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윤현승
작품명 : 라크리모사
출판사 : 로크미디어
1. 지금으로부터 7여년 전, 나는 대학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미학 에세이', '한국전쟁의 기원' 등을 억지로 읽으면서 문, 사, 철의 기본을 쌓았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로써는 버겨웠고, 그래서 서러웠으며, 선배들의 비수같은 원색적인 비판을 듣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특히 인생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선배들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 똥같아 보였고, 무엇보다 그들이 운동권처럼 보여 싫었다.
2.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다. 억지로 암기하다시피 읽었던 책들은 향후 내가 읽어갔던 책들의 구심력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구심력들은 다른 여러 책들에 의해 많이 깎이고 대체되었으며, 또는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 중 남아있는 것을 하나 꼽아보라면 '미학 에세이'의 첫 장에 남아있는 설명이었다. 이 책은 美를 羊 + 人 으로 파자하면서 아름다움을 경제적 효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다른 말로 모든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은 사회경제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이는 철저히 맑스주의 문예 이론의 근간이다. 예를 들어 고대 비너스의 모습이 풍만한 것은 다산의 상징으로써 사회경제적 요소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었다고 말하거나, 우리나라 미인의 기준의 서구화되었다고 말하는 것 등 모두 맑스주의 문예 이론과 무관하지 않다. 즉 시대(의 사회경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는 또 다른 책을 읽으면서 고민거리가 되었는데, 데카르뜨의 '방법서설'이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뜨는 어느 날 그가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모두 거대한 구라라는 망상에 빠진다. 실제로 밖에서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색깔은 아침에는 진녹색이고, 점심에는 연녹색이며, 저녁에는 누렇고, 밤에는 검은색이다. 어느 이는 이것을 이렇다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저것을 저렇다고 말한다. 결국 데카르뜨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런데 단 하나 의심할 수없는 게 있다. 지금 데카르뜨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술어는 반드시 주어를 동반해야 한다. 누가? 바로 자신. "Cogito er 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다.
4. 그런데 데카르뜨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게 또 있었다. 1+1=2 라는 것이다. 수학적 명제는 구라라고 말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것이다. 이제 슬슬 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밀로의 비너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황금비 때문이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아름다운 것은 지루하기까지한 평균율 때문이다. 나아가 사람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이는 비율까지 있단다. 간단한 황금비부터 파보나치 수열까지 이 모든 아름다움의 근본은 사회가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 곧 수학이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은 아닐까.
5. 이 두 가지의 상충되는 명제는 독서, 그 중에서도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책들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된다. 사회를 반영하는 소설과 사회는 도외시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소설을 읽을 때다. 이것은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이 나뉘는 접점이기도 하지만, 경계문학에도 적용된다. 윤현승의 '라크리모사'는 후자다.
6. 배경은 현대 이탈리아의 한 소도시. 아내와 사별하고 딸과 오손도손사는 주인공의 직업은 오래된 도서관의 사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 6시, 지긋하게 늙은 나이와 어울리는 외양의 관장이 최근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 외에는 평범한 하루다. 어서 퇴근하고 딸 아이를 데리러 가려던 주인공에게 두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의문의 여자. "절대 도서관에서 나가지 마라, 그리고 관장과 절대 마주치지 마라", 그리고 나폴리 경찰의 전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관장을 피해 당장 그곳을 나와라"
7.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두개의 선택지가 놓여있다. 선택의 결과는 주인공이 받아야 될 몫, 그러나 그 결과를 독자는 알지 못한다. 유예의 공포만이 독자와 주인공을 재촉한다. 어두운 방의 책상 밑에 숨어있는 독자와 주인공에게 삐걱, 문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뚜벅뚜벅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다. 구둣발 소리가 멈춘다. 숨이 막혀온다. 책상 밑으로 구두가 보인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 구두의 주인을 향해 몸을 날려야 될까, 아니면 이대로 숨 죽이고 있어야 할까.
8. 어디서 많이 본 공포의 유형이다.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이 만들어 내는 공포는 귀신이 만들어내는 것도, 살인마가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공포다. 스티븐 킹이 특별한 이유는 말초적인 공포가 아닌, 주체가 만들어내는 타자에 대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가 정말 어떠한 인물인지 상관없다. 주체가 시각과 청각으로 만들어 낸 타자는 점차 공포라는 이름의 괴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괴물은 어느새 주체의 오감을 넘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내가 되고, 나는 주인공이 되며, 전율한다. 그리고 점차 킹이 안배한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9. 윤현승은 킹의 클리셰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언어로 표현된 소리는 실제의 음향으로 치환되며 공포를 전달한다. 굳건히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언어로 표현된 어두움은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하면서도 나를 점차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윤현승이 킹을 읽었던 것일까. 아마 그럴게다. 킹은 너무나도 유명하니까. 그러나 킹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차용한 한국의 작가는 보기 쉽지 않다. 킹의 클리셰들은, 클리셰라는 말 뜻 그대로, 여러 장르에서 사용되었지만, 한국의 킹이 태동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는 윤현승이 처음인 듯하다.
10.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끝이 너무 거하다는 점이다. 장르물이 자주 보여주는 유치한 거창함은 라크리모사의 결말을 화룡점정이 아닌 용두사미로 바꾸고 있다. 또 하나 꼬집어보면 면 그는 왜 지하에 있었을까. 존재의 이유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기에 전체적으로 치밀한 구성이 약간 헐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순수한 공포를 다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무리 추천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윤현승에게 한 마디. 그를 이루게 했던 장르물의 유치함을 버릴 때, 그는 껍질을 벗고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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