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지생고 자체는 무협이란 세계에서 그렇게 큰 무리가 있는 설정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협에 자주 나오는 설정중에 보면 어떤 문파에서 어린 아이들을 모아서 오지에 가둬놓고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상씩 수련시키는 경우가 꽤 있는데요. 그럼 이런 경우에 그 문파의 무사들은 무슨 얻을게 있다고 오지에 쳐박혀서 그 오랜시간동안 아이들이나 가르치고 있을까요? 어느정도의 경제적 보상은 있을지 모르지만 무사들 자신의 무공향상에는 아무 도움도 안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무사들이 그래도 오지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건 문파에 대한 충성심 혹은 사명감 때문 아닐까요?(혹은 문파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생명에 위협을 느껴서일수도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숭인문에서도 3년 5년 자신의 사질 혹은 사제들 돌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게 자신이 사제 혹은 사질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강한 사명감만 가지고 있다면요..그리고 숭인문의 주인공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에 기꺼이 사제들 뒷바라지를 맡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사제 중 한명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상당히 불만이 많죠..
금원님이 예전에 드셨던 예가 어떤건진 잘모르겠지만 굳이 현실세계에서 숭인문과 비슷한 예를 찾자면 과거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렵던 1960년대나 70년대에 동생들 학교 보내려고 형이나 누나가 학교가는거 포기하고 일찌감치 취직해서 동생들 뒷바라지 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네요. 왜 자기 학교 가는건 포기하고 돈벌어서 동생들은 학교를 보낼까요? 형 또는 누나로서의 동생들을 돌보고 잘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저는 숭인문의 무공향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산산님의 비평글에는 공감이 갑니다만 지생고 자체가 억지설정이라는데는 동의할 수가 없네요.
저는 지생고라는 과정 자체는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인생을 타인을 위해 쓰는 거니까 큰 희생이죠. 그러나 작품 내에서도 지생고의 어려움에 대해서, 그리고 각자가 그 제도를 받아들이는 입장차이에 대해서 충분히 서술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작은 공동체 내에서 특수한 체계를 통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이야기하고자 작가분이 그런 설정을 내세운 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겠죠. 그냥 독특한 문파의 독특한 관습, 사람을 숭상하는 전통의 하나일 뿐으로 보입니다.
숭인문에서 좌절하게 되는건 산산님이 언급했던 무공단계이고 두번째가 무공 그 자체입니다.
특별한 무공초식이 없는것은 둘째 치고 죽음의 고비에서 얻는 깨달음으로 대성을 이룬다는 설정이지만 과거의 깨달음들이 전혀 전무해보이는 괴리감과 숭인문 역사상 축적된 잠재력이 하나도 없는것은 기존의 틀을 상당히 벗어난 것이라 느꼈습니다. 뭐 설정이니 넘어간다고 쳐도 기존의 틀을 세로 바꾸면서 최소한 저에게는 납득가게 서술되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몇몇 인물의 행동이 조금 아쉬움이 남는거 같습니다.
지생고를 보자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때의 대처 능력을 키우려고 하는 듯 합니다. 또한, 문파에서 돈 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입 하나 덜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비슷한 예가 숙부나 그외 어른들이 조카나 손자를 데리고 다니며 강호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시키는게 있죠.)
의문점은 대성까지 이룬 장래유망한 제자에게 지생고를 하는 아이들의 뒤를 봐주게 하는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대성까지 이루었으면 대외 활동을 시켜 돈을 벌어오게 하거나, 자신의 사제의 무공을 봐주어 무공을 높여주듯이 지생고를 겪고도 아직 미진한 사제들이나 사매들의 무공을 봐주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지생고의 뒤를 봐주는 이들은 차라리 나이를 많이 먹고 더이상 무공도 늘지 않고 공짜밥 먹는 사숙들을 시켜 봐주게 하는데 더 맞지 않나는 생각이 드네요.)
주인공이 꼭 지생고를 한다해도 문파를 위해서는 다른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문파발전을 위해 그게 옳은 선택일텐데...
숭인문을 보자면 무예가 실전위주로 이루어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대문파처럼 정해진 틀에 맞춰서 그 문파만의 기상이 서린 무예가 아닌 실전으로 어렸을때부터 지생고를 통해 만들어지고 지생고가 끝나고서부터는 그걸 밑바탕 삼아 무공을 익혀가는데, 과연 실전 위주 무예가 그걸로 될지는 미지수라 생각되고요. 그로인해 소성을 이룬 사람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전 무예의 확실한 근거는 바로 주인공이 전쟁터를 다녀오고나서 소성 하기도 힘든 문파에서 대성까지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사제가 대성을 이룬 것은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아마, 사제가 천재인듯합니다.(주인공이 무수한 실전으로 이룬 대성을 주인공과의 실전 같은 대련으로만으로 대성을 이루었다는 것은 조금 약한 감이 있는데도 대성했다는 것은 천재라는 생각밖에 되지 않네요.)
사매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자면 실전 무예의 총집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과의 대련 후, 산적으로 미진한 실전경험을 쌓게 하는 방식으로 무공을 높여가고 있죠.
하지만 그런 모습이 조금 의문이 들긴 합니다.
과연, 그정도로 강호에 널린 후기지수들을 따라잡아 선두에 위치한 무공수준이 될 수 있을까하는 거죠.
조금씩 성장을 하는 것 같지만, 후기지수들이 빌빌거릴 정도의 성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실전무예에 대해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한계성이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저정도로 한계를 경험하고 무슨 비전이 있어 그 한계를 깨고 넘어서서 나중에 다른 비전으로 대성을 넘긴다면 과연, 고수가 왜 적은지 독자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으로 계속 한계를 깬다는 생각으로 간다면 조금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이 경험한 그런 전투나 싸움으로 단련된 이들이 흔치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있을텐데, 그 사람들은 안되고 주인공만 깨달음을 된다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금원님// 그런 생각을 금원님만 하는 게 아니라 작품 내의 인물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작가도, 작중 캐릭터도, 지생고란 제도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온 사람이 있고, 전통이지만 거부하는 자가 있고, 그런 각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현대인이라면 절대 불가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숭인문에서 제자들은 사문의 절대적인 지원 하에 성장한 겁니다. 그걸 무조건 갚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들 중에서 일정 이상의 성취를 이룬 자에 한해서 사문에 그 은혜를 갚으라는 것인데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죠.
우리들도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은혜로 성장하고, 사회에 나가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나이든 부모님을 부양하게 되죠. 부모님은 금방 돌아가실 수도 있고 백세까지 장수하실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생존해 계실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버리거나 하나요?
그 장XX처럼 거부할 수도 있죠. 그런 녀석은 이제까지 얻은 걸 전부 포기하면 의무를 질 필요는 없겠군요. 애초에 사문의 은혜로 모든 것을 얻은 주제에 베푸는 것은 거부한다니, 그럴거면 처음부터 숭인문에 들지 말았어야 했고,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 했던 것이죠.
현실 세계에선 롤플레이 게임식 레벨업이 아닌 계단식이 맞다는 사견입니다.
어느순간 부터 애니메이션이나 무협에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처럼 레벨 개념이들어온지 모르겠습니다만. 무협에 적합한 개념인 버쳐파이터즈, 스타크래프트, 철권엔 레벨은 없지만 이게임 모두 고수,중수,하수, 입문도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 지생고의 예를 들면 스타크래프트를 컴퓨터랑 1:7로 집에서 10년 내공을 쌓은 사람과 잘하는 친구랑 팀플해서 PC방에서 1년정도 내공을 쌓아 승률이 50%되는 사람하고 배틀넷을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또 친구가 중수인지 고수인지에 따라 발전속도도 다를겁니다.
이길조 작가님이 삼성과 그의 수련법인 지생고에 대한 큰 숲을 설계하시고 그에 대한 묘목을 심는 도중이라 생각듭니다. 댓글을 보면 안타까움이 느껴지는건 이길조님이 창천문 적이시지 않고 숭인문 적인 분이시라 작은 댓글에도 과도하게 친절을 배푸시고 설명을 해주시니 숭인문이란 숲의 그늘에서 글을 읽음이 더뎌짐을 느껴지니 어찌해야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숭인문의 숲이 만들어지는 후일 삼성과 지생고에 대한 얘기를 나눔이 어떨까합니다.
SanSan 님 의견에 동감하는 바입니다...저도 재미있게 숭인문을 읽었지만, 종염방의 무공 증진 방식은 애초 작가님이 설정한 소성, 중성, 대성의 방식과 어긋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흔히들 영어 듣기 공부할때 그러잖아요. 열심히 공부하지만 늘지 않다가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순간 귀가 뻥 뚫리면서 한순간에 잘 들린다는...즉 계단 지향식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숭인문의 무공을 보았더랬습니다.
하지만, 깨작 깨작 거리다가 돈오의 방식으로 확 무공 실력이 늘어날 줄 알았던 종염방이 양진위와 수련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괄목 성장하듯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더군요. 산적과의 대결에서 일차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납치때 소성에 가깝게 성장하는 모습. 뭐, 종염방의 천재성을 나름 보여 주려는 의도 같은데, 종염방이 납치때 싸우는 모습을 보면 소성에도 점진적 단계가 있다는 것을 느껴 버리게 됩니다.
암튼, 같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 댔지만 결론은 SanSan님이 느낀바를 저도 어라? 하고 느꼈다는 것이네요...^^
음~전에 철학책에 "양질의 변화"라는 테마가 있었지요. 간단히 말하면 양의 축적이 어느 순간 질적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지요.
쉬운 예로 물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영하 20도씨의 얼음이 있다고 합시다. 얼음에 가열을 하면 얼음의 상태는 유지되지만 온도는 점점 올라가다 영도씨에서 액체로 변화합니다. 계속 열을 가하게 되면 100도씨까진 온도가 올라가서 비로소 기체가 됩니다.
점진적인 변화는 계속되지만 어느 순간 양적인 변화 단계를 넘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역사발전론에 적용해서 고대사회의 발전이 계속되다 중세사회사 다시 근대사회에 진입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요.
물의 온도가 계속 올라가지만 0도와 100도가 아니면 질적변환이 일어나지 않고 중세가 계속 발전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서야 근대로 이행됩니다.
소중대성도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성의 단계에서도 계속 발전합니다만 중성의 단계 진입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100도씨에 이른 순간에 액체가 기체가 되는 것처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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