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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이 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겠죠. 국,영,수 중심과목 외에도 국사니, 윤리니, 지리니 하는 사화과목도 교과서가 뚫어질 듯 달달달 외우고 말입니다.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노력한만큼 받지 못했습니다. 하루 10시간 공부한 자신과 하루 1시간 정도 공부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빈둥거렸던 옆의 짝과 같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왜? 시험문제가 터무니없이 쉬웠거든요. 10시간 공부하나 1시간 공부하나 누구나 쉽게 풀 수 있을만한 수준의 문제였던 겁니다.
결국 그 학생은 고민고민합니다. 앞으로도 시험이 이렇게 출제된다면(어차피 문제를 내는 선생님은 바뀌지 않으니까) 구태여 내가 10시간이나 공을 들여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학생은 고민끝에 결론을 내립니다. 앞으로는 문제 수준에 맞게 1시간 정도만 공부하고 나머지 9시간은 다른 걸 하면서 보내자고 말입니다.
현재 장르문학 시장의 상황이 위에 예시로 든 상황과 흡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책을 꺼내들어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다 보면, 작가가 노력하고 공부하고 공을 들인 작품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정교한 문장, 깔끔한 문체, 짜임새 있는 구성, 개성있는 캐릭터, 구석구석 튀지 않게 녹아들어있는 배경에 대한 지식 등등...
"아, 이 작가는 공부를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반면 어떤 작품은 눈쌀이 절로 찌푸려 집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곳곳에서 보여지는 오타, 틀린 맞춤법, 어색한 문장과 단조로운 문체, 늘어지는 구성과 개연성 없는 사건, 몰개성한 캐릭터 등등... "이거 뭐 이래?"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작품들.
문제는, 위에서 예로 든 전자와 후자의 작품이 실제 시장에서의 판매량과 독자들의 선호도를 따져보면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문피아 독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당연히 후자보다 전자의 작품이 더 잘 팔리고 호평을 들어야 마땅하건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현 장르시장 문제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문피아는 물론이고 무협, 판타지 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대가들, 90년대 후반 혜성처럼 등장한 신무협 작가군과 판타지 1세대 작가군. 그들의 책이, 소위 양산형이라고 불리는 무협, 판타지 소설들보다 월등히 잘 팔리고 독자들에게 어필했다면, 현 시장이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쓰나 저렇게 쓰나 팔리기는 매한가지. 오히려 공부하고 노력한 작품은 따분하거나 어려운 책으로 둔갑하여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쉽게 쉽게 쓰여지는 양산형 소설들의 판매량이 자신의 것보다 상회하는 그런 것을 볼 때,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또 출판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여기 한 점원이 있습니다. 사장이 보건 안 보건 열심히 일했습니다. 반면 옆의 동료는 사장이 보면 잠깐 반짝 열심히 하는 척 하다 곧 다시 빈둥거립니다. 점원은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참습니다. 왜? 사장은 자신이 옆 동료보다 열심히 일 하는 걸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은 그런 건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열심히 일 하는지, 누가 더 가게를 위해 노력하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돈 벌어들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점원은 그런 사장이 야속했고 옆의 동료는 비웃었습니다. 열심히 해도 사장은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동료의 비웃음만 산 점원은 곧 열심히 일하기를 포기합니다. 왜? 빈둥거리면서 일해도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거든요.
어느 책을 보면 오탈자가 1권에 1개 찾아볼 정도인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1장을 넘길 때마다 일주일 안 감은 머리에서 비듬 떨어지듯 오탈자가 우수수 떨어지는 책이 있습니다. 출판사가 다른가 싶어 보면 같은 출판사인 경우가 더러 있더군요. 그럼 편집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라는건데, 그런데 우스운 건 이렇게 오탈자를 일일이 따지는 독자가 주위를 둘러보면 그리 많지 않다는 겁니다. 대여점에서도 잘 나가고, 되려 오탈자 문제를 거론하면 "무협지, 판타지 보면서 무에 그런 걸 일일이 따지느냐?"며 사람 무안하게 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까요.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오탈자, 맞춤법의 문제는 개인적으로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지켜야하는 최소의 직업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의 반응이 위와 다르지 않은데 그들이라고 힘들게 쓴 글 다시 보며 오탈자 찾아내고 수정하고 싶겠습니가?
중언부언,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습니다.
요즘 문피아에서 보면 현재 장르시장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무조건 출판사와 작가, 이 두 집단에게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독자는 아무 잘못이 없고 출판사와 작가가 그런 글만을 쓰고 출판하니 독자는 그런 책만을 접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 이런 주장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비자를 우롱하고 우습게 아는 회사를 제재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그 회사 제품의 불매운동입니다. 예전 90년대 중반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주일미군이 일본 여학생을 성폭행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정부차원에서 이렇다 할 사과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그 시점부터 미국 물건 불매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 불매운동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일본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미 정부가 나서서 사과를 하고나서야 불매운동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판사가 양산형 무협, 판타지만 출판하고 작가는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고 생각되시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런 책 안 사고 안 빌려보면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독자가 다수라면, 자연적으로 양산형 소설은 도태되고 반대로 작품성 있고 좋은 소설이 다시 각광받게 될 겁니다.
어느 회원분께서 써놓으신 글을 보니 "장르시장의 주체는 출판사와 작가고 독자는 객체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종류를 불문하고, 어느 시장이건 간에 주체는 소비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진정 장르문학을 사랑하고 장르시장이 되살아나길 기대한다면, 누구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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