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지루한 수업을 들으면서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가능한 한 흥미로운 방식으로 저 유리창이 깨질 만한 가정을 하곤 했습니다. 갑자기 창문이 깨지고 테러 집단이 교실에 쳐들어온다면? 학생들을 인질로 잡고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면?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 있던 한 학생이 숨겨왔던 일면을 보여주면서 영웅적으로 학교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거죠...
누구나 완전히 정반대의 가능성을 꿈꾸는 기질이 있다고 가정하는 건 이따금 조우하는 여러 불합리한 인간상을 참아내도록 돕는 이해의 도구입니다. 그룹 바깥의 아웃사이더에 대해서, 이 도구는 아싸에게 테러 집단과 맞서 싸우는 학생 영웅이 왜 흥미로운 가정이 될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제이슨 역시 몇 번인가 그런 상상을 했을 법합니다. 문제라면, 그가 나신의 대머리로 이계에서 깨어나는 경우를 위해서 그가 어떤 태도를 선택해야 할지 충분히 상상해본 적 없다는 점이겠죠.
다행히 제이슨은 사교적인 인물은 못 되지만 그가 몸에 익혀 온 삶은 이계의 적과 아군을 효과적으로 분별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미로에서 깨어난 그는 얼떨결에 뭔지 모를 상태창을 안내 삼아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몬스터와 광신도에 맞서 겨우 탈출한 제이슨은 그가 살리기를 택한 친구들에게 이 세상의 구조를 익히고, 목숨을 코인삼아 이런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범인으로 남을지 선택합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선택의 갈림길은 현대에서 제이슨이 마주칠 일 없던 것이고, 보통은 독자 역시 마찬가지죠. 그래서 모험가가 된 제이슨의 행보는 독자가 지켜보기에 흥미롭습니다. 한 번 삶의 극단에 서서 살아가기로 결정한 제이슨은 이제 이 낯선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마주하기로 합니다. 정확히는, 그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내서 날 것으로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선택하기를 기다리는 일이죠. 마치 그 자신이 이계의 미로에서 그래야 했듯이요. 극단적이라고 했듯이 거기에는 신도 인간도 제외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핵인싸 이계 모험기는 핵아싸 이계 모험기와도 동의어로 읽힐 수 있는 셈입니다. 특히 적을 많이 만든다는 점에서는 후자와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제목의 성향이 한국적 트렌드를 벗어나면서도 작품의 내용에서 벗어나는 가벼움을 동시에 선택했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네요. 눈길을 끌거나, 내용에 충실하거나 어느 한쪽만 선택했어도 좋았을 텐데요.
모험가 생활 와중에 돋보이는 제이슨의 정치력이나 다른 사람들이 제이슨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 무력적으로 성장하는 제이슨의 상태창 등은 이 작품을 더욱 재밌게 만들어줍니다. 사실 YAGI 그룹의 번역작은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모험에만 충실해서 주인공의 무력을 요구하는 독자의 니즈를 잘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혹은 대리만족은 충족하지만 크게 끌리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요. 이 세계는 TRPG 게임이다가 얼마간 이 두 조건을 양립시켰다면, 핵인싸 이계 모험기는 작가가 더 나은 방식으로 작품을 재밌게 일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이슨의 캐릭터성은 무척 입체적이고, 스탯창 역시 신세계 아포칼립스보다는 훨씬 흥미롭게 채워지고 있네요.
이계의 미로는 한국식 장르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꽤 뜬금없는 인상의 시작을 선언합니다만, 작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첫사랑을 형한테 빼앗기고 인생을 이리저리 흘려보내던 제이슨이 이계에서 어떤 인물이 되기로 결심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교 관계를 빚어내기에 핵인싸라는 수식어가 제목에 붙었는지 궁금하신 분은 일독을 권합니다.
찬성: 
반대: 
리뷰가디언이란?
리뷰가디언의 활동과 혜택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