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말할 것 없이 판타지가 먼치킨화된 것은 무협이라는 장르와의 퓨전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먼치킨도 잘 쓰면 재미있다는 신념 아래 많은 작품들을 탐독하던 본인이지만, 점점 많은 글들을 한문장 한장면 꼼꼼히 두번세번 되씹어가며 보기보다는 눈으로 훌쩍 훝어보는 경우가 늘어남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지겨움'을 환생 또는 차원이동이라는 동일한 내러티브가 수없이 재생되는 탓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위 '잘 썼다'라고 평가되는 작품들은 있다. 이들은 어떻게 쓴 것일까? 지금 이 글에서 이들 작품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의 일부로서 지금도 존재하거나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원리를 하나 밝히자면 그건 '비밀의 미학'이다.
무협과 결합되면서 흔하게 나타난 판타지 속 장면들 중의 하나가 주인공의 수련과정이다. 동굴 속에서 기연을 얻고 무공을 수련하여 점점 강해지고 세상으로 나오는 무협의 요소가 차용된듯 하다. 많은 글들이 이렇게 시작하지만 정작 아쉬운 것은 초반의 수련과정을 통한 성장의 재미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그 뒤로 더이상 성장의 재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먼치킨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왜 성장의 재미가 없을까? 그건 우리가 주인공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다 성장해 버렸거나, 더 성장할 필요가 없을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얼마만큼 강한지를 독자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 임준욱님의 진가소전을 읽을 때의 기억이 난다. 주인공은 홀로 수련을 통해 초반부터 강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성장소설 마냥 흥미를 유지했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주인공 실력을 드러난 상황에 있었다. 즉, 부하와의 대결 직전에 불시에 드러난 주인공의 검강지경, 또는 소림사의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발휘된 나한권의 경지 등 수련과정이 아니라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주인공의 성취를 접했을 때의 돌연함에 있었다. 조금 전 추천을 요청하는 글 중에 보니 비뢰도처럼 주인공의 강함이 드러날듯 말듯하는 글을 바란다는 내용이 있었다. 비뢰도가 지금까지 인기를 끄는 것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실력, 그러면서도 해결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 긴장의 한 복판에서 이를 해결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주인공의 실력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많은 먼치킨 소설들은 이 점을 간과하는듯 하다. 주인공의 실력이 무적임이 드러난 상황에서, 어떠한 긴장이 생겨도 주인공이 실력을 드러내보이기로 결정만하면 끝나는 상황에서 사건 자체가 급박해 보일리가 없다. 아울러 그 해결과정을 자세히 볼 이유도, 여기서 짜릿함을 느낄 이유도 없다. 비밀은 드러난 직후가 가장 짜릿하다. 이미 밝혀진 비밀은 다음에 어떠한 다시 말해지더라도 짜릿함을 주지 못한다. 숨기지 못한다면, 비밀이 주는 미학적 가능성은 물건너 가버린다. 아울러 숨겨온 비밀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면, 비밀이 밝혀질 장소를 가려야 한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나이트골렘이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의 새로이 도약한 실력이 드러나는 장소가 한창 위기에 몰린 전장 한가운데라는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 숨겨진 실력이 아니라, 전장에서 실력 자체가 성장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숨겨진 실력이 있다고 독자가 알아차린다면 이미 비밀의 미학이라는 요소는 그 소설과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후다. 결국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의 실력을 숨겨라. 독자가 주인공이 실력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그리고 드러내라. 정말 실력이 필요한 장면에서 필요한만큼만. 이때 주인공의 성장이 주는 짜릿함이 최고가 된다.
그래도 먼치킨 소설을 쓰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비밀의 원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비밀은 비밀이 존재함을 드러내되, 비밀의 내용을 밝히지 않을 때 가치가 있다. 그때야말로 비밀을 알고자하는 독자의 욕망을 가지고 독자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유리한 점이 무엇인가? 독자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활용해야 한다. 비뢰도가 흥미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뭔가 숨기고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주되, 그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인지,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전혀 알 수 없게 하였을 때 주인공의 실력은 비밀로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앞서 정리한 원리와 같이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짜릿함이 극대화된다.
그러니 감춰라. 수련과정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고도 소설의 재미가 끝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라. 초반의 수련과정에서, 또는 소설 중간의 수련과정에서 모든 것을 밝혀놓고 뒤이은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그걸(주인공의 실력) 다시 또 보여주고서도 여전히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직접 쓸 능력은 없지만 더 재미있는 소설을 바라는 독자의 입장에서, 향후 작품들에 대해 기대하는 사항이라고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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