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Comment ' 35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2:05
    No. 1

    위의 단어중에 "가우리"라는 말이 있죠. 제가 배운 바로는
    가운데의곳. 즉 중국이란 뜻입니다. 한자로 음그대로 쓰면
    고구려가 되구요. 고구려는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웅지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즉, 원래 중국이란 말은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하였고
    당시의 강력한 고구려의 그늘에 가려있던 한족들이
    이말을 차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 지금의
    한족과 여러 이민족 대대로 중국이란 말을 쓰기시작했다는군요.
    그리고 현재의 중국에서 중국이라는 말이 등장한 시기는
    매우 늦습니다. 옛 고서에는 중국이란 말 자체가 없죠..
    세계지도를 펴보면 위치상 세계의 중심이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라는것을
    알수있죠...

    그냥 왜 가우리가 고구려인가 하고 궁금해하실거 같아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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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오수영
    작성일
    05.05.14 12:08
    No. 2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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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3 청풍야옹
    작성일
    05.05.14 12:11
    No. 3

    근데 솔직히 말해서...고구려는 요동의 패자일뿐... 중국 중원의 패자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시아의 최강국은 항상 중원을 지배 했으니깐요... 너무 머라고는 하지 말아주셈... 윗분이 고구려의 그늘에 가린 한족이라고 해서... 그시대에는 중국땅에 나라가 많아서 고구려와 인접한 국가만이 고구려의 그늘에 가리지 않았을까 하는생각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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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3 청풍야옹
    작성일
    05.05.14 12:13
    No. 4

    그리고..저기 이름 좋네요.. 몇년후에 자식을 낳으면 남자아이는 이든 으로 여자아이는 단미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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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백호(白虎)
    작성일
    05.05.14 12:22
    No. 5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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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2:24
    No. 6

    청풀야옹님! 그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때문에 보이는 오류입니다. 중원이라는 말 자체가 나온지가 얼마 안되었습니다.
    현재의 중국땅에 당시에는 여러나라가 있었지만 항상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는나라들은 당시의 실권세력이었고
    통일국가인 수와 당 역시 고구려의 막강한 영향력에
    기를 펴지 못하였습니다. 침략하려다 망한 수나라나
    망신당한 당나라를 보아도 알수 있지요.
    당시의 한족에겐 고구려가 "목에 칼을 겨눈채 서있는 암살자"와
    같은 존재 였을겁니다.
    그리고 역사란 최후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는것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전세계의 시조이고 모든역사의 뿌리인양 하는
    일부 학설도 배제해야되지만 반대로 우리나라의 지금 처지만으로
    과거까지 재단하려는 사관 역시 멀리해야겠지요.
    지금의 중국과 같은 관점을 같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때부터입니다.
    소수민족개념으로 보아도 원나라때 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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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2:24
    No. 7

    어느 민족이든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 자신들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고 믿죠.

    그걸 이유로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변방을 자처하는 것도 한편의 개그입니다.

    휴 ... 좋은 단어는 많은데 쉽게 쓰기가 만만치 않겠네요. 필력이 ... 물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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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2:30
    No. 8

    6번 아즈라엘 님 글에 찬성 하는 의미에서

    과거 당태종 이세민 이전 중국은 흉노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형식적으로 보일진 몰라도, 송이 금에게 조공을 바치며 화친을 한것과 같은 의미죠. 제발 쳐들어 오지 마세요.)

    이세민이가 스스로 천가한이라고 하며 기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황제보다 "칸"이 더 쎕니다 -_-;;;. (최소한 무력은)

    원대에도 중국 ... 개박살 나죠? 아즈라엘님 말씀 하신대로 중국이 본격적으로 잘난 척 하는 건 명대 이후죠. 삼국지 보면 그때도 존심 똘똘로 생각하시기 쉬운데, 그거 후대 소설가가 다 구라 떤거고요. 쳐들어 오지 말라고 여자 바치고 회유하고 합니다. 그 유명한 미인 왕소군이도 흉노 분열 시킬려고 바쳤습니다. -_-;;;

    명대 이전을 배경으로 ... 중화 수복이 아닌 내용의 무협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면서 ... 쿨럭~

    추) 그런데 아즈라엘님 ... 가가멜은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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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2:34
    No. 9

    헉! 가가멜은 제가 국끓여 먹어버렸다는...스머프랑 함께 먹었습니다.
    스머패트는 마누라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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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2:41
    No. 10

    한가지 더! 위에서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지요.
    큰나라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쿠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로다" "하찮다" "(물건이)촌스럽다" 는 뜻입니다.
    즉, 백제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서
    당시 옛 왜국에서는 백제의 도래물품만이 진실한것으로
    믿었고 좋은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백제것이 아닌 물건이나 상품에 대해서
    쿠다라나이..라고 하면 싼물건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지금의 하찮고 변변찮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마치 지금의 독일차가 좋고 일제 디카가 좋다고
    할때 독이차가 아니네..일본디카가 아니네라는
    표현이 별로인차,,별로인 디카를 나타낼수 있는것처럼 말이지요.

    당시 일본에서의 백제의 위상을 간단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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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5 엠보돌
    작성일
    05.05.14 12:41
    No. 11

    중국이 고구려에 기를 못펴고 있었다기보다는... 서로 더 강하다고 할 수있는 처지가 아니었죠...

    어차피 고구려도 북위, 수, 당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습니다..

    그건 중국측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수나 당이 고구려를 치려고 했던건 거기서 우위를 찾기 위함입니다...

    인구수로보나 영토로보나 우위인 중국인들의 오만한 자신감이죠...

    결코 고구려가 중국을 압도하진 못했습니다...

    물론 자부심을 가지는건 좋지만... 너무 과장된 사실을 그대로 믿는건 좀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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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 촌백수
    작성일
    05.05.14 12:48
    No. 12

    마치..
    논검으로 옮겨야 할 듯한 분위기로 글이 흐르네요 ... -_-;;;;;;;;;;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위에 마루...
    마루가 하늘의 한글이라고 하셨는데...
    하늘 자체가 이미 한글 아닌가요?
    근데 마루.. -_-??

    어떤거죠? 두개로 불린 건가요? 아니면 조금은 차이가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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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5 엠보돌
    작성일
    05.05.14 12:54
    No. 13

    마루는 하늘의 순 한글말이 아니라 그냥 예전에 하늘을 지칭하던 단어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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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수]설화
    작성일
    05.05.14 12:54
    No. 14

    듣기좋은 우리말에 대해 쓰신 글에서의 토론은~ ^^;;;
    이제~ 그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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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2:58
    No. 15

    당시 여러나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고구려는 유일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당시의 중원의 패권을 여러
    나라들이 다투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이미 지금의 만주와 일부한반도
    일대를 통일한 셈이죠.
    과장된사실을 믿는것이 아닙니다.
    후의 통일제국인 수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고 당과의
    전쟁에서도 역시 승리하였습니다.
    고구려 내부의 문제로 인해 멸망을 자초하였지만
    그것은 마치 한순간의 몰락이었습니다. 마치 발해의 멸망이
    의문인것처럼...
    그 이전의 고구려는 분명한 동아시아의 패자였고
    스스로 중국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역사에서야 현재 중국의 관점으로 보면 당나라가
    패자인듯보이지요.그러나 그 당 역시도 이정기(본명:이희옥)가
    산동일대 16개주를 통일하고 제나라를 세워을때
    꼼짝없이 몰라할뻔 했습니다.
    재수가 좋은건지 하늘이 보살핀건지는 모르지만 이정기가
    급사를 하는바람에 당의 운명이 살아난것이죠.
    그리고 이정기는 고구려인입니다. 이미 고구려가 망한상황에서도
    고구려인의 입지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당나라나 수나라가 제대로 패자의 위치에 올라서본적도 없고
    있었다 해도 극히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후에 발해로 인해 당역시 요동,만주에 대한 실효권을 상실했구요.
    고구려가 북위,수,당을 확실히 압도 했음을 알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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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3:03
    No. 16

    마루도 하늘이라는 뜻이지만 좀더 폭넓은 의미입니다.
    하늘은 말그대로 우리위에 있는 하늘을 말하구요.
    마루는 그 뜻과 더불어 온세상,우주등의 포괄적 의미입니다.
    과거의 선조는 조금 다르게 구분하여 사용한듯합니다.
    그런 글은 지금도 찾아보면 많으니까요.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마루치,아라치도 그런 의미의 차용어가 아닐까요?
    이상 태권브이를 사랑하는 아즈라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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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3:08
    No. 17

    그리고 확실히 정해진 학설은 아닙니다만 제가 배운바로는
    하늘의 뜻은 환하다 밝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보아
    태양이 떠있는때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하늘을 말하는것이
    라고도 하더군요.마루는 그런구분없이 하늘을 말하는것이구요.
    지금의 대한민국의 국호를 지을때 차용한 것이
    韓이 나라한이긴 하지만 밝다는 소리글인 한..한을..하늘의
    소리대로 부른것입니다. 그래 대한민국은 "크게밝은나라"입니다.
    일본이 태양의 종주국임을 뜻한다면 대한민국은
    그 태양마저 감싸안고 있는 하늘나라인셈이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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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0 백린(白麟)
    작성일
    05.05.14 13:13
    No. 18

    고구려 장수왕이 사망했을 때, 북위의 효문제(아시겠지만, 짱개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황제 중 하나입니다.) 가 상복을 입고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며칠이더라... 3일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 이건 제후의 풍습입니다. 물론 북위가 고구려의 제후국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만큼 고구려가 강했다는 말이 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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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서비
    작성일
    05.05.14 13:18
    No. 19

    두달수//두가지만 정정합니다.

    이세민이 스스로를 천가한이라 칭한 것은 황제가 칸보다 쎄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혈통이 한족이 아닌 유목민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위의 척발씨는 선비족, 북제의 우문씨, 북주의 고씨는 강족계열이고, 수의 양씨와 당의 이씨는 한족출신이긴 하지만 5호16국시절부터 북조의 귀족이 되면서 꾸준히 호족과 혈연을 맻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북위말기에 성립하기 시작한 관롱집단, 이들은 호한혼혈로 관중에 거주한 귀족집단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당의 전신인 수, 수의 전신인 북제 모두 이 관롱집단을 바탕으로 정권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황제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죠. 동시에 북위의 정통성도 이었다는 것도 확실히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 자신이 호족의 혈통도 계승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천가한이라 칭한겁니다.
    이세민 이전에 중국이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 하는 것은 이세민 이후로 호족과 한족의 지지를 모두 얻어 흉노로 부터 호족의 계승자임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당나라는 이미 한족만의 국가가 아니었던 거죠. 장안의 국제도시로서의 명성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관롱집단을 무너뜨린 후 철저한 한족화가 진행되면서 한족 이외의 색채를 없애버리게 되었죠.

    그리고 중국이 본격적으로 잘난 체를 시작한 것 명대에 본격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기원은 송대에 근거합니다. 이전 5대10국까지도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협잡은 존재했습니다만, 한족의 우위, 한족지배의 정당성을 내세우진 않았죠. 하지만 송대 이후 요, 금, 원등의 정복왕조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 오히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서를 변조하는 것을 비롯, 온갖 위서가 횡행하게 되죠. 사서오경을 비롯한 경전들의 이본이 대거 나타난 것도 송대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오히려 민족의식이 강화되었고, 이 것이 한족 우위사상로 이어진 거죠.

    그리고 위에 수, 당이 고구려를 침입한 것을 한족의 심장부를 겨누는 위험을 없애는 것이라고 보셨는데 수,당의 체제가 호한혼합체이던 것을 고려하면, 이 것도 별로 그럴듯한 해석은 못됩니다.
    오히려 호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한 수, 당과 이전부터 초원 중앙과 동부에 걸쳐 영향력을 확보했던 고구려 간의 유목민족의 지배권을 둘러싼 정면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중국을 정확히 알아야 중국의 허실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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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3:25
    No. 20

    서비님! 훌륭하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청풍야옹
    작성일
    05.05.14 13:28
    No. 21

    저도 엠보싱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는 일본을 보고 역사왜곡을 한다고 머라하죠..
    우리나라도 분명히 역사왜곡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조잡한 편견에서 벗어 나는게
    우리가 크게 나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동북아의 최강국 고구려는
    우리나라사람들만 믿습니다....이게 현실이죠...
    수와당이 무너진 이유가 고구려라는것에는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와당이 고구려 눈치를 보았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죠...

    저에게 고구려는 동북아최강국 고구려가 아닌...

    모든점에서 열세인 고구려가 수와당을 상대로
    이긴 우리의자랑스런 선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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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3:33
    No. 22

    아 그렇군요 서비님 ... 가르쳐 줘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확히 가르쳐 주십쇼.

    그런데 스스로 호(胡)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당시 호의 위치가 단순히 허접 오랑캐가 아니라 "실력"을 의미한다는 것 아닌가요? 제가 칸이 황제보다 쎄다는 말은 확실히 어폐가 있는 것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 호가 당시에는 중국이 무시할만한 그런게 아니라는 것도 잘못 알고 있는게 되는건 아닌것 같은데... 맞습니까?

    (물론 타락한 한족 진신 세력에게야 만만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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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3:44
    No. 23

    21번 글 청풍야옹님 ... 민족적 자부심, 역사왜곡, 사대주의 ... 거기서 정확하게 경계를 잡아낸다는 것 자체가 사실 아슬 아슬 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게 위해 조금 과장된 내용이 역사 왜곡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객관적 시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외국 사가들의 입장만 반영하게 되어 사대주의가 될 수도 있죠.

    조잡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대부분 역사를 손질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별로 좋지 않은 예이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자살 한 것으로들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옥타비아누스가 암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 증거로는

    1.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할 때 사용한 독사의 독으로 완전히 죽기 까지는 최소 15분 최대 1시간 가량이 걸리는데 당시 클레오파트라가 유서를 전달했다고 알려진 장소에서 옥타비아누스 에게 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5분 거리입니다. -_-;;;

    2. 게다가 독사에게 물려서 독사가 독을 뿜을 확률은 50%,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와 두명의 시비 모두가 죽었습니다. -_-;;;

    3. 음독 역시 회의적. 거리상으로 볼 때 ... 분명 시체가 되기 전에 도착해야죠.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죽인 이유는 카이사리온이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이집트 신화의 여신을 자처한 존재라 위협적이고요.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로마에 끌고가 망신을 주려 했지만 뒷구녕으로는 자살로 위장 처리했다고 하죠.

    왜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조잡한 짓을 했겠습니까? 왜곡의 필요성 때문이죠. 황제로 등극하여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심지어 로마근처에 떨어지는 유성을 이용해 신에 버금가는 자라는 식의 증거로 활용하기도 한 대단한 선전꾼 이었습니다. -_-;;;)

    중국이나 일본이 역사 왜곡하는 것 ... 그래 너희들은 짇어라, 진실은 살아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태도가 가장 환영할 만 한 태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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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3:58
    No. 24

    서비님께 질문.

    영가에 난때 선비족 유연이 과거 의형제를 명분으로 한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대목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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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서비
    작성일
    05.05.14 14:11
    No. 25

    음... 5호16국-남북조-수당대에는 호가 실력이 있고, 이런 정도가 아니라 이미 호한의 구분이 무의미했습니다. 지배층 내부는 북위 효문제 이후 한화정책이 진행되면서 호한이 뒤섞여 있었고... 피지배층에서도 장강 이북, 최소한 위수 이북에는 북방의 유목민과 유민이 흘러들어오면서 무엇이 호한의 전통인지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죠. 한족의 중국 이런 건 그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죠. 황하 중상류와 관중일대를 지배한 자, 즉 중원을 지배하는 국가를 중국이라 불렀습니다.

    황제가 칸보다 쎄다. 누가 누구보다 쎄다는 둘 사이를 가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 당시 중원에서의 호한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죠.

    한-수,당-송-명-청 등 우리는 중국의 통일왕조만을 주로 기억하지만, 사실 중국은 분열되어 있던 시기가 더 깁니다. 민족적 우위를 주장했던 것도 지배층의 이념이었지 중국인의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돌궐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국가적 위기와는 상관없는거죠. 돌궐이 한나라를 침입한 것은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침략자의 구도보다는 그저 지역 대 지역의 양상이라고 봅니다. 초원에 의한 농경지역에 대한 정기적 물자수급 정도랄까...그런데 감숙, 섬서일대는 장안의 뒷마당 정도 되죠. 중앙정부를 지탱시켜주는 이 곳을 수탈당해 버리면 제후국들과 국력에서 격차가 생깁니다. 이걸 견디지 못한 한무제는 대규모 역공을 감행하고 호되게 당하는거죠. 뭐 이런 식입니다.
    호족은 그저 초원에서 유목하며 살았고 한족은 그 아래서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한족과 비한족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지배층에서는 당 중기 측천무후 이후 호족이 거세되면서(측천무후가 이이제이를 시작했죠.) 국민의 의식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송대의 계속된 북방민족의 침략과 맞물려서.... 입니다.

    하지만 하나 애매한 것은... 진한대의 산동, 산서 일대 동이족에 대한 한화정책입니다. 이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거도 같고, 하지만 제가 배운 것에는 나오는 바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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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서비
    작성일
    05.05.14 14:37
    No. 26

    그건....음.... 몰라요. 혹시 후삼국지? 이건 일단 가라로 보는데...
    영가의 난은 보통은 팔왕의 난에 이은 북방민족의 남하를 영가의 난이라 통칭해서 부르지만, 따지자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유연의 아들 유총이 함락시켜, 낙양 교외 영가라는 곳에서 회제를 비롯해, 회제의 황후, 태후, 신하등 3000명을 학살하죠. 그래서 이걸 영가의 난이라 부릅니다만...

    아 그리고 왜 그렇게 잔혹하게 죽였냐 하면 이건 삼국지 겜도 하면 나오는 어부라, 유표... 이들이 유연의 부와 조부인데 둘다 위와 사마씨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러니 후손이 유총이 사마씨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거죠.

    그럼 하필 왜 유연도 劉씨냐... 후한의 사성정책으로 그냥 성을 받은거죠. 그렇다면 이들도 상당히 한화되어 있다고 봐도 됩니다. 실제로 남흉노는 한나라의 제후와 다름없이 행세했죠. 그런데 이들이 초원의 기후변화로 인해 북흉노의 압박을 받으면서 서진의 위기를 틈타 산서, 섬서일대를 장악했고, 조위와 서진의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북한을 세웠죠.

    결론짓자면.. 후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은 잘 모르고... 유연이 한나라의 계승자를 자청한 것은 사성정책으로 받은 유씨을 이용해서고, 또 서진에 대한 불만감을 이용한 것도 있습니다. 조위는 쫌 낫지만 서진은 철저한 황족국가죠. 사마씨가 아니면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고, 그러한 점이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당연히 한나라에 향수를 느끼는 부류도 많았기에 한이란 국명은 상당한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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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4:42
    No. 27

    제가 질문 들인 것은 전체의 역사가 아닌 흉노 귀족인 유연이 왜 스스로 자칭 한왕(漢王)임을 주장하며 낙양을 공략하여 서진을 멸망 시켰느냐 하는 점입니다.

    서비 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시적인 내용이라 제 궁금증에 대한 적합한 답변이라고 인정해 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진의 회제나 민제는 사마씨의 정통 후손으로 각기 유연의 후손에게 조롱 받으며 살해 된 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예가 한족의 왕조라는 남조를 세웠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호 16국 초기에는 말씀하신 왕은 흉노계 학자는 한족계의 경우 뿐 아니라 성한이나 동진 같은 순수 한족계 국가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

    원이나 청의 경우도 지배 계급은 유목계 중심으로 필요에 의해서 "투항"하는 자를 사대부와 실무 관직에 썼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비 님께서 호한 구별이 없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구별을 말씀 하시는 것인지? 가령 일제 시대에 총독이 일본인이고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 일한이 구분이 없는 것인가요?

    실제로 진의 조적이라는 이는 양자강을 넘으며 "나 조적은 만일 오늘 이 강을 건너서 흉노를 멸하고 중원을 수복할 수 없다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 그렇다면 호한 공동체인 석륵의 후조를 조적은 왜 흉노라 불렀습니까?

    또한 송 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제국을 흉노나 돌궐과 같이 취급하여 오랑캐라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운 16주를 요에게 뺏긴 이후 4차례 충돌에서 조광의가 지고 양계업이 몰살 당하고 강보예가 사로잡혔지만 송은 이러한 역사를 충렬 양가장 이나 약탈후 물러간 적을 승리한 것으로 거짓 기록하여 황제 조항이 승리를 자축하는 희첩시를 짓는 것과 같이 자신의 열등감을 한바탕 왜곡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송의 "열등감 해소" 왜곡을 민족의식 고양으로 보아도 되겠는지요. (물론 양계업이 몰살 당한 것은 송의 대장군이 스스로 그를 팔아버린 부폐의 정점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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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4:49
    No. 28

    참고로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자료는 "후 삼국지"같은 가라 소설이 아니라 중국사학회가 엮은 서진 동진 16국, 남북조, 수에 역사에 대한 기록과 중국인인 백양이 79년에 지은 중국인사강이라는 중국 사가들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한국사가 자료가 있으면 좋겠는데 없어서 아쉽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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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6:27
    No. 29

    19번 서비님 글에서 -> "즉 당나라는 이미 한족만의 국가가 아니었던 거죠. 장안의 국제도시로서의 명성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부분에 대한 반론입니다.

    당이 안서(투르판), 북정, 선우, 안북(북정부터 투르크), 안동(고구려 옛땅), 안남(베트남) 이라는 6개의 도호부를 두고 사이(四夷) 를 다스렸다 (安) 함은 네 오랑캐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기미(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당겨서 지배한다)지배 정책입니다.

    사가들은 천가한의 칭호가 과거의 중화 이적론에 없는 지배 방식으로 이적(夷狄)도 교화하면 은덕을 알고 따르지 않겠냐는 당의 팍스 당 정책의 일환이라고 합니다.

    633년 옛 한나라의 미왕궁 터에서 술자리를 열어 3년전에 생포한 투르크의 힐리 칸에게 춤을 추게 하고, 남만 추장 풍지대에게 시를 읊게 하면서"호와 월이 한집안이 된 것은 자고로 없던 일이다"하며 천가한 이세민은 기뻐했다 합니다. (힐리 칸과 풍지대가 기분 좋았을 까요?)

    당은 오랑캐 장수들을 번장으로 기용합니다. 안록산 사사명, 고선지 등이 그 예이죠.

    그에 대한 반항으로 독립의식을 고양하는 투르크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의 말은 달콤하고 그들의 비단천도 부드럽다.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천으로 유혹하여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처럼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게 한다. 이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자리잡은 뒤에 중국 사람들은 재난을 불러일으킬 것을 그때 생각한다. ...

    중국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그리고 부드러운 비단천에 현혹되어, 투르크 백성들아, 너희는 많이 죽었다! ...

    이 때문에 수령이 될 만한 너희들의 아들은 중국 사람의 사내종이 되고, 귀부인이 될 만한 너희들의 딸은 계집종이 되었다. 투르크 수령들은 투르크 칭호를 버렸다. 중국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투르크 수령들은 중국의 칭호를 받아들여 중국 황제에게 예속되었다. 그렇게 50년 동안 봉사했다. 동쪽으로는 해 뜨는 곳의 뵈클리(고구려) 카간(칸)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테미르 카피그(사마르칸트의 관문) 까지 출정하였다.

    그러나 투르크 백성들은 말했다. "나는 나라가 있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내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여러 나라를 정복하는가?" 또 "나는 카간이 있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나의 카간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는 카간에게 봉사하고 있는가?" 라고 말했다. ...

    탱그리(하느님)가 힘을 주었으므로 내 아버지 카간의 군사는 늑대 같았고, 적들은 양 같았다. 동으로 서로 출정하여 사람들을 모으니 드디어 모두 700명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라 잃은 백성을, 계집종과 사내종이 된 백성을, 투르크의 풍습을 버린 백성을 내 조상의 법에 따라 또다시 교화시켰다 (이하 중국이나 주변 나라들과 전투를 해서 승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 - 몽골 오르혼 강, 빌게 카간의 비문에서"

    장안의 국제도시라는 것은 당의 입장에서이지 이민족의 입장을 100% 반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이 망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러한 "국제적인 반당 감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도 주로 북방민족.

    당의 이씨의 혈족이 북조의 성격상 유목민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죠. 말하신 대로 당 태종은 선비족의 피가 더 많이 흐릅니다. 하지만 그는 돌궐을 모욕했죠.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당 태종에게 감정이 많은 측천 무후는 당태종의 팍스 당 정책에 금을 가게 하죠. (하지만 현종이 복위하면 이것 조차 다시 무너집니다.)

    장안 자체로 들어가 보면 교역 행위는 동시와 서시에서만 엄격한 통제에 의해 거래 되었습니다. 정오에 300번 징치고 개시하고 일몰에 300번 징울리면 문 닫습니다. 매월 10일 마다 품질검사 받고 시가 장부를 관청에 검사 받습니다.

    그런데 장안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특수 하층민 (수공업자)는 철저히 통제를 받았죠. 국가 관리하에.

    "방은 뚜껑 없는 거대한 상자, 혹은 가축의 우리 따위에 비유할 수 있는데 무단으로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이 엄격하게 감시되고 규제 되었습니다 ....

    인민은 황제가 설치한 감옥을 보금자리 삼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민초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구속하는 것이야말로 천자가 그들에게 베푸는 관심과 은혜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비문의 내용과 이 내용을 접목해 보면 (물론 한족 출신의 천민도 있겠지만) 소위 6도호부 정책으로 발생한 이족 전쟁 포로들의 운명이 상상가지 않습니까? 물론 쌈질 잘하면 안녹산, 사사명, 고선지지만 손재주 좋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제도시 장안이라는 것이 과연 상업도시라는 의미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인지 국제적으로 잡아온 천민 집단을 부려먹는 곳인지 당시에 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국제 도시라고 꼭 현대의 도시처럼 여러 민족이 대등한 대우를 받고 살았을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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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17:12
    No. 30

    ^^; 이상하게 논단으로 흐르네요. 그냥 좋은 우리말로 참고해주세요.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옛 이름을 올린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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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일
    05.05.14 18:13
    No. 31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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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 비상을꿈꿔
    작성일
    05.05.14 19:14
    No. 32

    대단하시분들.......이 분들 중에 우리 사학곌를 대표하시는 분들이 나오고 우리 역사예 대한 체계적 고증이 이루어지길 바래봅니다..

    이쁜 우리말이 참많네요. 나도 자식 나으면 한번 고려해봐야곘네요.
    아직 장가도 안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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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Juin
    작성일
    05.05.14 20:09
    No. 33

    대체로 좀 촌시럽습니다.
    우리말이지만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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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 아즈라엘
    작성일
    05.05.14 20:34
    No. 34

    촌스럽나요? ^^; 촌스럽다의 기준을 어디다 두시는지요?
    익숙하지 않은것과 촌스러운것이 같은것이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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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서비
    작성일
    05.05.14 20:56
    No. 35

    늦게나마 몇가지는 답해드려야 겠죠.

    먼저 장안과 당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입니다.
    당이 북위 탁발씨를 거쳐 이씨에 의해 세워진 호한혼합체 국가라는 것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론으로 당에 잡혀와 살던 투르크 족장의 이야기와 장안의 어둠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
    실상 두가지 다 당이 북위를 모델로 한 호한혼합체 국가였음을 최소한 중국에 들어선 통일국가중(정복왕조를 제외한) 당이 그 어떤 국가보다 개방적 문화형태, 즉 친호적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당의 장안이 북위의 낙양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데, 북쪽에 치우친 궁성의 위치 - 한족의 도시에서 궁성은 중앙에 위치합니다. 주례에 나온 규칙이죠.
    궁성 뒤쪽의 열병이 가능한 후원의 위치 - 유목민족 특유의 군사국가임을 증명합니다.
    방으로 구분지어진 폐쇄적인 시스템 - 이 것은 봉쇄식 방장제라 부르는 제도로 한의 이장제와 비슷하지만 훨씬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출입을 막는 것보다는 생활전반을 통제한 것이죠. 즉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유목군사국가의 잔재이기도 하고, 농경민족으로 통제하기 위한 유목민족의 격리통치 시스템인 동시에, 방을 직업별로 구분했다는 점에서 유목민족 특유의 할당생산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이런 폐쇄적인 도시인 장안을 가축우리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하지만 폐쇄적이라는 것인 한족중심 국가라는 것으로 의미하진 않습니다.

    이족 전쟁포로들이 피폐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기대하시지만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장안의 주민들이 이족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며, 상당수의 한족으로 거주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들의 거주형태에 차이점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역거래가 중심이었던 서시와 그 부근의 거주했던 외주민들의 삶이 장안의 원주민이 거주하던 성의 동쪽에 비해서 좀더 자유스러웠다는 것이 대개 지적되는 사실입니다.

    당의 폐쇄성은 이민족의 자치를 허용하고, 입국제한이 없어 유학생을 자유의사에 의해 받아들이며, 속지와 속인법주의를 채택하였다는개방성과 혼재되어 나타나는 장안이라는 도시의 특징입니다.


    두번째는 투크크, 즉 돌궐이 당에 의해 멸시를 받았다라는 점인데 이 것은 당연합니다. 북흉노를 멸망시킨 돌궐입니다. 좋은 대접 받을 리는 만무하죠.

    당우월주의와 한인우월주의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대에는 초원과 농경의 충돌은 지역 대 지역의 충돌이었고, 유목민족의 침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5호16국 이후에는 복속이 대외정책의 중심이었습니다. 돌궐과 서남부 저강에 대한 복속정책은 동류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의 당은 제국주의라는 표현은 들어맞지만, 배타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호가 완전한 구심점은 아니었지만, 한을 표방하지도 않았다는 점이죠.

    물론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갈등관계가 존재하였습니다. 유연이 흉노족 노예 5만명을 이끌고 반란에 나선 것은 한인에 의한 피탈이 심했기 때문이지만 이런 현상이 한인중심주의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하기도 어렵죠. 선주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던 이야기이니까요.
    동이의 상이 고와 강을 노예로 삼은 것에서 비롯하여, 서주가 진인을 노예로 삼은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피정복민인 산서의 흉노, 산동의 선비, 서남의 저강족이 중원에 대거 욺겨 왔지만 이들의 위치는 노예가 아니었고, 한인과 호인의 잡거라는 표현이 통용되는 정도입니다.

    서진의 조적이 양자강을 건너면서, 흉노에 복수하겠다 말하였지만 그건 민족의 울분을 토한 것이 아닌, 기반을 빼앗긴 권력층이 내뱉은 회한일뿐이죠. 이후 남조는 단 한번도 양자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왜냐 양자강 이남에 거주하고 있던 민중들은 양자강 이북을 이민족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생각도 이념도 없었으니까요.

    즉 결론은 송대 이전까지는 민중에게 중화주의가 침투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배자들의 논리일 뿐이었죠. 그 지배자들이 한인이 되기 시작한 시점도 호의 혈통이 권력에서 멀어진 당중기 이후입니다. 민중에게까지 파급되기 시작한 것은 송대이구요.

    이건 첨언이지만 현재 중국이 지금과 같은 영역을 확보한 시점은 청대에 들어와서 입니다. 명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정책은 고립적 중화주의였죠. 하지만 팽창적 중화주의를 주창한 것은 오히려 정복왕조인 청이었고, 그 것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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