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는 두 명의 유표가 있습니다.
형주자사로 유명한 종친 유표(劉表). 그리고 채염 납치로 유명한 흉노족 유표(劉豹).
어느 유표든 지금까지 삼국지물에서 주인공으로 각광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유경승으로 시작하는 삼국지는 상상이 가능해도 남흉노의 왕자로 시작하는 삼국지는 꽤 신선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삼국지 시대는 여느 혼란기와는 달리 한족 군벌들이 이민족의 발호를 제압했던 시기이며, 특히 남흉노는 흉노 제국 부활은커녕 삼국지 내내 용병 노릇만 열심히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흔들리자 영가의 난을 일으켜 그 숨통을 끊어놓은 자들 역시 남흉노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흉노에게는 여전히 그런 저력이 있었습니다. 5호16국의 포문을 열고, 첫 번째 패자가 되고, 선비족의 적수로 활약할 만한 저력 말입니다.
본 작품이 유표(劉豹)를 주인공으로 택한 까닭은 그것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은 삼국지물의 오랜 구도를 태생적으로 벗어던집니다.
나관중이 『연의』를 남긴 이래, 삼국지는 한(漢)과 반한(反漢)의 대립을 줄기로 재창작되어 왔습니다. 원소와 원술, 유비와 조조, 제갈량과 사마의가 대결한 전장에서 목표는 늘 천하였고 승자는 늘 중원을 쥐었습니다. 제국의 경계는 후한13주보다 작아지지 않았고 세계의 범위는 기껏해야 고구려가 변수로 등장하는 선에서 멈추곤 했습니다.
그러나 흉노족의 시선에서 이 배경을 바라보면 구도는 달라집니다. 삼국지는 한(漢)과 반한(反漢)의 대립이 아니라 중원과 북방, 농경민과 유목민, 한족과 이민족의 대립으로 파악됩니다. 북방민족은 외부의 변수가 아니라 변화의 주체가 되고, 한족은 예정된 통일이 아니라 닥쳐오는 정복자를 두고 분열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리고 굳이 한족에게만 감정이입할 필요가 없는 한국인에게 이건, 네. 꽤 흥미로운 관점이죠.
그래서 이 소설은 한실을 둘러싼 명분의 정치학 대신 인간 군상의 치열한 권력욕을 강조합니다. 후한 말기의 중앙 정치보다는 한나라와 유목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더 조명합니다. 여포와 손견은 영제가 죽기도 전에 야심을 가지고 있고, 제국의 변방은 선비족을 방어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합니다. 낙양의 황제는 내우를 빌미로 외환을 키우는 권력자로, 명가의 사족들은 지방을 억누르는 중앙을 못마땅해하는 호족으로 그려집니다.
그리하여 중화의 명분을 탈피한 흉노인의 눈에서 삼국지는 한층 마키아벨리적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좌의 게임처럼 보입니다. 아직 황건적조차 봉기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기대됩니다. 새로우니까요. 전작에서도 삼국지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여럿 선보인 작가이고, 충분히 성공적이었으니까요.
이 작품은 그런 소설입니다. 삼국지 밈을 달달 외우던 현대인이 삼국지로 빙의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원숭이 손을 가진 악마가 빙의 특전을 주는 소설이기도 하고, 어린아이로 시작해 예언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클리셰를 따르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15화까지 보여준 분위기가 향후의 전개를 기대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추천합니다.
삼국지물을 좋아하시는 분들, 장르의 변주를 반기시는 분들, 흉노나 유목민을 주역으로 한 작품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감히 일독을 권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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