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 영웅문에서의 큰 줄기는 외부 민족이 중원땅에서 행해지는 폭력들에 대한 주인공의 양면성이었다. 그들은 끈임없이 공리주의?와 사적, 개인적 복수 사이에서 흔들렸으며, 이에 대한 김용의 성찰은 매우 탁월한 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용이 그 모순을 중화주의로서 녹여냈다면, 우리는 우스꽝스런 쌍 팔년도 반공 소설을 보았을 것이나, 김용은 중화주의로서 그것들을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의 군상들의 욕망을, 그리고 그 욕망의 문제를 중화주의라는 마술로서 녹여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들 자체에 계속 파고들어가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 김용의 세계는 봉합이 아니라 열림이며, 중심이 아니라 탈 중심이다. 그리고 그게 김용의 실존이다.
주인공들이 처한 윤리적 문제나 모순 사이에서의 실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실존은 삶 자체에 대한 탐구라기 보다, 오히려 욕망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삶과 욕망은 조금은 다른거 같다. 예컨데 바타이유나 카뮈같은 사람들이 추구했던 실존은, 인간의 삶에서 느껴지는 본원적인 진리겠지만, 김용적 세계는 그런 실존과 관련이 없는거 같다. 그런 실존은 좌백님에게 맞는 말인거 같다. 김용 집중했던건 욕망이나 윤리적 문제라는, 리얼리즘을 탈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식 반복이라면 어떤 소재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삼별초 항쟁같은 것들이다. 아니면 임진왜란도 괘찮다. 문제는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놓고 극을 전개시키면서, 그 스스로 김용의 중화주의를 벗어난다는 허위야 말로, 탁월하게 김용의 지반에서 놀고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란거다. 물론 그 김용의 지반이란 중화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김용을 충실하게 반복하면서 그를 뛰어넘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다면 김용과 같은 세계에서 당신들만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고민을 갖을까에 대한 고찰이다
금강님의 발해의 혼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난 기본적으로 민족 사학 자체에 회의적인 입장인데, 문제는 금강님의 글이 김용이 치열하게 사고했던 그 자체의 문제보다, 오히려 더 탁월하게 중화주의의 한국 버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글을 그 스스로 썼다는 것이다. 즉 모던과 포스트모던 중화주의와 한민족주의로 놓고보면, 오히려 국내 작가들이야 말로 김용이 고민했던 것들을 놓치고, 그 자체로 중화주의라고 셋팅된 것들에 너무 목메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김용이 중화주의자였나?
발해의 혼을 읽어보면, 주인공 육능풍은 말 그대로 한민족중심주의에 전혀 어떤 의심이나 모순도 없이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극의 전개 자체로 놓고보면, 깔끔하고 좋은 소설이다. 그러나 적어도 전형적인 민족주의의 책이라고 불릴 작품들보다, 그 작품들 자체와 차이를 구별지을 수 있는 김용의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용이 왜 단순한 중화주의자가 아닌지를 증명한다. 적어도 김용에게는 그것들과 주인공들 사이에 히스테릭한 분열이 그대로 녹아나 있다. 매끄러운 세계가 아니다. 김용의 세계는..
Comment '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