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Comment ' 14

  • 작성자
    Lv.1 작은태상s
    작성일
    05.11.13 11:29
    No. 1

    워...스크롤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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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노란병아리
    작성일
    05.11.13 11:32
    No. 2

    -ㅂ-;; 머리에 쥐가 쥐가 아악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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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6 이야기맨
    작성일
    05.11.13 11:44
    No. 3

    스크롤의압박으로패스..아 이러지않앗는데 ㅠㅠ 스크롤때문에 피하다니 죄송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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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7 못난잉
    작성일
    05.11.13 11:47
    No. 4

    OTL 적인;; 스크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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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3 까나리
    작성일
    05.11.13 11:50
    No. 5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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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2 강오환
    작성일
    05.11.13 11:53
    No. 6

    스크롤의 압박
    무슨 말인지;;
    ]
    위의 그 숫자들이
    한단고기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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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운풍객
    작성일
    05.11.13 11:56
    No. 7

    훗!!!!!!!!자세히도 옮겨 오셨군요~^^한단고기라는 책( 한권이 아닌 여러권을 역은 책입니다~ 삼성기 열왕기 단군사기등등) 한단 고기가 한권이 아닌 여러권을 합한것이라는 건 알시겠죠~?? 저에게도 한권이 있었는데 빌려 주고서는 돌려 받지 못했답니다~ 한번쯤이 아니라 평생을 간직 하고 후대에 필히 물려 주어야할 책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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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 야생의사고
    작성일
    05.11.13 11:57
    No. 8

    저도 한단고기 번역본(?) - 한자를 읽을 수 없으니..ㅡㅡ; - 을 읽어봤는데... 무척 지루하고 읽기 힘들더군요.ㅜ_ㅠ

    그래도.. 읽다보면 소름이 돋고 국사 교과서에 무한한 의문이 생깁니다.
    어쩜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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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7 피플
    작성일
    05.11.13 12:08
    No. 9

    국사 책만 보면 일본에 대한 무한한 분노만..떠오을 뿐이죠..
    대체 그 (윗글대로라면) 많던 땅을 어떤 멍청한 선조들이 잃어버렸는지.
    과거로 가서 패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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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초심(初心)
    작성일
    05.11.13 12:38
    No. 10

    저게 다 맞다고는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여진족이 고구려의 후예인 것은 맞습니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민족이 세운 국가죠. 다만 조선 녀석들이 명나라를 떠받들고 별 짓을 다하니,,,;;
    그리고 청나라가 쳐들어간 나라중에, 유일하게 병합 안 된 나라가 조선입니다. 신하의 예는 취했지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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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초심(初心)
    작성일
    05.11.13 13:01
    No. 11

    다만 문제는 그것 때문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친다는 거죠.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진족을 중국민족에 포험시켰으니 그들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게 된다는...덜덜;;
    수십년 전만 해도 중국이 여진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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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血月
    작성일
    05.11.13 13:23
    No. 12

    한단고기는 좀 굴.아.가 많이 섞였다는 관점이 지금은 대세구요.

    그래도 지금 역사학계의 주류가 보는 관점은 좀 지나치게 일제식민사관에 물든 경향이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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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Personacon 깡치
    작성일
    05.11.26 20:27
    No. 13

    역사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환단고기를 접하신 분들은 아마 충격을 받을겁니다. 특히 어린 청소년들은 더욱 그럴거구요. 환단고기에는 기존에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와는 엄청나게 다른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과거에 엄청나게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었지요.

    사학계의 동향이나 자료검증능력이 안되시는 분들은 몇몇 재야사학자들의 말만 듣고서 강단사학자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식민사관에 빠지거나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위해 환단고기를 무조건 불신하는줄 압니다(뭐 저도 가끔씩 나오는 뉴스외에는 별로 사학계에 대해 아는게 없지만;;). 하지만 환단고기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불신당하는건 아니죠.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환단고기에 들어있는 헛점들과 의심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어떤 사서의 신빙성을 알아볼때는 고고학, 인류학, 문헌학, 서지학 등 많은 검증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러한 검증들에서 모두 막혀버렸죠. 검증들에서 막히니 당연히 위서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검증에서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환단고기는 오래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사서가 아니라 20세기, 그것도 26년전인 1979년에 말그대로 "느닷없이" 튀어나온 책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주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책의 내용은 여태껏 전해져오던 역사와는 완전히 딴판이고 우리민족이 과거에 위대했다는 온갖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죠.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내용이 여태껏 다른 사서에 전해내려오는 사서들과 딴판이라면 교차검증이 불가능합니다.아니 교차검증이라는것도 진서라고 밝혀진 다음에나 일마나 신빙성이 있나 살펴보는 것이므로 환단고기에는 해당되지 않죠.

    환단고기가 위서로 의심되는 다른 부분을 살펴본다면 책의 편찬시기와 공개시기 사이의 갭인데 그 차이는 무려 68년이나 됩니다. 왜 편찬직후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68년이나 지나서 나왔을까요? 일단 한가지 추측이 가능한것은 환단고기가 나온때가 일제시대라 일본에 의해 책의 내용이 말살될까봐 숨겼다는 것이죠. 일단 이것으로 대충 설명은 됩니다만 그렇다면 해방이후, 혹은 전쟁이후에 공개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1979년이라는 한참후를 공개시기로 잡았을까요? 공개자 이유립에 따르면 스승이자 편찬자인 계연수가 한갑자가 지난후 공개하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왜 계연수는 그런 말을 남겼을까요?

    일단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편집자로 알려진 계연수는 그 행적을 찾을래야 도저히 찾지못하는 사람입니다. 족보상에도 안나와있고 다른 여러가지 정황으로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뭐 인간의 행적이란게 반드시 확실해야만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계연수라는 사람이 사실은 환단고기의 제작자들이 만든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추측만으로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르는 계연수를 가상의 인물로 만들어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렇다면 왜 68년이나 지나서 공개했다는 말인가? 제일 높은 가능성은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도록 가필을 하기위해서입니다. 고고학적인 시각으로 환단고기를 보면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1940년대까지의 고고학적인 성과가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죠. 즉 누군가 1940년대까지 이뤄낸 고고학적인 성과를 환단고기에 그대로 담아서 신빙성을 높이려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겁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50년대 이후의 고고학적인 성과는 반영되어있지 않습니다(이 부분은 제가 고고학적인 성과를 아는게 별로 없어리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위의 말만 듣고;;;). 그래서 환단고기가 사실 40년대에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나온거죠.

    위의 것은 일단 공개과정에서의 의혹이고 이번에는 내용상의 문제입니다. 내용상의 문제는 무엇인가? 환단고기를 보면 누군가 후대에 이미 만들어진 틀에 역사를 끼워넣은 흔적이 너무나도 역력합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그것들을 밝혀나갈 생각인데 일단은 단군과 삼황오제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삼황오제시대란 중국역사의 시작으로 지금 현재 신화의 시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상징적인 중국의 시조로 인정하죠. 신화를 한꺼풀 벗겨보면 역사가 있습니다. 이말을 좀 변형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은 신화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신화를 통해 역사의 단면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신화자체는 역사를 비추지 않습니다. 역사를 비추는 것은 신화의 "발달과정"이지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니 헤라니 아레스니 하는 신들은 원래 상관이 없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공동체가 출현하고 그리스각국이 정치, 외교, 종교, 경제적으로 엮이기 시작하면서 신화와 신들도 하나로 엮여 지금의 그리스신화가 탄생했지요. 삼황오제도 비슷합니다. 원래 삼황오제들은 제각기 다른 부족들과 민족들의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들이 서로 정치적으로 서로 엮이게 되면서 신들역시 서로 엮여져 삼황오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오제 중 한명인 우는 노나라의 농업신인데 노나라출신의 공자가 이 신을 찬양했고 그것이 나중에 유교가 득세하면서 중국의 시조로 끌어올려진 것입니다.

    삼화오제의 신화는 한나라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사실이라 한다면 삼황오제의 신화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그것도 후세에 완성된 신화가 순서 그대로 일어나야지 환단고기가 설명이 될 수 있지요.

    단군은 어땠는가? 단군은 선인왕검이라 불리며 평양의 지방신이었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민족의 시조로 끌어올려진 경우입니다. 그전에는 민족의 시조로서 받들어진 증거가 없었는데(뭐 이건 나중에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면 뒤바뀔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는건 나중에 증거가 발견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환단고기에는 단군이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나오고 엄연한 정사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외에 정통성의 개념 역시 환단고기에서 문제가 됩니다. 현대의 한국인이 갖고있는 고조선-삼국-고려-조선-현재로 이어지는 계승의식과 우리의 역사로 포함되는 국가들의 "제한"이 완성된 것은 불과 이백년입니다. 잠시 하나로 통일됐던 신라시대(668~698) 때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된 나라"로 취급했지 그들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삼국의 역사가 고려의 역사로 모두 인정이 되었으며 고려후반에는 고조선이 정식으로 역사에 편입되었고 발해는 조선후기에야 비로소 우리역사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정통성계승의 과정이 모두 무시된체 조선말에야 완성된 역사개념을 그대로 따릅니다.

    현대의 민족개념을 고대에 그대로 적용한 것도 있습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삼황오제와 하은주를 지금의 한족에, 동이족을 지금의 한국인으로 설정한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근현대에야 도입된 민족의 개념을 고대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지요. 중국인=한족이란 개념이 시작된 때는 중국 한나라 시대이고 만약 민족의 완성을 서로의 이질감없이 같은 겨레의식을 갖는 때로 한다면 송나라때에 이르러서야 한족이란 개념이 완전히 정착한 셈입니다. 한국의 경우 한민족의 개념은 고려때 시작되었고 고려말기에 지금의 민족개념이 완성됐습니다.

    민족의 개념이 시작되기 전에는 부족과 족속으로 분열되어 그저 정치적으로만 엮여있는 "집합"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은나라는 훗날 중국인들의 시조가 되는 여러 부족들과 족속들이 모여만든 부족연합체였죠. 이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이합집산을 계속했는데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를 오랑캐니 야만인이니 하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그중에 동쪽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라고 불린 집단도 있었습니다. 주나라에 의한 은나라 정복은 연합체 내의 은의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그 주도권이 주에게 넘어가는 과정이지요. 주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은은 주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쪽의 오랑캐, 즉 동이였습니다. 중화의 개념이 완성되지 않은 이때 각 집단들은 각자의 관점에서만 상대를 바라봤으니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랑캐들이었고 따라서 연합체의 동부에 존재했던 집단들은 동이라 불린 것인데 후세에 민족주의가 출현하면서 동이족=한민족으로 동일시하는 학설이 생겨난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관점을 너무나도 잘 담고있습니다.

    위에 제가 제시한 예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누군가 당대도 아닌 후대에 이미 만들어진 이러한 틀들을 전제, 의식하여 환단고기를 썼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환단고기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가 아니라해도 이미 저러한 틀을 전제하고 의식하여 역사를 엮었다는 사실에서 이미 환단고기는 신빙성을 크게 상실합니다. 규원사화 역시 진본이 발견되었음에도 이러한 이유로 신빙성을 의심받지요.

    그외에 환단고기가 의심받는 부분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신화와 역사의 퓨전입니다. 환단고기의 지은이는 아무래도 보편적인 세계역사상 신화의 시대에 정사형태의 역사를 쓰는 것에 부담을 느낀듯합니다. 그래서 정사의 형태에 신화적인 요소, 즉 성경 등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긴 수명을 사서내의 인물들에게 적용하려한듯 하지만 결과는 상당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사와 신화의 퓨전이 되었습니다. 이건 정사라고 하기도 그렇고 신화라고 하기도 뭣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화의 역사화나 역사의 신화화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런 형태의 반신화반정사는 나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환단고기의 원전들은 모두 실제했고 계연수가 그것들을 가필했다는 말도 있지만 문제는 위에 언급한대로 환단고기는 1979년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책입니다. 그전에는 원전들의 이름 몇개가 실록에 한줄 등장할뿐 그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인용구 하나 찾아볼 수 없고 원전들의 제목조차 언급되지 않습니다. 즉 가필이 되었다해도 도대체 어디까지 가필이 되었는지 도통 알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즉 결론은 환단고기가 진서라거나 위서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간접적인 증거에 의존해야하는데 여기서 이렇듯 문제가 생기니 위서라는 의심을 받지요. 아니 사실 이정도의 증거만으로도 위서라고 불리기에 충분하지만 제 경험상 직접적으로 위서라고 했다가 매국노라느니 식민사관에 빠졌다느니 하는 다구리를 당한 경험이 몇번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선포합니다;;;

    일본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해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말도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논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왜곡이 아주 쉽다는 것을 전제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믿고싶다"

    ps 일부 재야사학자들에 의해 수밀이를 수메르, 사백력을 시베리아, 환단고기를 한단고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것들은 사서에 나와있는 것들을 음운학, 인류학, 고고학 등을 싸그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므로 굳이 언급은 안했습니다.

    another ps 환단고기를 후대에 가필되었을 지언정 진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충고 한마디는 어차피 찾아봐야 안나올 유물들을 찾느라 개고생하지말고 환단고기가 1911년에 "진짜로" 나왔다는 증거만 찾으시면 환단고기도 어느정도는 신빙성은 인정받을거라는겁니다. 1911년에 나온 원본은 분실하고 "기억"으로 복원했다는 말도 있는데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크게 의심받을 수 있는 그런 사실을 뭐가 자랑스럽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지 미스테리입니다.

    the other ps 제가 여태까지 환단고기가 진서인 증거 열가지 스무가지 서른가지를 보아왔지만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는 것들이더군요. 그것들은 나중에 환단고기가 진서로 밝혀져서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까 확인해볼때 사용할 수는 있어도 환단고기가 진서라고 증명해주지는 못합니다. 환단고기를 진서로 증명해줄 증거의 조건은 환단고기에만 나와있어야하며 79년 이후의 것이라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증거는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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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Personacon 깡치
    작성일
    05.11.26 20:28
    No. 14

    이희근<역사학자>
    오늘날 한국사 관련 교과서나 통사류 등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국가는 고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 그후 역대 왕조는 모두 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통설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는 고조선 멸망 직후가 아니라 무려 1,500여년이 지난 고려 후기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그 기록이 실려 있는 현전 최고(最古)의 문헌은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다. 과연 고조선은 한국사의 출발점인가?

    朝鮮의 등장

    “삼국유사”는 “고기”(古記) “단군기”(壇君記) 등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고조선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이에 대해 “제왕운기”도 “본기”(本紀) “단군본기”(檀君本紀)를 토대로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제(上帝) 환인의 아들 웅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가 바로 단웅천왕(檀雄天王)이다. 그는 손녀를 인간으로 변신시켜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했고 그 자식이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중국의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에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그는 1,038년 뒤인 은나라 무정(武丁)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았다. 시라(尸羅-신라)·고례(高禮-고구려)·남옥저·북옥저·동부여·북부여·예(濊)·맥(貊)·비류국(沸流國)은 모두 단군의 후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비교해 볼 때 단군의 계보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箕子 대 檀君

    먼저 한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고조선의 시조는 단군이라는 점. 그리고 단군은 신성한 존재로서 중국사에서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고 있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개국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조선 이후 등장한 역대 왕조는 모두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점은 “삼국유사”보다 “제왕운기”가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라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13세기 이전에는 한국사의 출발점을 어느 나라로 인식하였는가.

    고려 중기까지는 한국사의 시작이 기자조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문종 9년(1055) 7월조에 실려 있는 거란(契丹)에 보낸 국서중에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기자지국(箕子之國)을 계승했다.’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적고 있다. 인종 23년(1146)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 연표상(年表上)의 기사다.

    ‘해동(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 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삼국사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도 고려가 기자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고려사” 태조 16년 3월조에 실려 있는 당의 태조 책봉 조서 중에는 ‘권지 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은… 주몽의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곳의 임금이 되었고 기자가 번신(藩臣)으로 있던 옛 사실을 본받아 나의 교화를 넓히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인종 6년(1122)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도 그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선조를 기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1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 아니라 기자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기자조선이고, 우리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인식하였다.

    실제로 고조선 이후 등장하는 고대 왕조들은 고조선에서 비롯했다는 계승 의식을 지니지 않았다. 고구려와 신라 왕실은 그 기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손(天孫)임을 자처하는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졌고, 백제 왕실도 부여·고구려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이처럼 이들 왕조는 각각 독자적인 기원 신화를 가졌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지배층에게는 자신의 나라가 고조선에서 비롯한다는 계승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역시 고구려의 후예를 표방했기에 지배층에서 고조선 계승 의식이 없었다. 오히려 “삼국사기”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은 기자조선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 13세기 이전 우리 선조들에게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은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을까.

    檀君은 평양 일대 주민들의 조상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247)조에는 단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봄 2월 왕이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

    이 기사의 선인왕검은 단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단군은 평양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된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충숙왕 12년(1325)에 쓰여진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다. 여기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지금까지 남은 사람도 당당한 사공(司空)일세. 평양군자(平壤君子)는 삼한(三韓) 이전에 있었는데, 1,000년 이상 살았다니 어찌 이처럼 오래 살고 또 신선이 되었는가. 땅을 나누어 다스려 그 후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네’라고 기록하여, 단군을 평양의 조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은 평양 지역을 개척한 시조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왕운기” 내용 중 구월산(九月山)에 단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서의 사당은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보이는 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월산 삼성사는 “제왕운기”가 편찬된 13세기에 이미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새나 사슴들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비를 빌면 영험이 있었다는 점이나 그 지명이 성당리(聖堂里)로 불렸던 것으로 보아 신성한 장소로 여져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단군은 평양의 시조임과 동시에 구월산 일대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3세기 이전에는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닌 평양 일대의 시조에 불과했다. 결국 단군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도 한국사의 출발점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라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 비로소 부각됐다. 그러나 이런 인식도 이 시기에 일반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보다 늦은 14세기에 제작된 ‘조연수묘지’에서 단군을 한민족의 국조가 아닌 단지 평양의 조상이라고 규정할 정도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고, 그 시조가 단군이라고 적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인용된 “고기” “본기” “단군기” “단군본기” 등은 한민족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주하던 고조선계 일부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자료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연수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14세기까지도 평양에는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연이나 이승휴 등이 평양 일대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본기” 등을 토대로 한국사의 시작이 고조선이고, 그 시조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운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箕子東來說은 조작

    그것은 바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하니,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기자가 백성을 교화해 조선을 문명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 이른바 기자동래설은 위의 책들보다 더 이른 시대인 선진(先秦)시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기자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후 주 무왕 16년에 기자가 주 왕실에 조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서”(尙書)에도 기자가 주나라 무왕때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후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그로부터 홍범을 배웠다고 돼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기록 어디에도 기자가 동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대(漢代) 이전의 문헌들에서 기자는 단지 덕과 학문을 지닌 어진 인물로 묘사되었을 뿐 조선과의 관계, 즉 기자동래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요컨대 선진(先秦) 문헌들에는 기자와 조선의 관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한대 이후 기록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자동래설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기자동래설이 후세에 조작됐을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자는 조선에 온 적이 없다. 결국 기자동래설은 한대에 와서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중국인들은 왜 기자동래설을 조작했을까

    한 무제(武帝)는 기원전 108년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진번·임둔 두 군은 설치 20년만에 폐지되었고, 그 일부 지역은 기원전 82년에 낙랑·현도에 통합되었다. 더구나 현도군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75년부터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동북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 멸망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것이 기자동래설이었다. 이들은 당시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조선을 항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중국인인 기자를 조선의 통치자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이런 조작의 기저에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대 중화주의자들은 기자동래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설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즉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한대 이후에 편찬된 역사서에서는 갑자기 기자동래설 관련 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후한서” “동이열전”의 “옛날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에 피난하였다.… (기자로 인해) 동이(東夷)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3방(三方 : 西戎·南蠻·北狄)의 풍속과는 다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분연히 9이(九夷)에 가서 살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이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라는 기사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풍속이 어지러워지자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문명국가로 그릴 정도였다.

    고려의 箕子 신봉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후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고려 숙종 7년(1102)에는 예부(禮部)에서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자에 대한 제사가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고려 왕조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삼국사기”는 기자가 주 왕실의 봉함을 받은 뒤부터 우리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게 이르렀다. 즉, 국가차원에서 기자조선은 한국사의 출발점이며 그 시조인 기자가 민족의 시조임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때 와서 한대 중화주의자들의 견해를 토대로 기자를 국조(國祖)인 동시에 문명을 개화한 군주로 인식하는 소중화주의자들의 기자상이 성립되었다.

    고려 후기의 소중화주의자들도 기자동래설을 그대로 믿었다. 그 단적인 사례는 이승휴가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신의 저서 “제왕운기”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郡王開局年代)편 첫머리에서 ‘요동에 별천지가 있사오니 중국 왕조와 두연(斗然)히 구분되며… 경전착정(耕田鑿井) 어진 고장 예의 집, 중국인들이 이름지어 소중화라’고 자랑스럽게 노래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연의 경우도 이런 사고방식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흔히 일연을 김부식과 달리 자주적 인물로 알고 있는데, 그 역시 소중화주의자에 불과하다. 이는 그의 “삼국유사” 서술 방식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단군계의 국가활동보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한으로 연결되는 중국계의 국가활동을 더 큰 비중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마한은 기자조선의 후예가, 진한은 진나라의 유민이 세운 것으로 기술하는 등 삼한의 주도세력을 중국계로 파악한 것은 일연의 소중화주의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모든 사실을 기술할 때 그가 신봉한 중국측 기록을 주요 자료로 삼고, 국내 자료는 이를 보완 설명하는 주석으로 처리하는 정도로 이용한 것에서도 그의 소중화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일연이나 이승휴와 같은 소중화주의자들이 기자동래설을 신봉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화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오히려 자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 문화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우리의 문화수준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조선의 등장

    이런 의식을 지닌 일연 등이 우리나라도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부터 존재했던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자랑스러운 나라였다고 전하는 ‘고기’ 등의 기사에 주목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더욱이 마침 중국의 이상적인 제왕인 요와 순(舜)의 관계처럼 단군이 기자에게 선양했다는 기사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왕운기”는 “본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단군은)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을 지나 하(夏)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028년. 그 조화 석제(釋帝)이신 환인의 유전한 일. 그뒤 164년에 어진 사람(기자) 나타나 군(君)과 신(臣)을 마련하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과 기자의 선양관계를 보다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 즉위 50년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한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이렇듯 일연과 이승휴는 평양 일대 고조선계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등을 토대로 공자가 이상적인 인문(人文)의 시대를 열었다는 첫 성군(聖君)으로 칭송했던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가 건국되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요순의 관계처럼 단군에게 선양받은 기자에 의해 우리나라가 중국과 같은 문명국가, 즉 소중화가 되었다는 자랑스런 역사상을 성립시켜 놓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고조선 이후 등장한 나라들은 단군과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고기” 등을 따르더라도 부루와 주몽은 단군과 1,000여년 이상의 시차가 있고, 그 사이에 기자·위만조선이 존재하였기에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관련지을 수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역시 ‘단군기’ 등 단군 관련 기사가 실려 있는 고기(古記)류가 고조선계 일부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결국 일연은 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된 고조선계 일부 유민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부루나 주몽을 단군의 후손으로 만들어 버린 전승 기록을 토대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소화중주의자들은 왜 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 아닌 평양 일대 일부 주민의 전승기록을 근거로 한국사의 시작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이었다는 고조선상을 창출했을까. 그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승휴는 “제왕운기” ‘충렬왕조’에서 ‘천자의 누이가 대궐 살림을 맡고, 황제의 외손자가 세자(충렬왕)로 되니 조상으로부터 물려온 왕업이 다시 빛나네’라고 노래했듯 그 자신이 살던 시대를 고려 왕조가 중흥할 수 있는 시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세기를 원나라의 후원을 토대로 무신정권기를 마감하고 왕권복고를 이룬 고려 왕조가 계속 번영할 절호의 기회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당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정상적 사대관계가 아니었다. 사실상 고려는 원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원나라는 일본 정벌때 고려에 전함을 비롯한 군수품만이 아니라 군사 동원까지 부담시켰고, 철령(鐵嶺)과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땅을 빼앗아갔다. 또한 원 조정은 내정간섭을 일삼고 각종 명목으로 엄청난 공물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수천명의 고려 처녀들을 공녀라는 이름 하에 징발해 갔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승휴나 일연 등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잘못된 사대관계를 시정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것은 고려 왕조가 원과의 정상적인 사대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30여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심점을 필요로 하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연과 이승휴는 새로운 역사상을 창출하였다. 즉, 우리 역사는 중국사에서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고 있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한 내력을 지닌 단군이 개국한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고려를 비롯한 고조선 이후에 등장한 역대 왕조들의 정통이 모두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상인 것이다. 그것도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 문화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었으므로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우리의 문화수준도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는 소중화라는 것이다.

    결국 고려 왕조는 이런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만큼 원과의 관계에서 독자적 지위를 유지할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려 왕조는 원과의 사대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휴는 원종 15년(1274) 원나라에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갔을 때 세자(충렬왕)로 하여금 원 세조를 설득하여 고려가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

    朝鮮이 고조선을 공인

    이렇게 고려 후기에 일단 성립된 고조선상은 조선에 와서 더욱 확고해졌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원년 8월 경신조에 따르면, 조선 왕조에서는 개국 직후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므로 사전(祀典)에 등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정식으로 제사를 모시자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단군의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공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동안 받아들여지지 않다 태종 12년(1412)에 이르러 실행되었다. 이때 단군 제사는 단군의 도읍지로 여긴 평양에서 거행됐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기자는 국가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단군은 평양이라는 한 지역의 시조로 간주돼 국가 제사에서 제외되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단군은 비로소 국가의 제사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단군을 모시는 제사는 기자의 제사보다 격이 낮았다. 우선 기자사(箕子祠)에 단군이 합사(合祀)된 까닭에 기자는 좌북남향(坐北南向)하고 단군은 배동서향(配東西向)하였다. 또 기자에 대해서는 제전(祭田)이 따로 있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두번 제사지냈으나 단군에게는 제전이 없었고 봄·가을에만 제사지냈다. 그러다 세종 11년(1429)에 와서 독립된 단군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사는 봄·가을에만 올려 여전히 기자보다 제사의 격이 낮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단군조선은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존재가 된다. 성종 6년(1476)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성종 15년(1484)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이 바로 그 사서다. 이 책들은 국가 차원에서 편찬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인들의 역사인식에 미친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가령 명종때 박세무(朴世茂)가 편찬한 어린이용 교재인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도 단군이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기록된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결국 “삼국사절요” 등 관찬 사서들을 통해 고조선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는 역사상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기자가 단군보다 더 추앙받았다. 예컨대 조선의 국명부터 기자의 고국(故國)이라 하여 조선으로 채택되었다. 태조를 도와 조선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호를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조선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기자가 주 왕실에 의해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진 것, 기자가 홍범과 8조범금을 보급하여 그 문화적 업적이 뛰어났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태종 때의 제사의 격도 그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마침내 성종대에 들어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한 사림파가 대두하면서 기자 숭배는 극단화되었다. 즉, 기자는 이들에게는 명분과 의리의 구현자, 조선 도학(道學)의 시조, 왕도정치의 실천자일 뿐만 아니라 공자·맹자·주자와 같은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져 그에 대한 극단적 숭배가 행해진 것이다.

    箕子와 기자조선이 중시되다

    성종 1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서는 단군조선은 극히 소략하게 다룬 데에 비해 기자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 체계를 서술하였다. 기자-마한 중심의 역사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 그것이다. 17~18세기의 주자학자들이 이른바 ‘삼한(마한) 정통론’을 들고나오면서 단군조선은 국사 체계에서 재차 서자(庶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까지도 기자는 단군보다 더 추앙받았다. 이런 역사상은 일제시대에 와서 완전히 바뀌었다. 이때부터 중국인인 기자는 아예 무시되고 단군이 국조임은 물론 민족의 상징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원인이 민족정신의 쇠퇴에 있고, 그것은 사대주의에 의해 민족의 독자성이 침식당한 것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외래 문물의 영향이 적었던 상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는 단군과 고조선 연구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고조선상은 현재의 일부 역사학자와 재야학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자들은 한국사가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그 시조가 단군이라는 대전제는 인정하지만 부수적 문제들에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가령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라든가, 그 중심지가 요하 유역이 아니라 현재의 평양이라는 것 등이다.

    요컨대 고려 중기까지 고조선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은 평양 일대의 시조에 불과하였다. 단군이 민족의 시조이며, 그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이 한국사의 시작이라는 고조선상이 성립된 시기는 고려 후기에 가능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런 역사상은 마침내 국가 차원에서 공인받기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성립된 고조선상은 사실(史實)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소중화주의자들의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20세기초 이러한 단군상은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다시 복원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자신들이 배척해야 할 소중화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해 단군조선은 말 그대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주류 역사학자들은 그들 견해의 정당성을 실증사학에서 찾으면서도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고조선 관련 기사의 성격 등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한 채 고조선의 건국 시기나 그 중심지가 요동인가, 평양인가 하는 등의 현상적 주제에만 천착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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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제가 나름대로 지지하는 펌글이고 제 의견을 첨부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실증을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이성적인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 시작점은 동사강목입니다. 하지만 그 실증이라는 것도 아직은 걸음마수준이다 보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게 "대개 《삼국유사(三國遺事)》란 고려의 중[僧 일연(一然)을 가리킨다]이 지은 것이요, 《고기(古記)》 또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이속(俚俗)의 호칭에서 나와 고려 때 이루어졌으니, 역시 중의 편집일 것이다. 그러므로 허황한 말을 부질없이 많이 하여 그 인명ㆍ지명이 불경(佛經)에서 많이 나왔다. 여기에 이른 환인 제석 역시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타 이른바 아란불(阿蘭佛)ㆍ가섭원(迦葉原)ㆍ다바라국(多婆羅國)ㆍ아유타국(阿踰陁國)의 따위가 모두 중의 말이다. 신라ㆍ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 심지어는 이같은 것을 정사에 엮어, 한 구역 어진 나라를 모두 괴이한 무리로 만들었으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이런 것이 한계였습니다. 사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여 옛 사서들이 하는 말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지요.

    그뒤 고증법이 점차 발달하여 여러 학설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제가 체계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그리 깊지 않다보니(전 전쟁사가 좋습니다;; 전쟁사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가 얼마나 따분한지 아시는 분들은 이해하살 겁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점점 신화 등을 실증적으로 고증하는 방법이 발달해 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숙종 때 나온 규원사화는 실사라 보기에는 문제점이 많지만 단군을 일인의 이름이 아닌 군주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본것을 볼때 조선후기 고증법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의 예는 규원사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환단고기에 단군이 군주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조선시대 실증과 고증학적인 의의로 봐야지 아직 아무런 고고학적인 증거도 없는 이상 단지 그것만으로 환단고기의 가치를 논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ps 디씨에 다른 사이트로 링크된 글이 있길래 가봤더니 누군가 어제(그저께ㅡㅡ?) 올렸던 환단고기관련글을 퍼갔더군요.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저와 그 글을 타당한 반론도 못하면서 한창 씹고있더이다;; 거기 사람들 극성이던데 혹시라도 여기로 몰려오면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이유를 제공한 서봉덕님과 질풍님 탓이에요-_-;;;

    another ps 위에 김부식과 일제가 사서들을 불태웠다는 말이 있는데 일제에 관한 얘기는 <a href=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1&banner=&sn=off&ss=off&sc=on&keyword=삼걸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321 target=_blank>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1&banner=&sn=off&ss=off&sc=on&keyword=삼걸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321</a> 이걸 참고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일제가 사서들을 안태웠다는 말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며 흔히 알려진 분서된 20만권은 이런것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한것이 단재선생께서 김부식이 옛 고서들을 불에 넣었다는 말씀인데 과연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그냥 심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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