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루비엘
작품명 : 붉은 그림자
하얀 달빛 아래에 만물은 숨을 죽이고 있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세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마당에서 왔다 갔다거리고 있었다. 그의 갑옷은 달빛에 비추어져 빛이 내고는 있었지만 그리 화려하지는 안았다. 오히려 쓸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비세는 고개를 들어서 달빛을 보았다. 달은 하얀 빛으로 비세를 비추기 만을 할뿐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비세는 다시 마당을 왔다갔다 거렸다. 불안을 달래려고 해도 달래지지 않았다. 마치 성난 황소를 달랠때와 같이.
초조해 하는 비세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낮에 있었던 사냥때 비세의 뒤를 지키던 자였다. 비세는 그를 발견하고는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채로 오 년을 같이 지내온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비세를 안심시켰다.
궁안의 소란을 뒤로 한 채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비세님, 뭔가 근심거리라도.."
"아, 아니야.. 그냥 뭔가가 불안해서."
다시 한번 정적이 그들을 덮었다. 그 정적으로 불안감은 다시 비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때 였다. 이 판서는 궁중 회의로 향하던 길에 비세가 마당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도총관, 오늘 궁중 회의는 무관들도 참여하는 것을 모르시오?"
비세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이 판서를 바라보았다. 아래로 긴 수염과 주름살이 많은 얼굴. 그 얼굴을 보자 불안감은 더해갔다. 무엇때문일까.
"아, 그렇습니까? 그럼 안내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비세의 정중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 판서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칫! 궁중에 온지가 몇년인데 아직도 궁 안의 위치를 다 익히지 못했다니. 에이!"
이 판서는 일부러 비세가 들리 정도로 말을 내 뱉었다. 분명히 비세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가운 눈으로 이 판서의 뒷모습을 바라볼뿐.
"그럼, 따라오시오."
이 판서가 먼저 궁중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비세는 뒤를 돌아서 그의 수하에게 말했다.
"장연아, 너는 이만 들어가 보거라."
장연은 비세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착할 장 자에 고울 연 자. 비세 나름대로는 고민을 해서 지었지만 이름 짓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장연은 비세의 뒷통수에 대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궁 밖으로 나갔다. 비세는 서둘러 이 판서의 뒤를 따라갔다.
궁중 회의가 열리는 곳에는 여러 신하들이 있었다. 본래 무관이 궁중 회의에 참석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무관, 문관 가릴 것 없이 많은 신하들이 참석해 있었다. 왕이 앉은 자리는 금색 이었으며 용 모양의 장식이 되어있었다. 문관들은 모두가 뭔가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무관들은 자신들이 올만큼 큰 일인가에 대해 서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 와보는 사람도 있었다. 과거제가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직위가 높아진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뭔가가 이상했다. 최 판서가 갑자기 궁중 회의를 열게 해달라고 한것도 이상한데 무관들 까지 참석을 시킨것은 뭔가 큰일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왕은 비세와 마찬가지로 뭔가 찝찝한 기분이 마음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그 모두가 기다렸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들은 이 판서와 비세였다.
비세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더 거대한 걱정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최 판서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그 근심이 절정에 달했다.
이 판서는 비세에게 무관의 자리를 가르쳐 주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섰다. 그들이 도착하자 최 판서가 왕의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이런 궁중 회의를 열어서 놀라셨다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왕은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했다. 뭔가가 커다란게 하나 터질거라고.
최 판서는 왕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비세가 있는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경상남도 도총관이 비세는 이 자리에 서시오."
비세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뭔가가 잘 못 되고 있다고. 비세는 차가운 표정으로 최 판서의 옆으로 향했고 왕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다른 한쪽은 세운채 예를 갖추었다.
"경상남도 도총관, 비세, 감히 폐하 앞에 서나이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의는 단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더 많이 받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세는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최 판서의 눈을 쳐다보았다. 개구리를 앞에 두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독사의 눈. 비세는 눈을 돌렸다. 아니, 본능이 눌을 피했다. 비세로서는 그 눈빛은 잊을 수 없었다. 온 몸에서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고 마음 속에서는 두려움과 걱정이 계속해서 문을 두르리고 있었다.
최 판서는 왕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폐하의 앞에 서있는 이 자는 반역자, 즉 역적입니다."
왕의 두눈은 하늘의 보름달과 같이 동그래 졌고 비세는 최 판서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최 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음모를 꾸미고 있던 최 판서 측의 신하들을 제외 하고선. 왕이 오른손에 힘을 주어 꼭 쥐더니 황금 의자의 팔걸이를 쾅 하고 내리쳤다.
"조용히 하시오! 최 판서,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아이가 역적이라니!"
왕의 내시들은 그 자리를 피했다. 왕이 소리침과 동시에 그곳에는 정적이 돌았고 비세의 불안감은 한층 더 커졌다. 자신이 역적이라니. 절대 그럴일은 없다. 절대로.
하지만 최 판서는 그 어떤 미동도 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도 입을 열었다.
"이 자가 평소에 폐하의 주위에 있었던 것도 다 반란을 위해서 였습니다."
왕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있었던 자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니. 아니,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 안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최 판서. 감히 짐이 누구라고 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오! 이 아이가 역적이라니!"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지금 당장 제 목을 폐하께 내놓겠습니다. 여봐라."
최 판서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최 판서의 하인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뭔가가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고 그것을 최 판서에게 넘긴 후 다시 문 밖으로 사라졌다. 최 판서는 왕에게 다시 한번 예를 갖추고 그 종이를 왕에게 받쳤다. 왕은 그 종이를 하나하나 읽어 나갈때 마다 손을 떨었다.
비세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최 판서와 그 측의 사람들이 자신을 곱지 아니한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폐하의 신임을 거의 독차지 하다 싶이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그를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그에게 최고의 죄인 역적을 뒤짚어 씌우고 아예 사형을 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왕이 그 글을 읽는 동안 최 판서가 왕에게 말했다.
"그것은 비세의 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수하인 장연의 서명은 당연하고 경상남도의 대부분의 병사들의 서명입니다."
왕은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재빠르게 내렸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격한 감정이 있었다. 왕은 비세를 쳐다보았다.
"이게 사실이냐?"
"아, 아니옵니다. 저는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제발 저를 믿어 주십시오!"
비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증오하는 자들에게 이런 어이없는 죄를 받고 왕마저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최 판서는 비세를 노려보았다.
"닥치시오! 이 글씨는 도총관의 글씨와 똑같단 말이오! 여봐라!"
다시 한번 문이 열리고 아까 그 하인이 이번엔 책을 들고 왔다. 비세는 그것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책은 평소 자신이 쓰던 일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최 판서는 그 하인에게서 책을 받아들고 곧바로 왕에게 넘겼다. 왕은 한손에는 종이를 든 채로 책을 펴 종이의 글씨와 책의 글씨를 비교해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글씨의 모양과 맨 마지막에 찍는 점과 같은 버릇도 똑같았다. 최 판서는 그 독사의 것과 같은 눈으로 비세를 노려보았다.
"이래도 변명을 할 것이오?"
"아니오.. 아니란 말이오.."
왕은 종이와 책을 바닥에 패대기 쳐버렸다. 그리곤 비세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 이놈! 내가 너를 그리 믿었건만 어찌 반란을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대가 어린 나이에 그대를 보살피던 부친을 잃어 내가 딱히 여겨 거두어 들여 내 곁에 두고 신임을 퍼부었건만 반란이라니.. 내일 당장 형벌이 있을 것이다!"
왕은 비세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밖에 있던 왕의 내시와 시중을 드는 자들은 그를 따라갔다.
문관과 무관들 모두 비세를 욕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최 판서와 비세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최 판서는 왕의 자리에 앉으며 비세를 쳐다 보았다.
"이 자리도 곧 내 것이 되겠지."
이게 무슨 말인가. 저 자리가 최 판서의 것이 되다니. 반란을 일으키려 한건 오히려 최 판서 쪽이었다. 최 판서는 바닥에 떨어진 책과 종이를 주워 들었다.
"아, 어떻게 이걸 만들었는지 궁금하겠지?"
현재 비세로서 제일 궁금한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과 똑같이 글을 쓰는 사람을 구했단 말인가.
"꼭 네가 서야 하는 건 아니잖아. 글씨는 똑같이 쓰기만 하면 되는 거고. 아주 쉬웠지. 뭐, 누워서 떡먹기 보다 더 쉽더라고."
비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볼을 타고 턱에서 잠시 쉬었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쉼없이 눈물이 흐른다. 가슴의 한 곳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것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최 판서는 비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물었다.
"사내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허, 허허."
비세는 분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잘 해봐. 아니, 이젠 잘 할 수도 없겠군."
최 판서는 비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자리엔 비세와 눈물, 그리고 고요함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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