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흰새
작품명 : 카르다미네 : 메이드 일기
출판사 : 없음. 문피아 정규연재란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이는 안구사(雁丘詞)의 한 구절로 무협소설을 아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명대사다. 물론 저 위에서 정(情)이란, 곧 사랑. 남녀사이의 정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선 정을 좀 더 확대해보자. 어버이와 자식 간의 정, 형제자매 사이의 정, 친구 사이의 정 등등. 정은 안 보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다방면으로 뻗었다. 정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며 우정이고 관심을 뜻하며, 더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나’와 ‘너’의 긍정적인 연결고리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명 속 온갖 구속에서 발길을 끊은 자유인이 아닌 이상, 우리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지내는 것이다. 항상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나쁜 관계만 맺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 살아간다.
허나 본문의 주인공 리스 엘리제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어온 터라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왜 그러지? 왜 내게 잘해주지? 꿈과 로망에 혹해야할 나이에 지나치게 현실에 적응해버린 탓일까. 이미 그녀의 눈은 잿빛이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밝혔듯 이것은 메이드의 일기다. 실제로 일기 형식은 아니지만, 그처럼 그녀가 품었던 생각이나 시선들을 우리들은 그대로 따라간다.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리스의 서술방식은 무척이나 딱딱하다. 겉으론 존대를 해주고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는 둥, 제 본분에 맞게 살아가는 메이드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느낀 것은 거리감이었다. 존대란 것 자체가 상대에 대한 예이며 나를 낮추는 표현이긴 하지만, 리스는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 초반부분만 친구 먹었던 피엔을 제외하면 편하게 대했던 상대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리스는 그렇게 스스로 벽을 만들었다.-개인적으로 이렇게 정중한 주인공은 엔디미온 키리안 이후 처음이었다.-
허나 인연이란, 사람 사이의 정이란 게 그저 부정하고 벽을 친다고 끊어지던가? 로빈슨 크루소도 아니고 사회 속, 그것도 온갖 선연과 악연, 암투가 난무하는 황실에서 고립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남들이 신데렐라 로맨스를 꿈꿀 때 가늘고 길게 산다는 현실적인 꿈을 꿨던 리스도 친구를 사귀고, 기라울에게 기대기도 하며, 황제의 총애까지 사고-이걸 총애라고 해야 할지... 참- 암투에 휘말려 죽은 제이다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오로지 참고 막으려고만 했던 리스에게 다양한 감정들, 아니 그보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고립시키고 쇄국정책(?)을 펼치던 리스에게 서서히 변화가 왔다. 본래 같은 메이드 모임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털어놓을 친구도 없던 그녀에게 오랫동안 보지 못한 소꿉친구가 등장했고 기라울과 친분도 점차 깊어져가는 듯하다.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부정을 그가 대신 채워주려는지, 상급자와 하위 메이드보다는 엄격한 할아버지와 야물지 못한 손녀를 보고 있는 것 같다면 본인의 착각일는지‥‥‥.
아직 소설은 끝이 나지 않았다. 이제 삼 장일뿐이며 그녀의 이야기도 더 이어나갈 것이다. 가슴이 비어버린 소녀가 어떻게 시련을 이겨내고 성장하여 사람다워지는지 지켜볼만할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소설시점이 조금 문제가 있다. 메이드 일기는 일인칭인데 이것은 주인공의 내면적 성장을 그리기엔 아주 적절한 편이다. 허나 일인칭 소설이 가지는 치명적인 함정이 바로 지나친 내면묘사에 있다. 너무 주인공 심리만 비추다보니 주변 상황이나 배경에 소홀해지기 때문에 장면이 바뀔 경우 독자의 입장에선 당혹스럽다. 섬세하고 여성적인 문체엔 감탄이 나오지만, 내외 분배를 잘한다면 정말 걸출한 작품 하나가 탄생할 것 같아 두근거리는 마음에 이를 적는다.
전투도 없다. 모험도 없다. 그저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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