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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28 애기동백
작성
08.02.15 20:07
조회
2,072

작가명 : 리처드 도킨스

작품명 : THE GOD DELUSION, 한국어판(만들어진 신)

출판사 : 김영사

한국의 특성과 무신론

※ 들어가기 전에

현대에 들어 과학의 혁명적 발전으로 인해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이뤄 냈으며, 그에 맞춘 교육으로 현대문명을 더욱 쉽게 접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그에 따라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군중심리에 의해 그늘에 가려졌던 무신론이 과감하게 머리를 보임으로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신론관련 책자나, 세계적으로 권위적인(영향력 있는) 무신론자는 절대다수가 서양에 집중되어 있다. 확실히 동양, 한국의 가치관을 담은 무신론이 필요하다.

※ 한국 신사(神史)의 흐름

[종교의 집단 선택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창의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대단히 호전적인 “전쟁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평화와 조화를 역설하는 신을 섬기는 경쟁 부족이나 신을 섬기지 않는 다른 부족과 전쟁하면 승리한다. 순교하면 곧장 낙원으로 간다고 굳게 믿는 전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THE GOD DELUSION 본문)

THE GOD DELUSION의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확실히 한국적인 사례를 떠올릴 수 있는 말이다. 바로 고조선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부족에 관련한 이야기다.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물건을 다 신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고, 혹은 모든 물건 위에 한 신이 있다 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實在)이다.](조선 상고사 본문)

단재 신채호가 집필한 조선 상고사에는 위의 내용이 나온다. 그는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천재적인 역사가 중 한 명이였다. 하지만 그 역시 무신론에는 문외한이었다. 그에게 신이 있고 없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그는 한반도와 만주등지의 지역 고대인들은 어떤 것을 믿었는지에 대해서 기술했을 뿐(즉 현상만을 보았다.) 왜 그런 신을 믿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기술하지 않았다. 단지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라는 대목에서 그들이 자연의 현상에 대한 경외를 느끼고, 그것들을 인간의 상위적 존재로 봤다는 이야기를 추론해낼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설화에는 곰과 호랑이 부족이 등장한다. 이 곰과 호랑이는 매우 호전적인 동물로 보편적으로 알려진 동물이며, 이 동물을 숭배하는 부족이었기에, 다른 부족을 누르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자연물 숭배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민족에 처음으로 종교라는 인식을 심게 해주는데, 이런 자연물 숭배는 현재 존재하는 몇몇 종교와는 달리 숭배를 받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특성이 있다.

이 점은 그 당시에는 매우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인간이 가지면 좋은 움직임이나 생각을 특정 숭배물을 통해 생각해내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자연물 숭배는 매우 오랫동안 진화되어 보존되어 왔다. 이전 시대의 한국은 왕을 제외한 절대자, 특히 인격신 같은 사람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절대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에 1차적인 동식물 숭배에서 하늘이나 땅, 바람, 비와 같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연 현상, 그리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귀신같은 것들로 발전했다.

실질적인 인격신이 들어온 것은 서학(기독교)이 들어오는 조선 말기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선교사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서학은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것에 가깝게 들렸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수천년 동안 함께 해왔던 토속신앙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기독교는 조선 말기,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를 거쳐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수많은 십자가들이 시가지며 시골이며 할 것 없이 밀려들었다.

한국의 무신론적 특성으로 본 “만들어진 신”

뼛속까지 종교가 침투된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누군가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했을 때, 이유를 불문하고 대부분의(종교인) 사람들은 그 고백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누군가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했을 때, 한국인들 대부분은 그것을 크게 대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서양 사람보다 이해심이 많아 그런 것일까?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과 종교적 성향이 강한 나라 사이의 “무신론자”라는 의미가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적 성향이 강한 나라는 무신론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이 매우 오랫동안 시대에 새겨짐에 따라 국민의 정서가 그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무신론자는 “신을 숭배할 의사가 ‘아직’ 없는 사람”으로 전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도 많고,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될 때는 이미 현대적 자유에 대한 국민 계몽이 이루어지는 중이였기 때문에 “신을 믿건 안 믿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

하지만 모든 한국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근대 태동기 시절, 세도정치에 옛 한국인(조선인)은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상태였다. 사람이 살기 위한 기본적 요소를 확실하게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전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두가 아무 걱정 없고 굶주림 또한 없으며, 행복하다는 천국에 양민이 이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으로 유입된 천주교(조선은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매우 빠르게 신도들을 늘려갔다.

당시에 문맹률이 매우 높은 상태였기 때문에 성경 한 구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이것은 전도할 때 매우 그럴듯한 문장만 골라 읊을 수 있는 매력적인 이점이었다. 조선 민족이 구약 성경의 일부만이라도 해독할 수 있었다면 깊은 유교적 도리를 크게 위반하는 구절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봤을 것이며, 그에 따라 전도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릇되게만 보이는 조선 왕실이 천주교를 박해한 것도 호재(전도사에 있어서)라고 볼 수 있었다. 박해의 희생양을 성스러운 순교자로서, 천국으로 갔을 것이라고 역설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 행패에 괴롭게 사는 것보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더 나을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지며 천주교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비판적 측면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순풍에 돛 단 듯이 기독교는 세력을 불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먹는 것, 자는 곳, 입는 것 걱정 안하고 살기까지는 근대 태동기로부터 지금까지 100년도 넘는 세월이 걸렸으므로 지속적인 민생고의 표출이 계속되어, 또한 세력 불림에 일조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기독교화 되었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현재까지도 종교를 민생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성경에 담겨진 내용을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실태이다.

하지만 작금의 자유를 누리는 신세대에서 종교를 헌신적으로 믿는 경우는 부모가 독실한 신자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한국 교육에 첨가되기 시작하자 그 교육을 받는 한국인은 상당수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믿는가?”라는 양산형 무신론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굳이 신을 믿는 종교를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평소에 그런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않았다. 이런 태도는 곧 기독교가 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실제로 조금의 말재간으로도 전도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도의 손길을 받지 않거나, 계속해서 발전하는 문물들을 배우는 21c의 학생 들 중 일부는 그 방관자적 무신론자들과는 다르게 무신론의 영역의 일부를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 역시 전례 무신론자와 타 종교를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자신의 무신론적 의사를 몇 가지 근거를 들어 표출함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에 따라 다른 국가의 실태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한 두 사람씩 “신은 없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종교인의 자녀 또한 지금 과학과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기도 하는,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모순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이런 경우, 그 자녀는 단지 교회를 놀이터나 사교 장소로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에게 종교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좋은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한국의 광신도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광신도들은 많지 않지만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그 어떤 종교인보다도 강하다.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데,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여 상종도 하지 않는다.(어떻게 보면 외국에 비해 많이 온순하다.)

이러한 광신도는 감성적인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데, 무신론자로서 이런 광신도를 볼 때 항상 교육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을 주시한다.

광신도들 중 50세 이상 신도가 대부분이며 그 이하의 사람은 평소에 스트레스 많이 쌓였거나 고통을 받았거나 하는 사연을 지닌 사람이 많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한국은 종교의 자유도가 타국에 비해 높은 것이 사실이다.(부모 사이의 갈등, 종교 대물림 제외) 따라서 무신론에 대해서 매우 깊은 탐구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에서 서양의 무신론 관련 서적의 내용은 그들의 행동이 우리에 비해서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또한 한국 사람이 볼 때 “저렇게 까지 반박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종교의 무의미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들어진 신”은 서양 무신론 서적 중에서 한국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데 서양의 종교 실태와 그에 대한 무신론자의 견해가 잘 보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 책의 거침없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도 옳은 처사는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가치관은 우리와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이루어져야 한다. 서양서적 중에서도 매우 민감한 분야를 다루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은 충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읽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약 550쪽에 걸쳐 기술되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 길지 않다. 종교의 모순됨의 비판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것이다.

※ 비판

이 책의 167~172p에 걸쳐 쓰여진 스티븐 언윈의 <신의 개연성>에 등장하여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베이스논증"에 대한 도킨스의 입장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69~170p에 걸친 확률이야기에 대해 그답지 않은 미흡한 판단으로 인한 독자의 이해의 어려움, 또는 어설픈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베이스논증에 제시된, 신의 존재 가능성을 퍼센트로 나타낸 것을 무려 한 페이지에 걸쳐 기술한 것에 비해, 그의 진짜 견해는 약 반 줄 정도로 기술되어있다. 그것도 본문을 돕는 조언의 표시로.

그것은 정작 본인의 의사인 "신의 존재 가능성을 퍼센트로 나타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를 매우 흐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확률 자체에 대해 기술하는 것보다, 왜 본인의 생각이 그것인가에 대한 효과적인 근거 제시를 해주는 것이 그답고,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 뒤에 "설계자 신은 조직화한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이용할 수 없다. 무언가를 설계할 수 있는 신은 그 자체가 같은 종류의 설명을 요구할 만큼 복잡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부분도 있는데, 물론 이런 민감한 부분은 한어로 번역되면서 원문가 약간 다른 견해로 비춰지기 마련이지만, 번역판이 그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무언가를 설계할 수 있는 신은 그만큼 복잡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모순은 없지만, 갑작스럽게 설계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범인으로서는 아리송할 따름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 이전의 인과관계를 보충설명 하던가, 아니면 삭제하는 것이 옳다. 그것도 아니라면 역자가 도킨스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172p를 보면 그가 "불가능 논증"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 기술의 부적절함은 없다. "불가능 논증"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논증 자체는 '누가 신을 만들었나?'라는 익숙한 결론을 자극한다."라고 하는데, "누가 신을 만들었나?"는 "누가 신을 만들고 자시고는 상관이 없으며, 적어도 만들어진 신은 인간이 존재하는 계(界)에 대해서만큼은 전지하고 전능하다."라는 개독인의 변명만큼 무의미하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는 아주 큰 문제를 간과하고 글을 집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스스로가 ‘신’이라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에 대해서 그 스스로가 신이라는 방대한 의미를 몇 가지로 한정한 것 같았으며, 그것은 모든 신에 대한 부정으로 글을 집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비록 겉장을 비롯한 몇몇 문장에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어구가 실리기는 했지만, 절대다수가 기독교의 신을 상기하며 쓰여진 글인 것 같았다. 그도 유럽인이란 것인가? 그의 책이 세계로 나가듯이, 그의 마인드도 좀 더 세계적일 필요가 있다.

분명히 밝히지만, 보편적인 신은 없다. 야훼를 믿는 많은 종교인이 모두 똑같은 야훼를 연상하며 야훼를 믿지 않으며, 다른 종교 또한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 책의 집필 목적을 제대로 수행시키기 위해서는 모든(그도 인간이니 ‘신의 모든 의미’에 대해 모르거나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무신론자가 수많은 신들 중 단 하나라도 가볍게 여겨 간과한다면, 무신론자로서의 주장을 묵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종교의 신에 대한 반박으로서 왜 신이 무의미한 이상인지에 대해 보편적 인식을 심어주는 것에 노력해야할 것이다.

(다음은 244p~255p에 기술된 본문이다.)

이 장에는 내 책의 핵심 논증이 들어 있으며, 그렇기에 한 말을 또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것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1.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지성에 도전한 가장 큰 과제들 중 하나는 우주의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설계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설계처럼 보이는 것을 실제 설계로 보고 싶다는 유혹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시계 같은 인공물의 경우, 지적인 공학자가 설계자였다. 같은 논리를 눈이나 날개나 거미나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3. 그 유혹은 잘못된 것이다. 설계자가설은 즉시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카이훅이 아니라 기중기가 필요하다. 기중기만이 단순한 것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기중기는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다.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은 경이로운 통계적 비개연성과, 설계된듯한 모습을 한 생물들이 어떻게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화했는지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는 생물에게서 나타나는 설계라는 환각이 그저 환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우리는 아직 물리학에서는 상응하는 기중기를 찾지 못했다. 특정한 다중우주 이론이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 같은 설명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그런 종류의 설명은 다윈주의에 비해 덜 만족스럽다. 행운을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본 원리는 한계가 이는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운을 가정할 수 있게 해준다.

6. 우리는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 만큼이나 강력한 기중기가 물리학에서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령 다윈주의와 맞먹는 아주 흡족한 기중기가 물리학 분야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비교적 약한 기중기들도 인본 원리로 뒷받침되면 지적 설계자라는 자멸하는 스카이훅 가설보다 더 낫다.

3번을 보면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물음이 있는데, 이 물음은 앞서 불가능논증을 언급할 때, “신은 누가 만들었나?”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와 같은 물음은 “설계자를 누가 설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지금 이 세계를 설계한 신을 인간은 존경할 뿐이다.”라는 대답이나, “당신이 말한 다중우주론으로 보면(당신이 이 책에 언급한) 좀 더 오래된 우주가 다른 우주를 설계했으며, 제일 최초의 우주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최초의 존재일지도 모르지 않는가?”라는 대답처럼 정말 무의미하다.

그런 질문보다는 “시계 같은 인공물에게 적용되는 논리를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처사인지 매우 의문스럽다.”와 같은 물음이 차라리 더 낫다.

또한 3번의 “처음에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라는 대목은 보다시피 174p~177p에 기술된 보잉747과 고물야적장이란 제목의 글에서 그가 통계적 비개연성에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도킨스는 비개연성 논증을 다윈주의를 통해 재해석하며 반박하고 있다.)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무신론자의 입장으로 설명해보라는 것이었다.” 또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반박해보라는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 대목만 보면 크게 이상할 점이 없지만, 한참 머리 아픈 글을 읽고 있을 때는 보다 확실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이해에 혼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4번의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다.”에서 “다윈의”를 삭제하거나 “다윈의 진화론을 통한 자연선택이다.”가 더 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5번의 “그러나 인본 원리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운을 가정할 수 있게 해준다.”에서 인본 원리 예찬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모호한 부분은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라는 대목이다. 도대체 뭘 말하는지 알 수가 없는 대목이다.

잡설1

‘세계’라는 말은 하루에도 전 지역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말이다. 다양한 사람이 세계란 말을 사용하듯 뜻 또한 다양하다. 지구를 아우르는 것이 첫째로 많이 쓰이는 것이요, 인간이 알고 있는 영역을 아울러 세계라 함도 있으며, 순행과 역행을 설명할 때의 복잡한 세계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많은 뜻을 전부 폐기하고, 이 글에서의 세계를 정의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의 ‘세계’는 ‘존재 지역’을 뜻한다. 부연하자면, 인간이 아는 지역이든 모르는 지역이든 존재하고 있다면 그 지역은 ‘세계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탈현대의 과도기에 있는 인간의 표현력과 상상력이란 기를 써봐야 ‘세계’안이었다. “존재가 없다.”라는 생각은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사고이기도 했다. 인류의 기원부터 지금까지 단 1초도 빠짐없이 인간이 생을 마치는 날까지 ‘존재’만을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안다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유용하게 적용할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무존재를 떠올려보자.”라는 말에 당신이라면 무엇이 떠오르겠는가? 많은 사람이 끝없는 어둠이라든지 스펙트럼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질문이며 대답이며 모두 틀린 것이다. 무존재는 형상이 없다. 따라서 떠올릴 수도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으로서는 불가해하다고 여기는 이 단계가 바로 ‘인지의 단계’이다. 위와 같이 어둠과 같은 대체 연상물을 떠올리거나 “어떻게 형상이 없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 또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잠시나마 했던 생각을 기억 저편으로 묻어버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인지’단계에서 정체 된다.

하지만 ‘인지’단계에서 승격될 경우 ‘동조’, ‘허무’의 단계가 될 수 있다. 이 단계는 특별한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지만, 본격적으로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 단계라는 가장 원론적인 정의를 조심스레 비칠 수는 있다.

이렇게 정의가 힘든 점은 바로 ‘동조’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허무’는 무존재의 자각으로 인한 ‘존재 목적 상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조’는 인간의 본능에 의해 개방되는 행동 양식이다. 무존재라는 것은 존재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무존재의 자각이 인간의 심적 능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본능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 본능이 해야 할 최선의 방책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간단하다. 무존재를 존재의 한 갈래로 대체하면 되는 것이다. 본능은 수많은 심상과 기억정보를 뒤져 이와 비슷한 존재를 찾는다. 그리고 곧 찾아낸다. 찾아낸 것은 ‘신’이다.

신에 대한 경외, 존경 또는 공포는 무존재에 대해 인간이 주는 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본능은 신과 무존재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즉 흡수·통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사회에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언어인 ‘신’이 흡수·통합의 승자가 되고 무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무존재를 부정함으로서 인간은 넓디넓은 세계에서 제 명에 살다 죽는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순행에서 내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바로 ‘신’의 역할이다. 신은 인간이 무존재의 자각으로부터의 허무에 도피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흥미가 동한 나는 신의 기원 또한 고찰해보았다.

"과연 신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생각에 나는 한 가지의 가능성을 도출해내었다.

신은 인간이 지성의 심화를 시작할 때부터 나왔다. 지성이란 지적능력을 말함으로 후천적 심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지성이 발달하기 전, 그러니까 사회성만 있던 인류는 단순히 씨족사회를 구성하고 힘을 모아 자연의 강력한 적들을 물리칠 생각을 했지, 누군가를 믿거나, 그로인한 신념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해보려는 시도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뇌용량이 커지고 그에 따라 단순한 지성에서 심화된 지성으로 인간은 발전하게 된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인간은 욕구가 커지게 마련이다. 그 욕구는 바로 인간의 심리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심리는 크게 본능, 자아, 이성으로 나눌 수 있다. 본능은 개인의 생존 욕구를 반영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이다. 인간의 존립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심리이다.

인간이 사회성을 발달시킬수록 본능은 당연히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을 도와줄 자아와 이성을 파생시킨다. 파생 초기의 자아와 이성은 이러한 본능이 의도하는 바를 충실히 수행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와 이성은 인간의 사회성이 “극도로” 발달되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개인적 인간보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즉 자아와 이성이 본능을 능가하게 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와중에도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성과 자아가 본능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존립의 위협을 느낀 본능은 내면 심리에 개인적 인간(본능)이 추구하는 절대 인간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의도한바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의 소망이 된다. 힘이나 지혜와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본능은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인간임을 배제한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이 본능의 뜻대로 개인적 소망을 가지기 시작하고 심화시켜나갔다.

그러다가 그 소망을 다른 인간들에게 말하게 된다. 한 인간의 소망을 다른 인간들이 공감했고,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 소망이 아닌 사회적 소망이 되었다. 이성과 자아가 그 소망에 침범하게 되었다. 자아와 이성은 현실과 사회에 맞게 그 소망을 현실화, 구체화 시켰다. 그 소망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게 되고, 모두의(그 씨족의) 소망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소망은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소망의 약점을 이성과 자아는 특정 존재, 원하는 바를 갖춘 특정 존재에 신성성과 신뢰를 불어넣게 된다.

신의 탄생에는 이러한 내면 심리의 작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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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 무협 진삼 !!이것도 출판해야 했는가? +26 Lv.1 天劍商人 08.12.26 4,790 7 / 23
1500 비평요청 '게임판타지'라는 장르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12 Lv.1 인사마드 08.12.26 3,096 2 / 7
1499 판타지 달빛조각사 +6 Lv.45 에버 08.12.26 2,076 5 / 2
1498 판타지 시린의 영주 +5 무영신마괴 08.12.25 5,089 4 / 1
1497 판타지 판타지 '탐그루'를 읽고 +12 Lv.1 동이도로리 08.12.25 5,196 2 / 5
1496 기타장르 대한민국-유호 +3 Lv.99 나니 08.12.25 3,672 1 / 1
1495 판타지 흡혈왕 바하문트-캐릭터들의 무식함 +18 alsrb9434 08.12.23 4,326 31 / 2
1494 무협 [무협]문주 +5 Lv.85 한편만Tn 08.12.23 3,266 8 / 4
1493 판타지 탁목조 - 암흑사제 1,2 +11 Personacon Gee존 08.12.23 2,874 7 / 2
1492 판타지 암흑사제 - 탁목조작가님 +11 Lv.1 흑오조 08.12.23 4,980 6 / 4
1491 무협 금가무적 +17 Lv.1 흑오조 08.12.23 2,793 18 / 3
1490 무협 청룡무사를 읽고....(내용있음) +3 초심짱 08.12.22 3,725 11 / 1
1489 무협 무천향을 읽고....(내용있음) +8 초심짱 08.12.22 2,566 11 / 7
1488 비평요청 판타지 속의 무분별한 영어 사용 +38 alsrb9434 08.12.21 4,495 26 / 15
1487 판타지 "투명벌레" (미리나름 많아요.) +35 Lv.1 Taroker 08.12.20 3,850 34 / 0
1486 판타지 송치현씨의 엿구슬 먹은 그림자 군주 +17 소울블루 08.12.20 5,604 29 / 6
1485 무협 천년용왕 +20 Lv.45 에버 08.12.18 3,664 12 / 6
1484 판타지 하멜 완결까지 보고 나서 +7 Lv.3 白鬼 08.12.18 2,508 7 / 1
1483 판타지 기갑물의 수작 제이코플래닛 4권.... +4 초심짱 08.12.18 2,371 8 / 4
1482 무협 건곤일기 4권 같은 작가인지 의심이 듭니다 +9 Lv.31 아자토스 08.12.18 2,959 19 / 1
1481 비평요청 낭왕 +31 Lv.1 광천혈마 08.12.17 4,756 10 / 26
1480 무협 백팔번뇌 +10 Lv.8 삽치는아이 08.12.16 2,137 5 / 0
1479 판타지 푸쉬(push).... 이유가 뭘까.....(소량의 미리니름) +15 Lv.1 쿠르훌 08.12.16 3,277 8 / 4
1478 기타장르 달빛조각사...과연 명작? +57 Lv.2 리아니 08.12.16 4,734 25 / 7
1477 무협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 7권 - 뇌신과의 크로스 오버... +20 Cloud_Nine 08.12.15 4,688 20 / 7
1476 판타지 암흑대공 칼리프 - WOD와 저작권. +22 Cloud_Nine 08.12.15 5,115 4 / 3
1475 판타지 솔직히 낚였다고 생각한 글들2 +8 alsrb9434 08.12.15 2,353 7 / 28
1474 판타지 솔직히 낚였다고 생각한 글들1 +16 alsrb9434 08.12.15 2,703 7 / 25
1473 비평요청 요즘 나오고 있는 소위 게임판타지라는 장르소설을... +18 Lv.15 주드마린 08.12.15 4,061 4 / 6
1472 무협 오리엔탈 판타지라는 명칭에 대한 소소한 불만 +11 Lv.1 Rolland 08.12.14 2,743 8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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