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이길조
작품명 : 숭인문
출판사 : 자유연재
연재 시작후 이십여일만에 선호작베스트 4위로 올라선 글입니다. 나름대로 무협에 대한 오랜 생각과 깊이 있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글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런만큼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주로 3장 1편의 내용에 대해 세세하게 볼건데요, 3장 1편의 내용은 이전과는 달리 숭인문의 무공에 대해 차츰 알려지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이후 전개되는 내용과 표현을 대표할 수 있는 편이기도 합니다.
소설 전체에서는 숭인문과 지생고라는 독특한 설정이 두드러집니다. 나만의 무협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 눈이 선하죠. 작가의 변에 나온 무협에 관한 이야기엔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소설로 드러내는 과정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 무협과 소설의 풍취가 부족합니다.
이건 글에서 쓰인 표현 때문에 그런데요, '교육', '교과서', '공과 수', '선방', '욕', '효율적' 등 일상적인 표현들의 사용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교과서', '교과서적인'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요, 지극히 현대적인 그리고 주로 학생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죠. '교과서'는 가르침, 무공서, 비급(그리 적절하진 않네요.) 등 무협적인 표현으로 바꿔 쓸 수 있고, '교과서적인'이라는 표현은 정형적인, 전형적인, 가르침과 같은, 초식 그대로, 몸에 체득하지 않은 등 여타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죠.
'선방'도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 은어로는 '선빵'이 있고, 표준어는 '선공'이죠. 무협에서는 선수, 선초로 표현하거나 초식을 먼저 펼치다, 공격을 먼저 펼치다 라고 서술합니다. 종염방이 저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빵이, 공격을 먼저 펼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선공이나 선수가 더 적합하겠죠. 특히 '선빵'의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이 것이 종염방의 속내라는 것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소설의 화자가 '선방을 날리는 것이 좋다.'라고 해버린다면 소설 전체의 분위기가 '선방'이라는 표현에 맞춰져 버리게 되죠.
'욕을 하다'도 '욕설을 내뱉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깔끔할겁니다. 양진위의 성격이 거칠다는 점을 드러내면서도 결코 저속해 보이지 않죠.
- 그리고 묘사에서 살리고 생략해야 하는 묘미가 떨어집니다.
양진위가 가르침을 위해 사제들을 호명(호명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공식적인 표현이죠. 양진위와 사제들 간의 사적인 관계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닙니다.)하는 장면이나 장문인과 양진위의 대화장면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양진위가 사제들을 가르칠 시각을 정하면서 사제들에게 시작을 정해주고 사제들의 답변이 차례로 이어집니다만, 이렇게 일일이 문답을 나눌 필요는 없죠. 어차피 서열역순(?)대로 1시진씩 가르치고 사제들의 답변도 천편일률적이라면 그걸 하나하나 다 담을 이유는 없습니다. 빠른 진행을 위해서라면 장수오 이후의 대화는 화자의 설명으로 대체하면 되고, 다른 사제와 달리 특이한 점이 있는 도현성과의 대화만 두드러지게 묘사해도 되겠죠. 그보다는 이 장면은 사제들과 양진위의 2년만의 대면, 소설 상에서는 숭인문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예를 들어 양진위는 막내제자인 장수오를 2년만에 대면하는 것으로 그려지죠. 그런데 모든 제자와의 대화에서 이런 패턴이 반복됩니다.
「12살로 사형제 중 막내인 장수오가 앳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예. ~ 예.」
다음 장면에서 독자가 알 수 있는 제3자인 화자의 설명을 통해 장수오가 열두살에 막내며 앳되다라는 것 외엔 없습니다. 장수오의 외양이나 생김새도, 2년만에 사제를 대한 양진위의 느낌이나 사형을 만난 장수오의 생각도 알 수 없죠. 다른 사제들과 동일한 '예'라는 장수오의 무미건조한 대답에서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장수오가 숭인문의 제자, 아니 숭인문의 학생같다는 이미지입니다. 앞서 나이를 괄호를 통해 드러낸 것도 설명문의 방식이지 소설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양진위의 눈을 통해 사제들을 독자에게 소개한다면, 이년만에 만난 사제는 조금 자라보였다거나, 아직도 앳된 모습을 엿보인다거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형을 대하고 긴장한 마음이 역력해 보인거다거, 복장이 어떻다거나, 자세가 어떻다거나, 얼굴이 어떻다거나 눈동자를 굴린다거나... 등등 이런 저런 열두살 소년의 모습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양진위와 장문인의 대화에서도 양진위가 사문을 위해 돈을 벌러, 아니 사문을 생계를 책임지고 사문의 식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떠나야할 당위성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은 좋지만, 그걸 화자의 입을 통해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탁진형의 고생이 컸다, 즉 사문의 생계를 책임지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는 아직 임무를 수행하지도 않는 양진위와 장문인과의 대화에서 드러낼 것이 아니라, 차후 양진위와 대사형이 탁진형이 대면하는 장면에서 탁진형의 초췌해진 모습이나 거칠어진 외양, 부상 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더 좋겠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양진위가 느낄 안스러운 감정이나 또는 그것을 당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양진위의 감정에 대한 묘사한다면 앞으로 강호에 나가며 닥쳐올 어려움을 독자들이 어렴풋이 나마 느낄 수 있게 되겠죠.
글을 쓰는 것은 독자에게 소설의 내용을 알려주고 이해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작가가 펼칠 이야기에 독자가 빠져들도록 하기 위함이죠. 독자가 소설의 이야기에 빠진다면 그 순간부터 작가와 독자는 함께 호흡하고 둘은 한편이 됩니다. 소설의 전개 상 약간 어긋나는 흐름이 있다 하더라도 두말 않고 넘어가 주죠. 하지만 작가가 소설의 내용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는데만 급급한다면 단 한번이라도 독자가 공감할 수 없는 전개나 내용이 나온다면 그 때부터 작가와 독자는 갈라서게 됩니다.
소인구와 중염방의 대결장면이나 사제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하는 양진위의 가르침 등 전체적으로 내용이 세련되고 지생고, 숭인문 등 참신한 발상이 번뜩입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내는 소설 상의 표현과 전개가 아직 덜 다듬어진 것 같네요. 내용이 좋다보니 표현이 평범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해 보이는거죠. 그럼에도 작가는 전개에 무리가 없을지, 독자가 내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지 고민할뿐 스스로의 표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글은 결국 느낌이고 맛입니다. 적은 재료라도 숙성시키면 되죠. 독자를 이해시키는데에만 신경쓴다면 좋은 재료도 결국 상하고 말겁니다.
제가 이 감상을 쓰는 이유를 콕 집어 말한다면 '선방'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종염방과 소인구의 대타에서 드러난 화자는 독자에게 양진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대결을 묘사하는 화자의 설명은 곧 이를 지켜보는 양진위의 생각이죠. 그런데 선방이 어떻니, 공수가 어떻니, 효율적이니 정당하니...라고 표현하면 독자는 화자의 설명하는 무공의 원리와 그 수준을 양진위의 그것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양진위가 대성한 숭인문의 무공 수준이죠. 지금까지의 양진위와 숭인문의 무공에 대한 두근거림과 기대가 여기서 확 날아갔습니다.
선발제인(先發制人)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협작가들이 이런저런 한문, 한자성어를 이용해서 어렵게 묘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죠. 무협을 읽는 독자들의 기대, 그 환상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처음 작가의 변을 읽고 정말 공감했습니다. 저도 그런 무협을 생각했고 읽고 싶네요. 그런 기대가 앞선만큼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이런 건 글을 쓰면 점점 나아지는 것이지만 글을 읽은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좌백, 진산, 장경님 등 기성작가분들이 이미 스스로의 무협세계를 만들어 냈지만 그 것만으로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잖습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