적 기법으로, 흔히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도 부른다. 서술자는 전지전능하나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형태의 시점이다.
<장천무한>에서는 특정한 관점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서술자는 주인공의 내면에 대해 안다 모른다는 언급조차 없이 철저하게 서술을 배제했다. 주인공에 대해 서술하는 경우는 타인에 비친 주인공의 행동이나 표정 등에 불과하며, 서술자는 주인공이 혼자 있을 때를 상정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 있게 하였으며,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피상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했다.
주인공인 엽장천은 대체 어떤 인물인가? 이 질문에 대한 독자의 추측은 곧 주인공을 바라보는 다른 인물의 시각과 동일선상에서 진행되며, 그것은 곧 서술자가 보여주는 이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저자는 주인공이 신비한 인물임을 일찍이 시사하였으나, 그것에 대한 부연을 독자 스스로 판단케 하되 서술자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오롯이 유도했다. 이를 구성이나 설정을 넘어 시점 차원에서 이루었다는 점에서 서술기법의 활용 면에 대해 크게 호평할 수 있다 하겠다.
4.
<장천무한>은 어째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조기종결을 하게 되었을까? 독자가 <장천무한>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게으름만 피우며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죽이는 주인공에게는 큰 매력이 없다. 모든 것에 달관하여 호기심이 없고, 성취욕이 없으니 게으름만 늘어난다. 이래가지고서는 주인공이라는 인물에 변화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주인공으로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재미는 주인공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 한정된다. 이는 지극히 수동적인 재미로, 미래에 대한 기대나 상상력의 확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주인공을 재미의 원천으로 설정했다 함은 독자로 하여금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것에 재미를 느끼도록 길들이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 다음의 이유는 감정의 기복이 적다는 데 있다. 만사에 달관하고 감정의 다스림이 경지에 이른 주인공이 사건을 주도하니, 그에 따라 독자의 감정도 시종일관 평탄하게 유지된다. 흥분할 일도 없고 슬퍼할 일 또한 없으니, <장천무한>을 읽은 뒤에 여운이 남지 않고 만다. '재미있다'라고 말하기에는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이 너무나 적다.
기실 주인공의 설정이 <장천무한>의 전부와 다르지 않기에, 그리 매력적이라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은 소설 전체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주인공이 소설을 매력적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주도하는 탓이다.
5.
<장천무한>이 조기종결이 아니라 온전히 저자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으면 훌륭하다는 평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4권으로 조기종결된 다음에야 지금 이대로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천무한>은 그리 좋은 소설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처음과 끝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장천무한>을 낮게 평가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흑산채에서 만난 이들이 결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진조운조차 사실상 삼존을 사존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가볍게 지워버릴 수 있는 인물에 불과했다. 흑산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불필요한 과정에 불과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주인공이 죽기를 갈구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 꿈을 깼다는 이 이야기의 어디에도 3권까지의 인물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또한 3권까지의 사건 역시 그에 미치는 바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토록 충실한 개연성을 지닌 전개가 한 순간에 뚝 잘렸다는 것, 그리고 그 전개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데다 곤란하기까지 하다.
6.
<장천무한>은 확실히 아쉬운 소설이다. 조기종결의 폐해가 이토록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불멸자의 고뇌를 표현하는 데 있어 다른 접근을 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주인공의 성격만이라도 조금 달리 설정하여 독자에게 미래를 기대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면 조기종결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장천무한>은 이렇게 완결되었고, 저자에게 동일한 주제와 소재로 다른 글을 쓰라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 과학의 원리를 일부 도입했다는 점, 시점을 특이하게 활용하여 서술에서마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시도였고, 읽는 이에게 익숙지 않았을 시도를 훌륭히 해냈기에 저자를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다.
<장천무한>이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원인을 고찰하고 저자의 장점을 이어나간다면 다음 작품은 틀림없이 즐겁게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글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 때가 오기를 목이 길어지도록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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