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실 초기의 조선은 실리의 일환으로 사대하는 척 정도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서 없는 정통성을 찾기 위해 명에 기대기 시작하면서 사대주의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선조가 또 왕창 찌질하면서 완전 사대주의에 쩔어버리죠.
선조는 방계출신의 정통성이 정말로 희박한 왕인데다가 전란중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렸죠. 그래서 내세운게 2개인데 그 무슨 명나라에 있는 족보 고친거랑 자기가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서 전쟁에 이겼다나 하는 식으로 재조지은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나라가 완전 망조에 들었죠 뭐.
그런 넘을 또 위대한 업적을 했다고 '조'를 가져다 붙인 후대 놈들도 참..
그렇다고 해도 명나라에서 마음대로 조선 왕을 갈지는 못했을겁니다. 다만 목지본앵님 말씀대로 내전상태로 가게 하는 건 쉬웠겠죠. 왕이 부덕해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명나라 황제의 서찰 한통이면 아마 옳다구나 하고 여기저기서 새로 왕 옹립하려고 세력가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조선이 속국이었나요?;;; 조선이 명에대한 사대가 좀 심한것은 알겠는데..
외교권 행정권 군권 왕의 책봉도 다 조선이 자주적으로 했습니다.
물론 해금정책이라던지 명의 눈치아닌 눈치를 봤지만
왕의 책봉이라는 것은 단지 조선자체에서 왕위에 오르고 후에 신하를 보내서 허락을 받는? 그정도 였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년 전후에 명이라... 정거장이 있었지만 이미 망조가 깃들었으며 임진왜란이 명을 망하게 한 가장 큰 사건 이었습니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새우고 청을 새울 수 있는게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의 국력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의 명은 조선을 어찌 할 힘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성혁명이... 명이 나 선조마음에 안들어 한마디 했다고 왕을 갈아 치울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인조 반정이니...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에 앉았던건 그만큼 자신의 세력이 왕의 세력을 능가 할 수 있었고
효가 충보다 우선시되는 조선에서 광해군이 시간지 지나면서 페륜의 짓을 저지르고 경복궁 때문에 민심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단종은 어리고 세력도 김종서나 일부 대신을 제외하면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대가 심했어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능한 조선의 태동은 인조 반정후 서인들이 완전히 세력을 잡은 이후 입니다.
/탐구님. 탐구님이야말로 무슨 소리 하시는건지..ㅡ.ㅡ;;
명나라랑 조선 관계가 맘대로 왕 갈아치울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태조만 하더라도 고명과 인장을 받지 못해서 몇 년 동안
왕위를 인정받지 못 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경우는 없었지요.
헛소리라고 심하게 말씀하시는 것도 좀 그렇네요.
그리고, 붕당으로 이어가는 하루살이라는 건...
식민사관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정치판이었지만,
어쨌든 나름 위붕이니 진붕이니 하는 붕당정치였습니다.
또, 당시 명의 상황도 개판 일보 직전이었는데..
(우리 나라 도와준게 명 멸망 원인 중 하나였으니 말 다했죠...)
후금한테 밀리는 명나라가 조선한테
'니네 왕 바꿔'
이렇게 말할 상황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광휘의 제국 책은 안 읽어봤지만 댓글 보고
좀 아닌거 같아서 달았습니다.
양반들이 명분을 아주 중요시하는 사람들인데, 아무리 조선까이고 명빠 사상이 투철하다지만 남의 나라 임금을 함부로 갈아치울 정도로 명국이 개념없지는 않았습니다.
세계 제국을 세웠고 역사상 가장 힘이 강했든 나라(혹자는 미국?)라고 평가 받는 원도 그건 함부로 안했습니다.
명국이 그 짓했다간 조선 선비들이 대부분 명까가 될텐데.
선비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을 존중했다 하더라도 간쓸개까지 다 내어 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조시대에 조선 성리학의 대거성이 두 분이나 존재했습니다.
즉 학문적으로 성리학이 최고의 전성기 시대에 접어들었지 않을까 생각되는 시대인데, 종주국으로 알아서 모시는 나라에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간.............................
명분 좋아하고 이치좋아하고 순리따지길 좋아하는 유학자들이 잘도 넙죽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아마 죽기로 싸우자고 의견통일이 안되면 다행일 것입니다.
유학자들이 명국 망하고 청국 들어 섰을 때, 처음에야 좀 뻐팅겼지만 결국 청국도 종주국으로 인식하고 알아서 받들어 모셨죠.
청국은 분명 오랑케가 세운 나라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어면서도 힘의 우위에 굴복한 것입니다.
유학자들이 생각만큼 그리 고리타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시대에 심어진 부정적요소 때문이겠지요.
햇살님 선조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 두명중에 한분이 설마 율곡이이는 아니겠죠??? 율곡이이는 인조반정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된것이지 그이전에는 그의 학파는 생각처럼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기호학파들은 조선에 충성한다기 보다는 명에 충성하는 성향이 더강했기때문에 명의명령을 왕의명령보다 더 따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참고로 명은 중국역사상 가장 암울한 왕조중의 하나로 개념없기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런그들이라면 조선에 무슨짓이든 할 수가 있습니다. 성리학자들이 얼마나 고리타분하냐면 효종의 북벌론에 기반을 만들어 주었던 송시열이라는 대학자는 북벌을 하기위해 도움을 청하자 도와주는거 하나없이 열심히 아침저녁으로 기원하면 순리대로 청이망하고 명이 들어설거라고 하는 사람이며 조선말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자 한성진격작전을 했는데 거기에 있던 유생들은 평민들은 팽하였으며 더욱더 웃긴건 동대문근처까지 진격했는데 그 우두머리란 작자가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삼년상지내고 온다고 가서 진격군은 와해되었습니다. 일제가 유생에 대해서 깐것도 많지만 유생들이 까일짓한것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Commen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