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케스트렐
작품명 : 블랙 스펙터
출판사 : 영상노트
많은 분들이 블랙 스펙터에 대한 호평을 써주셨으니, 저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비평글 하나만 써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상당히 반영된 글임을 우선 밝혀두며, 반론이나 이의제기는 환영합니다. 미리니름은 피하려 노력했으나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 2% 부족한 느낌 ◇
요즘 염장물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블랙 스펙터』. 읽어보니 과연 커플천지에 염장씬이 가득하다. 대충 쓴 글도 아닌 듯 하고... 하지만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대략 수작에서 한 두 걸음 못미치는 평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긴장감의 결여. 가슴을 두근두근 벌렁벌렁 거리게 만드는 그것.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마른 침을 삼키게 하는 그것. 그런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어디에서 두근거려야 하는가 ◇
블랙 스펙터에는 많은 커플이 등장한다. 이미 이루어진 커플도 있고, 서로 눈치만 보는 풋내기들도 있다. 그들의 알콩달콩씬은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모든 연애 구도는 철저하리만치 일대일 구도로 고정되어 있고 거기엔 어떠한 불안요소도 없다. 약간의 양념을 위한 감정의 교환이 보이기는 하지만.
두근두근 거리는 사랑을 보여주려면 독자도 두근거리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진한 애정씬 연출로 염장을 지르려면 읽는 이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질러야 한다. 그런데 둘 중 어느쪽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이다.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처음 몇번 웃음지을 수 있지만 점점 익숙해진다. 형태의 변화, 강도의 증가가 없으니. 또한 파트너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작가도 주변인물도 그걸 지지하고 있으니 어떤 불안도 없다. 작중의 당사자들은 약간 불안함을 느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읽는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전투씬은 어떠한가. 알과 리디아 커플은 강하다. 엄청나게 강하다. '제국 최강의 이써리얼 나이트'라는 문구가 몇번 나왔는지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수십 번은 나왔을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뛰어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암살자가 열두 명이 아니라 백이십 명이 왔더라도 긴장감을 못느꼈을 것 같다. 마법사 아흔아홉 명이 덮치러 온다지만 당연히 이길 것 같았다. 실제로 차 한잔 마시는 사이에 몰살이었고. 주변인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너무나 강하기에,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고 작가도 수없이 강조하기에, 도무지 읽으며 긴장이 안된다. 당연히 이길건데 뭐.
전투묘사 자체는 좋다. 역동적인 면도 그럭저럭 잘 살리고 있고, 전술적인 전투를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하지만 결과가 뻔하고 당사자들도 긴장감이 없는데다, 심지어 주변인물들조차도 차라리 적을 동정할 정도이니... 아 그렇구나 하며 무감동하게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몇몇 개연성의 문제 ◇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개연성 빠돌이가 될 생각은 없으니 심각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태클을 걸고자 함은 아니라는 걸 미리 언급해 둔다. 눈에 밟히는 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 큼직한 것 몇개만 언급해보자.
1. 의심없는 사람들
시골마을에 옆나라 암살자가 12명 습격해왔다. 다 죽었다. 자... 이 마을에는 그런 암살자는 찜쪄먹을 수 있는 검은 망령이라는 커플이 살고 있다. 그들의 집에는 신원이 불분명한 귀티 좔좔 흐르는 소년 소녀가 어느날부터인가 함께 산다. 이건 수상함 그 자체다. 그런데도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리디아가 마법으로 추적하는 건 막았고, 함부로 검은 망령 씩이나 되는 그들을 의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나오긴 한다. 그러나 무력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당연히 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소년 소녀 쪽은 신분조작같은 기본적인 조치도 하지 않은 것 같고. (나중에 제국정보부에서는 대충 정황만 보고도 다 파악해버리거늘... 시골은 다른건가!?)
테드가 전직 암살자 소녀 쥰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그는 경비대며, 당연히 영지의 안전에 대해 다른 이와는 다른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날 암살자가 왔다가 대거 죽었다. 그 직후 다친 소녀를 주웠다. 근데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_=
그가 쥰을 특별히 숨기려 한 것도 아니다. 의사 데려와서 진찰시키고 한다. 신분조작같은 것은 여전히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경비대원인 테드도, 그 주변사람도, "두드려맞아서 내장파열 직전까지 갔던 소녀"가 어디서 왔고 왜 그렇게 다쳤는지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 집의 소년 소녀도 그렇고, 쥰도 그렇고, 제국의 백성들이 신원미상인 이들에게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것은 왜인가. 제도 같은 초거대 도시도 아니고 그냥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이거늘. 옆집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이웃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말인가.
2.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석연치 않은 점
백작가의 마법사 아흔아홉 명이 습격할 때 이야기인데, 걔들은 그래도 명색이 백작가인데 호위기사 한명도 없는 것은 어째서인지 궁금하다. 마법사라면 나름 콧대높고 지위높은 이들일 터인데 시중들어줄 깎두기 몇명 정도는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활이라도 쏘아대고 칼이라도 좀 휘둘러야지, 아무 생각 없이 마법사만 왕창 와서 무전술 무전략으로 그냥 맞아죽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물론 이부분은 작가분의 설정 나름이긴 하다)
시가전을 하는 부분도 의아하다. 당위성이 없다. 차 한잔 마실 동안 다 몰살당할 마법사 집단 분들과 싸우기 위해서 도시 전체에 대피령을 내리다니. 아니 그전에 그냥 나가서 싸우면 되지 왜 굳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왜 굳이' 황제까지 책임지겠다 운운해가면서 시가전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 걔들 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니 그냥 알과 리디아가 나가서 쓸어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차 한잔 마시면 될 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황제가 주인공들 편들어 주려고 그런줄 알았다. 그래도 마법사 백여명이면 상당히 강력하니까, 탁 트인 개활지에서 싸우기보다는 시야가 제한되고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도시 내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무대를 준비해준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전혀 아니다. 지형이고 뭐고 이용할 시간도 없이 그냥 다 쳐죽인다. (대체 왜 시가전을 한 건지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줄 수 있다면 부탁드린다.)
3. 제국의 체계, 황녀의 지위
황녀의 권위에 대한 인식에 일관성이 없다. 앞부분에서는 황제 앞에서 동등한 제국민일 뿐이라 하다가, 뒤에 가서는 황족이니까 '네년'같은 한마디에 구족을 멸할 수 있다고 나온다. 어떤 이는 '황녀도 제국민'이라며 편하게 막 대하고, 누구는 '황녀는 황제가 가장 아끼는 이'라며 그 거대한 권력에 어려워 한다.
결국 중요한 건 "황제가 황녀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렸다. 황제야말로 유일무이한 절대자이니까. 황제가 진정 사심없이 황녀를 그저 제국민의 하나로만 여긴다면 그녀는 제국민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황제가 황녀를 사랑하는 딸로 대하며, 그리하여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게 된다면 그녀는 결코 단순한 제국민이 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제국이라는 독특한 체계에 대한 정립이 덜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서술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 이써리얼 나이트는 뭐지? ◇
아주 아주 근본적인 의문인데, 이써리얼 나이트란 게 뭔지 모르겠다. 강한 기사와 전투 마법사가 짝을 이룬 것을 보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근데 '왜 짝을 이루는지', '그렇게 하면 뭐가 좋은지', 이런 근본적인 설명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알과 리디아가 하는 모양새를 보면 딱히 둘이 같이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어보인다. 각자는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뿐, 굳이 서로가 있어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거나 하는 부분은 없다. 말하자면 단순한 숙련된 동료 정도의 느낌이다. 이써리얼 나이트라는 개념이 큰 의미를 가진다면 다른 나이트와의 2 vs 2 대련 같은 것도 나와주면 좋을 텐데, 그냥 각자 놀고 있다.
◇ 총 평 ◇
노력해서 썼지만 가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군데군데 많은 구멍이 보였다. 그것은 사실 구멍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보충해서 잘 썼다면 어떤 문제도 없었을지도. 그러나 '조금만 더'가 모자랐다는 게 문제인 거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없었다. 연애에선 밀고 당기는 맛이 없었고, 전투에선 긴박한 면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작은 확실히 넘는다. 전투 묘사에는 힘을 썼고(알/리디아 vs 99무뇌아 전투는 실망스러웠지만), 여러 커플들의 염장씬은 웃으며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갔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http://blog.naver.com/serpent/110025513862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