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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메멘토’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관한 소재를 다룬 것 외에도, 시간의 역순을 보여 주는 편집을 했다는 점에서도 참 독특하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돌이킬수없는’이란 영화도 그런 편집을 했더군요.
만일 그러한 영화를 한국에서 시도했다면 어땠을까요? 참신하단 평가를 받았을까요? 어쩌면 시도조차 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만일, 한국에서 누군가 해리포터와 같은 글을 쓴다면 어떨까요? ‘이것도 글이냐? 차라리 내가 발로써도 이것보단 낫겠다’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까요?
만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피카소와 같은 그림을 그려냈다면 어땠을까요? '이게 낙서지 그림이냐?' 이런 소리를 듣진 않았을까요?
처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시만하더라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도한 힙합류의 ‘랩’을 두고 한쪽에서는 참신하다 말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것도 노래냐?’라고 몰아 부치던 때가 있었지요.
오늘자 동아 일보에 실린 ‘식객’을 보니 일본 만화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더군요.
“만일 한국에서 군계와 같은 만화가 나온다면 그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알다시피 군계는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패륜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만일 한국에서 그러한 주인공을 가지고 만화나 혹은 소설을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장에 집단 마녀사냥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종종 우리는 너무 경직된 시각을 가지고 문화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니지만, 때로 몇몇 독자는 글 쓰는 이에게 ‘규격’을 강요합니다.
‘무협은 이러 이러해야 한다.’
‘판타지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
그것이 과연 옳을까요?
만일 그런 시각만으로 판타지를 보고, 무협을 본다면, 판타지와 무협은 영원히 진보할 수 없을 겁니다.
무릇, 한 가지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밑에 수많은 실험과, 시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무수히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한한 자유가 필요합니다. 실패할 자유, 실험할 자유, 금기된 것을 깨는 자유, 망가질 자유.
개연성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글이 유치 하면 또 어떻습니까? 어법이 틀리면 또 어떻고, 정말로 차마 보기 끔찍한 글이면 또 어떻습니까?
소위 말하는 ‘투드’류나 ‘귀여니'류도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류에 대해서는 저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지 않지만, 그것 또한 문화를 다지는 한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반드시 그런 글도 읽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글은 읽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전 단지, '그 글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쳐라',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 라고 족쇄를 채우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글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속박 받는 창작은 창작이 아닌, 조합에 불과합니다.
만일 보다 많은 양질의, 그리고 다양한 글을 보기 원하거든, 지금 당장은 눈에 차지 않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길 강요해선 안 되리라 봅니다.
멋진 디자인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수 많은 실패작과 실험작을 폐기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눈에 거슬리겠지만, 그러한 실험과 실패, 그리고 쓰레기의 산을 통해 정말로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이 누군가로부터 튀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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