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쓰려던 이야기인데 레디오스님의 의견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이참에 써봅니다. 저는 다양한 영역의 글을 읽는 편이지만, 일단 장르소설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 왜 읽는가
장르소설을 읽는 이유가 뭘까요.
물론 '재미'를 위해서입니다. 그 재미가 짧은 시간의 유흥이 될 수도 있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크나큰 감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조금 바꾸면 답이 달라지게 됩니다.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계속 장르소설을 읽는 이유가 뭘까요.
저의 기준으로 볼 때 평균 10~15작품 중 하나 꼴로 제가 원하는 수준의 글을 만납니다. 자주 발견한다고 느끼는 분도 계실 것이고, 너무 기준이 높은 거 아니냐는 분도 계실 겁니다. 어쨌든 사실이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비용 대비 효율이 너무나 낮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봅니다. 왜일까요. 너무나 많은 글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바라는 명작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작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 개의 관문을 통과한다는 겁니다.
◇ 장르소설을 대하는 태도
이렇게 서론을 길게 끄는 이유는, 평상시 제가 장르소설을 접하며 가지는 태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전부터 좋아하던 작가분의 글이나 믿을 만한 이로부터 강력하게 추천받은 글이 아닐 경우, 불가피하게 모험적인 시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그 모험이 성공할 확률은 5~10% 정도입니다.
저는 원하는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을 읽을 때 '그래 뭐 시간때우는 셈 치지' 정도의 긍정적인 태도조차 갖기 힘들어 합니다. 그 시간 자체가 고통스럽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를 감싸쥐고 땅바닥을 구르기도 합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모험을 시도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 모험의 댓가로 얻을 단 하나의 수작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장르소설을 집어들 때마다 기대를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무립니다. 확률이 너무 낮은걸요. 물론 기대를 하기는 합니다. '5%의 기대'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운 좋으면 재밌겠지 수준입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 현실의 이야기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대라는 것은 합당한 기대효용이 존재할 때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장르소설시장에서 매 작품마다 재밌기를 기대하며 읽는다는 것은 (저에겐)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재미'를 위해서 장르소설을 읽습니다.
그러나 '매 작품마다 재미를 기대하며' 읽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딱 5% 정도 기대합니다.
제 독서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대할 수 있도록 효용을 제공해주지 않는데, 기대하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이지요. 독자는 숨겨진 명작을 찾아내기 위해 항상 눈을 빛내며 기대에 찬 마음으로 독서에 임할 수 있는 모니터요원은 아닙니다.
◇ 또 다른 쪽의 현실
장르소설 독자분들이 다른 분야의 소설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경험으로 이런 현실도 있다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 잠시 라이트노벨과 비교해보도록 하지요.
저는 소장하고 있는 라이트노벨이 원서 포함해서 대략 300여 권 정도 됩니다. 평작도 많습니다만 수작의 비율도 대단히 높습니다.(제 기준으로는 3~4할 정도) 무엇보다도 '수준이하'라고 평할 만한 작품이 적습니다. 대부분은 6000원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돈 아까워 죽겠다고 생각한 건 다섯 권 정도입니다.
전 라이트노벨을 사서 비닐로 된 밀봉을 뜯으며 두근두근합니다. 기대를 품은 채 페이지를 펼칩니다. 내 돈 6000원의 가치는 해줄 거라 믿으며 읽습니다.
저는 장르소설도 라이트노벨도 다년간 읽어왔고, 중립적인 입장이라 자신합니다. 특별히 어느 쪽을 더 편애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이 차이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요.
저라는 독자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두 시장의 현실은 다릅니다. 킬링타임용으로 장르소설을 읽는 독자가 잘못되었다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요인이 분명 존재하고, 독자의 기대치가 낮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근본적 개선 어쩌고 하는 이상론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현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글은 길어지고 논지는 찾기 힘드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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