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Comment ' 16

  • 작성자
    Lv.17 태산™
    작성일
    08.07.11 20:45
    No. 1

    캬.. 마지막 부분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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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3 Delco
    작성일
    08.07.11 20:46
    No. 2

    설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설화를 떠올리다 보니 쥐가 떠오르고

    그러다 보니 전 아차산 설화가 생각나네요.

    왕이 무당에게 상자 안에 쥐가 몇마리인지 맞추라 했더니 무당이 세 마리라 했는데 열어보니 두 마리 뿐이라 처형하라 했다가 왕이 뒤늦게 쥐의 배를 갈라보라 하니 쥐 한 마리 임신하고 있어서 세 마리라는 답이 맞았던 탓에 처형장에 보냈던 무당을 다시 살리기 위해 파벌을 보냈다가 결국 그 파벌 탓에 무당은 죽고 후에 아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는 뭐... 모르는 분이 없는 설화... 랄까요. ㅡ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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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2 니어
    작성일
    08.07.11 20:58
    No. 3

    대세를 이어 저도 하나 소개합니다. 불개 설화라고 일식과 월식에 대한 설화입니다.
    옛날 낮은 없고 하루 종일 밤만 있던 한 나라에 임금은 불개라는 개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계속 되는 밤에 질려버린 임금은 어느 날 불개에게 이웃 나라의 해를 훔쳐 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불개는 날아서 이웃나라의 해를 훔치러 갔는데 해를 입에 물려다가 너무 뜨거워서 뱉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달은 뜨겁지 않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달을 물어 오라고 불개를 보냅니다. 그러나 달은 너무 차가워서 뱉고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임금은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불개들을 해와 달에 보내고 있는데 불개들이 한번 해와 달을 물었다가 뱉을 때 각각 일식과 월식이 생기는 거라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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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08.07.11 21:28
    No. 4

    '춘향전'·'별주부전'은 고구려에서 유래됐다
    안장왕의 사랑·김춘추의 탈출과 비슷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6295530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6295530
    </a>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춘향전과 별주부전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판소리와 고전 소설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놀랍게도 고구려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답니다.

    고구려 안장왕, 백제 여인 한주와 사랑에 빠져

    을밀 장군에게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는 평양의 을밀대.

    고양시 고봉산 일대가 백제의 지배를 받던 시절, 어느 고을에 한주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은 산책에 나선 한주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청년은 이윽고 한주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고구려의 태자로, 백제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몰래 정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태자는 한주에게 “내 임무가 끝났으니 이젠 고구려로 돌아가야 하오.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이 곳을 정복하고 그대를 아내로 맞이할 테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하며 백제를 떠났습니다.

    태자는 얼마 후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장왕은 쉽게 백제의 땅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한편 한주의 아름다움이 소문이 퍼지자, 백제의 태수가 사람을 보내 청혼했습니다. 하지만 한주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며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태수는 한주를 잡아다가 그가 누구냐고 다그쳤습니다.

    태수는 한주가 적과 내통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녀를 옥에 가둬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부하들에게 한주를 구해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 장수 을밀이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모하고 있으니, 공을 세우면 둘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을밀은 부하들과 함께 광대놀이패로 변장하고서 백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태수는 자기 생일날 한주를 끌어 내어 다시 청혼했지만, 한주는 다시 한번 거절합니다. 태수는 너무 화가 나 결국 한주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을밀과 그의 부하들이 감춰 둔 무기를 꺼내 무리에서 뛰쳐나와 고구려 대군이 이미 이 곳에 쳐들어왔다고 외치며 한주를 극적으로 구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한주도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밝힙니다. 마침내 왕과 한주는 다시 만나게 되고, 을밀도 안학공주와 결혼합니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양의 고봉산.

    이 이야기는‘삼국사기’ㆍ‘동국여지승람’ 등에 짧게 기록돼 있고, ‘해상잡록’ 등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이름과 사건이 일어난 배경만 다를 뿐입니다.

    신라 김춘추는 토끼의 지혜를 활용해 고구려에서 빠져 나와

    별주부전과 비슷한 이야기도 고구려인의 입을 통해 들어 볼 수 있습니다.

    642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사신 자격으로 고구려를 방문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백제가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고구려가 신라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그 제의를 하려면, 먼저 신라가 고구려에서 빼앗아 간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그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백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던 김춘추는, 도리어 영토를 내놓을 판에 이르렀으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김춘추는 잡혀 있는 동안 고구려 대신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선도해는 김춘추를 만나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동?용왕이 병이 들었는데,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낳는다는 말을 듣고, 거북을 육지로 보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만나 용궁 구경을 가자며 유혹했고, 토끼는 거북의 등을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이 때 거북은 토끼에게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토끼는 나는 신의 후손이라 간을 꺼내 씻어 넣을 수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간을 꺼내 땅에 놓아 두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다시 육지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토끼는 도망치며 “너는 어리석구나. 어찌 간이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며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김춘추는 이 이야기 속의 숨은 뜻을 깨닫고, 연개소문과 보장왕 앞에서 땅을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고구려를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리고는 토끼가 그랬듯이 땅을 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와 고구려는 더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위에서 선도해가 말한 이야기가 곧 별주부전으로, 불교 경전과 인도ㆍ일본 민담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이 밖에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온달과 평강공주, 농부 을파소가 국상이 된 이야기, 소금장수가 미천왕이 된 이야기 등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언젠가 영화ㆍ드라마ㆍ게임 등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어 우리 모두 고구려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려장은 없었다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4420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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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근세조선 3대 도적, 홍길동 & 임꺽정 & 장길산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6069929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6069929
    </a>

    무도,무예,무술의 기원을 찾아서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5377331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5377331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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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6 正力
    작성일
    08.07.11 21:31
    No. 5

    ......근데 이걸 무슨 수로 소설소재로 가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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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08.07.11 21:32
    No. 6

    고구려군,아차산 최후의 날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5556228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5556228
    </a>

    '온달의 전쟁터' 아차산, 고구려 방어시설 확인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4970709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49707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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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티아마스
    작성일
    08.07.11 21:39
    No. 7

    개울각시는 도랑선비와 혼약을 맺으려 눈먼 점쟁이에게 날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개울각시를 사모하던 눈먼 점쟁이가 온갖 살이 낀 흉한 날을 길일이라고 속인 탓에, 도랑선비는 혼인을 올리려던 그날 살을 맞아 죽고 맙니다. 그때부터 개울각시는 어떻게든 도랑선비를 다시 만나려 합니다. 손톱이 닳아 피가 나고 온몸이 찢어지도록 노력해도 산 자와 죽은 자의 길은 엄연히 다른 법. 두 번의 시도 모두 손끝이 닿을 법한 거리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세 번째로 나타난 도랑선비는 정말 자신을 만나고 싶거든 옷 궤 위에 올라서서 물명주 한 끝을 대들보에 매고 다른 끝은 고리를 지어 목에 맨 다음 뛰어내리라고 가르쳐 줍니다. 둘은 말명신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제가 써먹었던 말명신 전설입니다. 조상 제사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집에 찾아가 재액을 주는 신. 착한 신이라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면 곧 물러간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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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6 正力
    작성일
    08.07.11 21:40
    No. 8

    ......갑자기 떠오른 메이드우렁각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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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6 正力
    작성일
    08.07.11 21:41
    No. 9

    ...근데, 아무리 한국적인게 좋다고해도...남들이 모르는 한국적인건..그냥 생소한게 되지 않나요?
    우리나라는 왜 이리 민화나 전설에 대한 인지도가 낮지?
    역시..은비까비나 배추무도사, 전설의 고향이 부활해야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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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반바지
    작성일
    08.07.11 21:55
    No. 10

    코믹스를 통해 일본의 설화나 전설을 오히려 쉽게 접촉하는 요즘 추세이니 그런듯 합니다. 게다가 핵 가족화 되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어르신들과의 시간이 줄어 들면서 우리의 옛 이야기들이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 도 한몫 하는 것이겠지요....
    학교에서야...성적만 요구하니...대체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 건지....70~80년 제가 격은 학생 시절에는 춘곤증에 졸거나 수업을 지루해 하면 가끔식 선생님들 께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시며 교묘(?)하게 수업의 내용을 첨부하시기도 했는데...요즘도 그런 분이 교단에 계실려나 모르겠네요...아..갑자기 옛 은사님들이 뵙고 싶어 지네요...대부분 선생님들이 타계 하셨다는 소식만 바람결에 듣기는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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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3 카르다인
    작성일
    08.07.11 22:02
    No. 11

    우설전신...
    만약 탄생한다면 능히 베스트셀러에 오르지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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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0 아랑개비
    작성일
    08.07.11 22:31
    No. 12

    전통...
    고려장도 있지요.
    비록 나쁜 관습이었습니다만,
    고려장에 관한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아들이 자신의 늙은 어미를 지게에 이고 산속에 버리러 가는데, 늙은 어미는 아들이 산에서 내려갈때, 길을 잃지 않게, 나뭇가지를 끊어다가 길가에 뿌린다던지..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사랑과, 지혜를 옅볼수 있지요.)
    중국에서 한 사신이 와서, 숯으로 만든 동아줄을 만들라고 했을때, 산 속에 버려졌던 어미가, 찾아와 해결한 일이나.. (맞는 얘긴지는 모르곘으나, 개미와 꿀 버전도 있는듯 한데.. 무튼 이 이야기는 부모님의 무시못할 연륜과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무튼, 이런 얘기로 다른 나라에선(아시아권 빼고.. 아시아권은 고려장을 같이 했었다지요?) 모르는, 아주 독특한 소재. 그리고, 고려장이란 관습을 깨부시려는 어느 한 아이의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통과 자신' 이라는 갈등을 표현해줘도 좋은 작품이 나올듯하네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신암행어사'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좀 많이 현실적이고, 비극적이게 나오긴 하지만서도..

    아, 암행어사에 관한 이야기도 괜찮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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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4 하늘사마귀
    작성일
    08.07.11 22:31
    No. 13

    한국설화에 관심있다면
    애니멘터리 한국설화 한번 찾아보세요.
    kbs에서 예전에 방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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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08.07.11 22:47
    No. 14

    민담을 엮은 책을 갖고 있는데.. 하나 적어볼게요.. 이건 제법 하x물이군요(..)
    시골에 가난한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진것이 없는데 이 아들이 부자집의 딸이 좋다고 장가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미가 가서 부자집에 사정을 하니 부자집주인이 화가 나서 아들을 잡아다 광에 가두었습니다. 광에 갇힌 아들에게 어미가 밥을 넣어주었는데 아들은 광에 있는 쥐에게도 밥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밥이 들어오자마자 쥐가 먼저 밥을 먹어버립니다. 화가 난 아들이 쥐를 딱 때렸는데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쥐구멍에서 다른 쥐가 입에 깍지를 하나 물고 나오더니 죽은 쥐에게 까닥까닥 하자 쥐가 살아납니다. 놀란 아들은 쥐한테서 그 깍지를 빼앗았지요. 그때 어미가 오더니 큰일이 났다고 합니다. 부자집 딸이 죽어버린 거죠. 아들은 시신이 있는 방문을 닫고 병풍을 치고 자기 혼자만 들어가면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대신 살려낸다면 혼인을 시켜달라고 조건을 겁니다. 그러니 당장 승낙을 하여 혼자 들어가 깍지를 까닥이니 처녀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죠. 그 소문이 왕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마침 공주가 죽습니다; 아들이 불려가 공주를 살리고 둘째부인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공주가 죽습니다; 아들은 중국까지 가서 공주를 살려 세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는 말이 '내가 복을 타고나길 이마에서는 별이 돋고 가슴에서는 달이 솟고 배꼽에서는 해가 돋더라 이거요. 아마, 이마에서 반짝이던 별은 바로 당신, 첫째 부인이 아니겠소.'합니다. 조강지처로군요; 은근히 좋은 소재가 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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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한배달쥬신
    작성일
    08.07.11 23:25
    No. 15

    고려장은 없었다
    <a href=http://blog.daum.net/hearo9mars/4420495 target=_blank>http://blog.daum.net/hearo9mars/4420495</a>
    (이우석 부천대 강사, 중세1분과)

    고려 시대에는 고려장이란 풍습이 있어서 부모가 늘고 병들면 자식들이 지게에 엎고 갖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고려장이라는 풍습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모에 대한 효룰 강조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풍습인가? 과연 고려 시대에 이 고려장이 있었던가?

    해답부터 얘기하자면 철저히 꾸며진 이야기이다. 그것도 일제에 의해서 날조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옛날 자료 그 어디에도 없다. 순장이나 후장처럼 가축이나 노예들을 부장품과 함께 묻는 제도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부모를 산에 갖다 버렸다는 내용은 없다.

    고려시대까지 병자를 산속 깊이 내다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병자란 전염병 환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효죄를 반역죄와 더불어 매우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런 사회에서 고려장이란 풍속이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 고려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고려장이란 말은 일제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조차도 사악하기 그지없다.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든 이유란 즉 우리나라 문화재를 도굴하고자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이다. 전국을 뒤져 문화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반출하더니 급기야는 무덤의 부장품까지 노리게 되었다. 일본인이 조선인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가 힘들었다. 조선인 인부들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을 꺼려했는데 이는 한민족의 정서상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남의 무덤을 파헤친단 말인가? 예전부터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오페르트 도굴 사건 등에서도 보듯이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죄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인은 조선인의 경로효친 정신을 이용해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는데 "조선에는 고려시대부터 고려장이란 게 있었다.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못된 풍습이니 여기 묻힌 사람은 자기 부모를 생으로 고려장시킨 놈이므로 이 무덤은 파헤쳐도 괜찮다." 라는 논거로 조선인 인부를 회유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친부모를 산채로 버리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일제의 얄팍한 상술에 이용되어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들어 내게되고 이런 용어가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는 우를 우리는 범하게 된 것이다. 하루 빨리 고쳐야할 대목이다.

    고려장은 중국 그리고 인도 기로국의 기로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와전 되었다는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문제 제기가 계속되는 것중 일부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고려장이야기 그리고 지방곳곳에 나온 고려장의 증거라는 무덤들.. 같은것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리다.

    상장례(喪葬禮)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고려시기 전공자라면 한번쯤 '고려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고려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당연히 고려의 풍습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버리던 악습'이다. 이러한 악습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고려장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또한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고 알려진 무덤들도 여러군데 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고려시기에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풍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과연 고려의 장례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는 고려장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이야기는 두 가지로 구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에서 낸 문제를 숨겨놓은 늙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해결하고 고려장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아비를 산 채로 져다버린 아버지가 내버린 지게를 아들이 후일 다시 쓰기 위해 가져옴으로써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불효를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전래된 이야기이다. 앞의 이야기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뒤의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와 유사하다.

    원곡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원곡이란 사람에게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원곡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여 갖다 버리려고 생각하였다. 15살 된 원곡은 울면서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드디어 여(輿)를 만들어 갖다버렸다. 원곡이 따라가 여를 거두어오니, 아버지가 "이처럼 흉한 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하였다. 곡이 말하기를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다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깨달아,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왔다. 이후 잘 봉양하여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위의 원곡이야기는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기로국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수용·확산되면서 불경에 있는 천신(天神)이 중국으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高麗葬)으로 변용되어 고려시기에 실재로 존재한 풍속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로국이야기는 몽고의 민담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고려장터로 알려진 무덤들은 무엇일까. 고고학계의 발굴결과로는 고려장과는 무관한 석관묘(石棺墓)나 석실분(石室墳)으로 판명됐다.

    이와 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속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려장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불효가 판치는 각박한 세태를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속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고려시기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80살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기 위해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기로국이야기를 마치 우리 나라, 특히 고려의 실제 풍습인 양 바꾸어 전승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실제 고려의 장례풍속은 어떠하였을까

    고려사회에서는 매장(埋葬)과 화장(火葬)이 사체처리방식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간혹 풍장(風葬)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법(葬法)은 국왕, 관리, 일반인 등 사회계층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편의상 관리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고려시대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은 불교용어로 다비(茶毘)라고 한다. 사찰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찰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느 시일이 지나면 유골을 묻었다. 유골은 대개 석관(石棺)을 사용하였는데, 1미터 미만의 작은 판석 6매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고려장은 과연 고려의 장례풍속이었나

    일반 서민의 경우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관도 없는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였을 것이다. 또는 사체를 그대로 땅에 두고 그 위에 풀을 덮어 인적이 없는 산야에 방치해 두는 풍장이 간혹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었다.

    국왕의 경우 매장을 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재궁(梓宮)이라 하고, 재궁이 묻힌 곳을 능(陵)이라 부른다. 장례기간은 3년상의 변형인 이일역월(以日易月) 즉 27개월의 상례기간을27일로 바꾸어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려시기에도 유교식 상례절차로 상복착용 기간을 규정한 오복제도(五服制度)가 있었다. 원래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3년상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부모상인 참최3년, 재최3년에 각각 100일의 휴가를 주고 1주기와 2주기에 7일의 휴가를 주어 약식으로 3년상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관료의 백일상은 재야사족들이나 서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고려 후기가 되면 백일상이 일반화된 듯하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장례의식은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되고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서서히 유교식 상례로 변모하게 되고 결국 유교식 상례는 우리의 전통상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옛무덤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결국 옛무덤을 고려장이라 부르는 것은 소중한 옛유산을 폐륜의 상징물로 전락 시켜버리는 있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앞으로는 더 이상 옛무덤을 고려장이라 부르는 사례가 있어서는 곤란하다.

    옛무덤은 옛무덤이기 때문에 「옛무덤」 또는 「고분」이라 불러 주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바로 알고 바로 지키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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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0 아랑개비
    작성일
    08.07.12 00:13
    No. 16

    ㄴ 그렇답니다.
    저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이러니 문제가 생기는 거겠지요.
    이처럼 심각한 오해가 있는 사례가 많아요.

    이와 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속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려장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불효가 판치는 각박한 세태를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속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ㄴ저는 확대재생산이 낳은 피해자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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