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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
09.09.17 13:45
조회
3,117

작가명 : 진산

작품명 : 청산녹수(진산 무협 단편집 수록)

출판사 : 파란미디어

몇 년 전에 수업들을 때 썼던 보고서입니다. 학술적인 글이라 딱딱하게 느껴지시겠지만, 그 점이 오히려 장르문학 비평에 대한 편견을 침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올립니다. 다만 한글파일에서 그냥 복사해 넣는 과정에서 각주는 다 사라졌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너무 긴 글을 문피아 비평란의 일반적 형식에 맞추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올리게 된 점 죄송합니다. 지금 보니 그다지 대단한 내용도 아니지만, 관심과 시간 둘 다 있는 분들께서는 한 번쯤 읽어 보심이 어떠한지요?(물론 이 글은  미리니름을 왕창 포함하고 있으므로, 작품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우선 작품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청산녹수」에 대한 정신분석적 독해와 그 의미

I. 서  론

우선 텍스트 선정에 대해서 일종의 부연설명 내지는 변명이 필요할 것이다. 진산(우지연)의 「청산녹수」는 무협소설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무협소설과 같은 장르소설, 혹은 대중소설에 대한 연구는 개별적인 작품을 꼼꼼히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장르로서, 덩어리로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정신분석과 연결될 경우에는 주로 그것이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많으며, 바로 그만큼 이러한 해석은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소설을 이러한 장르적 틀로써, 혹은 ‘대중의 무의식’과 같은 애매모호한 도구로써 분석하는 것이 그에 대한 유일한 분석의 방법인 것은 결코 아니며, 특히 최근 대중소설의 산물들은 그러한 일괄적인 분석에 반발하고 역행하는 모습을 종종 드러낸다. 진산의 「청산녹수」역시 기존의 분석 도구만으로는 그 실상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려운, 따라서 보다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청산녹수」와 같은 작품이 단순한 대중문학의 범주에서 일탈하는 측면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을 순수문학 혹은 고급문학의 영역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경우 「청산녹수」는 대중문학이나 무협소설이기를 그만두어야 하는데, 아무리 깊고 풍부한 의미를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청산녹수」는 여전히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무협소설이고, 대중문학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장르 전체가 대중문학이냐, 고급문학이냐 하는 것을 일반론적으로 단언하는 것은 대체로 무의미하거나 기껏해야 관념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발표자는 여기서 장르론이나 문학사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무협소설로서의 「청산녹수」가 아닌 하나의 개별적인 텍스트로서의 「청산녹수」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를 보다 더 깊게 분석-혹은 재구성해 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우선 작품에 대한 비(非)정신분석적 접근이 이루어진 후에 본격적으로 정신분석을 통한 분석이 시도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풍부한 의미들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 작품 분석에 정신분석 이외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정신분석적 접근 자체를 상대화시키면서 작품에 대한 좀 더 입체적인 접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II. 「청산녹수」에 대해 가능한 비-정신분석적 접근들

우선, 「청산녹수」가 왜 대중소설이라는 일반적인 범주화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를 위해서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필요할 것이나, 여기서는 다만 고급문학의 상대개념으로, 그리고 얼마간은 (경멸적인 의미에서의) 통속소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중소설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서의 무협소설은, 대개 독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이나 불안을 안정시키고, 삶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를 고취시키거나 불만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천편일률적인 구성,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 등으로 인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의 형상은 훌륭한 혈통의 남성이며,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유교적인 윤리에 충실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상적 자아’이면서 동시에 ‘자아 이상’이고, 대중은 이러한 주인공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아기 폐하’의 욕망의 충족과 ‘초자아’를 통한 사회에의 순응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사회의 악을 한 개인으로 압축/전치시키고, 그것을 역시 한 개인에 불과한 영웅에 의해 제거시킴으로써 대중에게 거짓된 만족감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무협소설 ‘일반’에 대한 이야기이며, 개별적인 무협소설 각각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산녹수」의 경우가 좋은 반례가 될 수 있다.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주인공이 여성, 그것도 외부(당나라)에서 온 여성이라는 점이다. 또 작품의 결말 역시 전혀 통쾌하지 않게 맺어지며,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했던 운명에 (전도된 형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발목을 잡히고 만다. 등장인물들은 결코 완벽하거나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며, 절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물론 하룻밤에 두 사람이 수백 명을 베어 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능력은 아니지만,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능력은 애초에 한계가 주어져 있다. 게다가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시간적 배치의 역전을 찾아볼 수 있는 단편소설이라는 점 역시 기/승/전/결이라는 무협소설의 익숙한 패턴을 탈피하고 있다. 일반적인 무협소설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것들을 이 작품에서는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작품은 기존의 무협소설 일반에 대한 반역행위이며, 무협소설의 형태를 띤 반(反)-무협소설이다. 지금에야 무협소설에도 갖가지 참신한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작품이 95년에 발표된 것임을 감안할 때, 무협소설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이 작품이 갖는 무협소설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소설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도록 하자. 정신분석과의 대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일단은 ‘의식’의 차원에서 명백히 파악되는 것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가족과 국가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소설은 소수신녀로 대표되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 한 가족이 파탄에 이른다는 비극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위협에 대해 절망적으로 반항하는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재미있게 만드는 점은 아버지인 황선의 애매한 위치와 쌍둥이를 이용한 트릭이다. 황선은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모운청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화랑이고 나라의 장군이다. 소수신녀의 계획에 동조함으로써 그는 일단 국가의 편에 서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신녀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드는 것 역시 황선이다. 그는 소수신녀의 권위에 반발하며(오보구명), 가족과 한사충의 월장(越牆)을 묵인하고, 최후의 순간에 황창과 황희의 바꿔치기를 눈감아 준다. 본질적으로 외부자인 모운청이 신라에 몸담을 수 있게 된 것도 황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였고, 그녀가 다시 신라를 벗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 역시 황선을 통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황선은 국가권력에 의해 ‘화랑’으로 호명되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그 권력에서의 일탈을 가능하게 하는 경계선상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지상명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의, 곧 부강한 국가의 건설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희생의 필연성은 신화적 해석을 통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 이것은 신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상명령은 소수신녀와 국가권력을 통해 집행되는데, 기본적으로 국가의 신민(화랑)인 황선은 이 명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작품의 절정부분을 이루는 창과 희아의 자리바꿈에 의해서, 이 권력의 작동은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고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 애매한 결과를 낳는다. 백제 왕의 살해와 그를 통한 국가의 안녕이라는 목표는 어쨌거나 성취되지만, 권력의 일차적인 목표였던 황창(의 목숨)을 얻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국가권력이 요구하는 희생은 어떤 식으로든 치루어져야 하지만, 그 희생이 권력이 원하는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애매함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국가권력은 전능하지만(아무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지배 대상의 미시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능하다. 개인은 국가권력과 정면대결을 벌여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운청과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예정된 패배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비극이다. 그러나 결코 개인이 무력하게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속여 넘길 줄 안다. 쌍둥이를 기본적으로 한 명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국가가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 중의 병든 부분, ‘독기’로 가득한 부분일 뿐이다. 희아는 창과 어머니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다’. 그녀는 희생을 통해서 오히려 더욱 완전하게(기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희아의 죽음은 창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합일인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기존 무협소설의 공식에 대한 전복과 패러디의 의미를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작동과 그 일탈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물론 이 밖의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운청이라는 ‘외부’인과 신라라는 ‘내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읽을 수 있으며, 여성 주인공의 등장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페미니즘적인 독해를 시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작품 외적인 조건들 - 예컨대 진산의 작품들에 종종 나타나는 가족의 결여, 혹은 이상(異常)에 대한 집요한 탐색 등을 중심으로 작가론을 펴는 것 역시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줄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 붙어 있는 역사적인 진술들, 그리고 모운청과 한사충이라는 당인(唐人)이 신라에 대해 갖는 은근한 우월감(그리고 그 반면에 있는 소중화로서의 신라라는 자부심)은 작품에 역사소설적 요소를 제공해 주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사대주의와 관련된 복잡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여러 가능성들을 열어 둔 채로, 본격적으로 정신분석적 도구들을 사용해 작품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III. 「청산녹수」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

1. 아버지‘들’과 어머니

(1) 아버지 - 황선과 한사충

일단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버지’의 형상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표면적으로 드러난 아버지는 물론 황선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 바로 모운청의 “충실한 노복” 한사충이다. 한사충은 모운청을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돌봐 온, 충성심이 지극한 종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눈동자는 불투명하여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심사를 알 수 없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며, 모운청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척 하지만 “수그린 그의 눈빛이 어떠할 지는 그 자신만이 알 일”일 뿐이다. 한사충이 아이들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의심은, 그가 계속해서 황선과 모운청 사이를 가로막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오로지 모운청에게만 복종할 뿐, 웬만한 일 아니고서는 황선조차도 무시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모운청의 “뒷모습을 잡으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황선의 앞을 “어느 결에 나타난 사충이......말없이 가로막”는 장면에서도 한사충과 황선의 대립은 명백하다. 이는 황선 자신도 인식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황선 그도 사내대장부인지라 변함이 없는 한사충의 충심을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황선의 진술을 주목하자. 정신분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표면에 드러난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진술은 황선이 사충의 충심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으나”라는 역접의 어미와 뒤에 붙은 그의 충심에 대한 인정은, 황선(혹은 읽는 우리들)의 의식을 속여 넘기기 위한 장치, 혹은 억압이다. 마찬가지로 한사충이 처음에 기어코 운청을 ‘마님’이 아닌 ‘아씨’라고 불렀다는 것 역시 황선을 모운청의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모운청의 해석은, 역시 의식적인 눈가림이요 변명에 불과하다. 중요한 사실은 모운청이 이족과 결혼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한사충을 아버지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두 번째 근거는, “궁수들의 우두머리”의 조롱에 대한 한사충과 모운청의 반응이다. “모부인께서 데려온 그 종복은 사실은 종복이 아니”라는 말에, 모운청은 “목뒤에 칼이 닿은 것처럼 섬뜩”해 하며, 한사충도 눈에서 “불꽃이 튀”고 “귀가 창백해진”다.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충격을 모운청에게 주는 궁수의 발언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충격을 준다. 운청과 사충의 실제 관계가 어떠한지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운청과 사충을 전율시킨 것은, 궁수의 발언이 의식으로는 부인할 수 있으나 무의식적으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한 부정은 긍정의 표현이며, 무의식이 말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희아가 사충과 모운청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한사충이 작품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명백해진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사충에게서 “코에 물씬 들어오는 몸냄새”를 느낀다. 이 묘사가 우리의 무의식에 주는 효과는 명백하다. 희아는 사충과 ‘아씨-종복’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사충의 등에 몸을 붙”인다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희아가 어머니인 모운청을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운청이 희아를 자신의 몸에 ‘묶으라고’ 명령하자, 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거절’한다! “엄마, 꼭 엄마한테 묶여서 가야 해요? 아저씨한테 업혀 올 때도 너무 답답했어요.” 사충의 등에는 몸을 밀착시켰던 희아가, 어머니의 몸에 묶이기는 거부하는 것이다. ‘답답했다’는 표현은 앞서 몸과 몸의 밀착에서 느꼈던 쾌감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을 목격하게 된다 - 희아는 ‘아버지’를 성적인 대상으로, 어머니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2) 소수신녀 - 상징적 아버지

앞서 살펴본 한사충의 이미지가 일종의 ‘상상적’ 아버지라면, 소수신녀는 ‘상징적’ 아버지로 기능한다. 그녀는 “집안의 하인들이 일제히......무릎을 꿇”게 만드는 권력이며, “두려움과 존경에 가득찬 속삭임”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담을 넘어” 들어왔지만 거리낌 없이 “대청”을 차지한다. “대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은 “진심으로 가득차 있”고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앞서 말했던 대로 국가권력의 상징이며, 동시에 황선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대의, 즉 일종의 초자아-자아 이상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그녀가 “나라님”을 등에 업고 있는 권위적인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의 상징적 아버지로서의 존재는, 오히려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에서 명징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늙은 여자이며, 따라서 육체적인 성별은 의미가 없다. 그녀의 드러난 얼굴은 마치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무슨 산골짜기나 논두렁을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여성성이 거세된 다음에는, 그녀에게 부여되는 것은 두드러진 남성적 특징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위력을 발휘할 때마다 하늘로 솟아오른다.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끝부분부터 살짝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모습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즉각적으로 발기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더욱이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 - 새의 ‘머리’를 한 - 역시 남근-팔루스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조두장은 집의 “대문을 두드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강력한 무기이다. 또 조두장과 함께 붙어 다니는 이미지 - 꽂힌다는 이미지 역시 지속적으로 남근을 연상시킨다. “발 아래 얼어붙은 땅에 그것을 힘있게 꽂았다. 조두장은 진흙 속에 처박히듯 쑥 꽂혔다.” 소수신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항상 조두장이 같이 등장하며, 무의식의 환유적 규칙에 의해 그것은 소수신녀 그 자체가 된다. 그것은 휘둘러지고, 두드리고, 꽂히고, 독침을 걸러내고, 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벽적인 ‘흰 색’이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명령이며, 가차 없는 처벌을 내리는 존재이며, 상상적인 아버지인 한사충을 살해하고 그 등에 꽂힌 채로 “머리를 부르르…… 떠”는 남근, (라깡적인 의미에서의) 상징적인 아버지 - 권위적인 초자아이다.

(3) 어머니

이제는 ‘어머니’인 모운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앞서 살펴본 대로, 아버지의 형상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현실적 아버지(황선), 상상적 아버지(한사충), 상징적 아버지(소수신녀). 모운청이 이들과 갖는 관계들을 대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황선과는 ‘의식’차원에서의 부부관계를 맞고 있으며 한사충과는 무의식적인 부부관계를, 소수신녀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소수신녀와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볼 경우, 모운청(그리고 아이들)은 초자아의 요구를 거부하고 생존을 욕망하는 이드의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황선이 이 양자 가운데에서 적절한 조화 - 희아의 희생을 통한 현실적인 조정을 이루어 내는 자아의 위치를 담당하게 된다. 황선/한사충과의 관계를 중심에 두는 경우에 이 작품은 하나의 가족소설이 된다. 즉 아이들은 현실적인 아버지(황선)를 이상적이고 고귀한 혈통(한사충은 한족이다!)을 지닌 다른 아버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냉정하고 이성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황선(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과,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한사충의 사이에서 우리가 묘한 망설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또 희아는 첫 장면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한다(‘엄마랑 오라버니를 만나러 간다면……,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 거야?’). 그런데 그 부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사내, 즉 한사충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냥꾼’들에 의해 “짐승”처럼 추격당한다. 그들은 도망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으로 인식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르자면, 그 죄란 바로 어머니의 ‘간통’임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어머니가 창녀, 똥갈보로 취급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이며, 범죄자인 운청은 괴롭힘을 당하고 처벌되어야 마땅하다.

2. 성장소설로서의 「청산녹수」 - 나르시시즘과 거세

(1) 나르시시즘

"사실 남성들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나르시시즘적인 여성들의 경우에도 온전한 대상 사랑으로 향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자신의 신체 일부가 낯선 외부의 대상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자신의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온전한 대상애를 다 쏟아 부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질병이나 죽음이 자식들에게 닥쳐서는 안 되며......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적인 법칙의 적용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다시 살아난 부모의 나르시시즘,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프로이트의 이와 같은 진술은 모운청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아떨어진다. “검과 결혼”할 것이라고 단언하던 여인은 황선과 결혼하지만, 이내 그 대상애는 좌절된다(깨어진 검집에 새겨진 “변연정(變戀情)”이라는 글귀가 이를 대변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눈먼 모정” 뿐이다. 그녀와 아이들 사이의 나르시시즘적 관계를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은, 희아가 이어받은 자신의 내상이다. “똑같은 태 내에서, 아들 창은 어머니가 수 년간 섭취한 산삼과 내공의 힘만을  받아먹고, 딸 희아는 어머니의 내상만을 물려받아 죽음의 병을 앓는 것처럼”, 두 아이는 곧바로 그녀의 분신이 된다.

(2) 산삼 - 팔루스로서 존재하기/팔루스를 소유하기

운청을 죽음의 수렁에서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산삼이다. 운청은 “사람 모양”의 산삼, “온 몸을 불태우”는 “천 년을 넘은 산삼뿌리”를 몸 속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이 살아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산삼에는 암, 수가 있고, 새끼가 있다. 이러한 산삼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들을 임신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곧 그녀가 ‘팔루스를 소유한’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어머니는 아이들을 자신의 속으로 흡수해 버리려는 독점욕 강한 어머니일 수 있다. 앞서 운청이 보여 주는 강한 나르시시즘을 지적하였는데, 이 경우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팔루스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정상적인 주체의 성립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나아가 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칼을 휘둘러 남의 명을 빼앗고 피를 뿌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 어머니가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라 남근을 ‘잘라’서 자기 속에 간직한, “남근을-가진-어머니”의 형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몹시 두려운 상”이며, “행복과 죽음의 현혹”인데, 이는 운청이 두 자식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어 가려고 하는 장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 가족 모두 편안한 곳으로 떠나는 거다”, “입가에는 미소가 돌았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등의 표현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묶다’와 ‘매다’의 이미지 역시, 이런 일차적인 동일시 내지는 퇴행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운청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주체로 성립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억압적인 어머니의 상이다. 아이들이 이 퇴행적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 정체성을 확립해 줄 거세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별이 다른 쌍둥이 중 하나가 소수신녀로 대변되는 ‘상징적 아버지’의 질서에 의해 살해된다는 점은 우리의 논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3) 쌍둥이와 희생의 의미

일란성 쌍둥이는 성별이 같다. 따라서 성별이 다른 창과 희아가 “얼굴 생김새가 똑같았다”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한 설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한 맥락을 통해 보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즉 창과 희아는 어머니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벗어나지 못한, 따라서 거세되지 않은, 성별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성별이 다른 ‘쌍둥이’이기 때문에 이 두 아이는 두 개의 성별을 동시에 가진 ‘한 명의 아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라를 위해 가족을 버리기도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둘 중 하나는 거세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거세된 후에야, 그녀는 역사(<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될 수 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사실 희아의 희생은 이미 운청에 의해 암시되어 있다. 운청은 사충(그는 자식을 사랑해 주는 ‘진짜’ 아버지이기도 하다)에게 “만일 사세(事勢) 부득하게 되거든 당신과 창이는 이 지경을 먼저 벗어나세요. 나와 희아는 여기에 뼈를 묻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희아보다 창이 우선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희아가 이미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음을 눈치챌 수 있다. 어머니가 살리려고 한 것(더 사랑한 것)은 ‘남자아이’이며, 독기와 내상 - 아마도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부분 - 만을 물려받은 ‘여자아이’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승화’시킨다. 벨맹-노엘에 의하면 승화란 “성적인 만족을 제공하는 대상에 투여되는 충동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우회적인 만족은 “집단에 의해서 잠재적으로 승인되어야” 하는데, 이 집단이란 곧 (상징적)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소수신녀, 황선)의 라이벌인 백제의 ‘왕’을 살해한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아이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을 취하는 것 - 비록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와 오빠를 위해 죽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 즉 아버지의 ‘말’, ‘집단’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 은 무의식적인 필연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고, 여기서 단언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대체로 이 소설을 오이디푸스를 통한 성장소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버지‘들’이 존재하고, 그와 다양한 관계를 맺는 ‘어머니’가 있고,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치열한 쟁탈전과 살해가 벌어진다. 희아의 죽음을 수동적인 ‘거세’로 파악하든, 아니면 적극적인 ‘승화’의 과정으로 파악하든 간에, 희아의 죽음 없이는 모자/모녀 관계는 한 발짝도 진전될 수 없다. 소수신녀가 꾸는 꿈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상상적인 동일시를 파괴하는 현실의 위협이며, 이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러 갈래로 분열된다. 그는 때로는 아이들을 살해하려고 위협하며(소수신녀), 때로는 애매한 방임의 태도를 취하고(황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켜 준다(한사충). 그러나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헌신적인 아버지의 상(한사충)은 상징적 아버지인 소수신녀의 조두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이제 남는 것은 거세를 받아들이고 상징적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든지, 그로부터 일탈하든지의 양자택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쌍둥이의 트릭이 작품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을 방해한다. 억압은 원래 억압하려 했던 대상(황창)을 완전히 억압하는 데 실패한다. 억압되는 것은 오히려 창으로 ‘꾸민’ 희아이며, 이 억압에 의해 완성되는 것은 여지승람이라는 역사서이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더군다나 거세를 받아들이고 남은 존재인 창, 그리고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창이 “엄마의 나라로 가서......모씨 성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결말은,  오히려 더 전반적인 퇴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IV. 결  론

이상으로 「청산녹수」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II장에서 시도하거나 제시하였던 다양한 분석방향은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이 작품의 내적인 필연성을 밝혀 주는 데에는 정신분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왜 한사충이 등장해야 하는지, 왜 아이들은 쌍둥이인지, 그리고 희아는 왜 죽어야 하는지 등의 문제는, 정신분석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명확히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집요하게 반복되는 ‘짐승’의 이미지, ‘달’과 ‘흰색’의 의미지, 창-희아 사이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대극적 이미지 등은 정신분석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무공 대결 장면, 경공술과 내공 등의 요소들은 정신분석적인 접근보다는 무협소설의 장르적 특징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들은 이 소설이 무협소설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관습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역사소설이 아니고 무협소설일 수 있는 까닭은 그 속에 무공의 존재가 인정되기 때문인 것이다. 무협소설에 있어서 무공이 인정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 대해서 무협소설 ‘일반’에 대한 정신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이 발표문에서 발표자가 시도한 것은, ‘개별적인’ 무협소설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이 기존의 대중소설-통속소설 일반에 대해 이루어지던 소박한 방식의 정신분석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다. 그리고 그 실험을 통해 밝혀진 것은, 이 작품이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주제를 그 속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을 단순한 무협소설로서, 혹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 가족과 국가의 대립으로만 볼 경우에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갖는 존재의 필연성을 정신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선 정신분석적 개념들을 발표자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였는지를 확신할 수 없고, 그래서 이 분석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도 그다지 자신이 없다. 어쩌면 텍스트를 ‘정신분석’한 것이 아니라 단지 텍스트에 정신분석의 이론들을 억지로 들이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II장과 III장의 관계도 전혀 유기적이지 못하다. 다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발표자 스스로가 느꼈던 감동을, 어느 정도나마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기를 기대할 뿐이다. 벨맹-노엘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비평가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통하여, 그가 느낀 즐거움을 자신의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그 텍스트를 읽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다시 말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읽었던 대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해야 한다."

(장 벨맹-노엘 지음, 최애영/심재중 옮김, 『문학텍스트의 정신분석』, 동문선, 2001, p. 89)


Comment ' 15

  •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일
    09.09.17 16:31
    No. 1

    잘 읽었습니다. 저는 다른 것 보다 말씀하신, 그 빠진 주석이 보고싶군요. 읽다가 대충 책장을 넘겨버린 라캉이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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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09.09.17 20:01
    No. 2

    항몽님 // 주석이래봐야 원문 페이지수랑 참고문헌 밝힌것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주로 의존한 텍스트(문학텍스트의 정신분석)는 마지막에 넣었구요. 라깡은...대충 책장을 넘겨 버리는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 길고 지루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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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나뭇가지
    작성일
    09.09.17 20:24
    No. 3

    청산녹수 원본내용이 기억이 안나서 중간중간에 내용을 보고 끼어맞췄네요. 잘 읽었습니다. 비평란을 비평하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글이 이런글이 아닐까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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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4 palmaris
    작성일
    09.09.18 00:34
    No. 4

    정말 오랫만에 수준높은 작품에 어울리는 수준높은 비평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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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1 광인자
    작성일
    09.09.18 01:03
    No. 5

    90년대 나온 첫 책이랑 이후에 재발간한 책이랑
    약간 내용이 다른데 어떤걸 보고 쓰신건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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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09.09.18 09:30
    No. 6

    나뭇가지님, 필멸님 // 진산님 작품이 좋은 분석대상이 되어 준 탓이겠죠. 보기 드문 중단편이라 꼼꼼히 읽기도 편하니까요 ^^ 칭찬 감사드립니다.

    광인지님 // 앗! 그건 미처 몰랐군요 ㅡㅡ;; 제가 본 것은 옛날 것입니다. 단편선 구해서 다시 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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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꿈돼지
    작성일
    09.09.18 19:03
    No. 7

    근데 정신분석이라 함은 프로이트에서 부터 이어져온 이드 에고 슈퍼에고. 이런 걸 말하는 건가요. 요새는 이런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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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09.09.19 00:07
    No. 8

    꿈돼지 // 현대 정신의학에 대해서는 저도 잘...이 아니고 전혀 모릅니다. 다만 프로이트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 정도만 알 뿐이지요. 다만 문학이나 철학, 심지어 사회학 등의 영역에서는 아직 프로이트의 이론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이 이처럼 영역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라깡의 이론이구요. 하지만 이런 라깡조차 직업적인 정신분석의들에게서 집단 따돌림 비슷한 것을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학회에서 파문당했다지요).
    제가 사용한 분석적 도구들 역시,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적인 도구라기보다는 주로 사상적, 문화적, 문학적 의의를 가지는 것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의 삼분법을 대체로 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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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테이크원
    작성일
    09.09.19 02:48
    No. 9

    좋은 비평 잘 읽었습니다. 추천 하나 누르고 갑니다.
    사족을 달자면, 라캉이 따돌림을 당했던 이유는 그 당시 국제정신분석협회가, 물론 지금도 그렇다고 합니다만, 지독히도 보수적인 단체여서 라캉을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 분석가의 절반 이상이 라캉학회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라캉의 정신분석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단순히 심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뛰세르등을 통해 정신분석이 당시 파리 지성인들에게 퍼지게 됐던 것도 있어서, 카랑은 굉장히 빈번히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담론에도 등장합니다. 실제로 그의 이론은 대단히 흥미롭고 철학적 사유에도 굉장히 친숙하게 적용할 수 있어서, 현대 문화 비판에도 종종.. 아니 대놓고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지젝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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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09.09.19 08:01
    No. 10

    연우님 // 아,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실제 임상에서도 라캉 이론이 많이 사용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원전은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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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테이크원
    작성일
    09.09.19 17:58
    No. 11

    빈스토크님, 원전은 솔직히 처음에 읽기 정말 까다롭죠; 개론서로서 파악하기 무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세미나가 아닌 에크리 같은 경우엔 그의 말년의 작품으로 개론서로 보기보단 총체적 완결작으로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라캉이 프랑스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직설적으로, 명확하게 이론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죠. 혹자는 이런, 그 특정 이론적 개념의 카테고리의 모호성을 해체하려 하지 않고, 그 모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야말로 현대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자 독자들에게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서 각광받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동의도 합니다만 특정 개념에 대한 오해의 소지도 다분해지죠.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대신에 다의적이 되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원전보다 다른 사람이 쓴 라캉에 대한 입문, 개론서들이 훨씬 명확하게 그의 정신분석 개념들에 접근하는 듯 보이는 아이러니가 드러나곤 합니다. 개론서를 접한 이후에 다시 그의 세미나를 접하면 그전보다는 좀 낫더군요^^; 무엇보다 국내 프랑스 책들 번역 같은 경우엔 기대했다간 피를 보기 때문에; 꼭 그의 모호해서 난해한 서술 방식뿐 아니라, 번역 때문에도 접근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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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忍之爲德
    작성일
    09.09.19 23:36
    No. 12

    단편무협은 잘 손이 가지 않더군요. 읽지 않은 책의 비평이라 그런지 스크롤의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
    잘 보고 갑니다. 좋은 비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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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09.09.20 13:52
    No. 13

    연우님 // 저도 학술서적의 번역에 대해서는 불만이 좀 많습니다. 특히 서구 언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에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 같은 것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죠. 공부 계속 하려면 불어 정도는 배워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천성이 게으른 탓에 ^^
    그리고 개론서와 원전에 대한 말씀은 상당히 공감이 많이 가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인지위덕님 // 음...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지루한 글을 읽으셨다는 자체가 놀랍군요 ^^ 저도 단편은 별로 안좋아하지만, 청산녹수 같은 경우는 중편에 가깝고 이야기 구조도 탄탄하니까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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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3 핫세루
    작성일
    09.10.20 14:37
    No. 14

    프로이드는 정말 따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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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5 가령(歌鈴)
    작성일
    09.11.23 02:41
    No. 15

    .....이글 왠지 재밌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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