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카이첼
작품명 : 은빛 어비스
출판사 :
잃어버린 이름 2부 은빛 어비스.
배경은 어비스. 지옥이다.
이곳에서 악마들은 인간을 사육한다. 인간으로부터 발생하는 사념을 집적하여 ‘사념석’이라는 에너지결정체를 만들어낸다. 위버가 있는 곳은 ‘농장’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신뢰가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평등하다. 제한 없는 욕망을 품고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한에서.
기본적인 생존 자체가 열악한 여건 속에서 즉각적으로 권력을 갖는 자들은, 협력을 거부하고 배신을 일삼는 이들이다.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쉽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다 같이 나누기로 한 협약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이다. 협력을 통해 배신자를 처벌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배신자의 입장)배신해서 얻을 수 있는 물질적 보상이 그 삶의 풍요에 있어 크리티컬하지 않을 것 - (배신당한 입장)배신당했을 경우 그로 인한 손실이 삶을 결정지을 만큼 크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가 성립하고 안정적으로 운행되기 위해서는 대체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모두를 충분히 배불리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생산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은빛 어비스의 농장처럼 배신자를 처벌할 수 있는 공동체의 권위와 힘이 결여되어 있는 겅우, 배신과 사기를 통해 축적한 힘이 그 배신자를 살찌우고, 더욱 강력해진 배신자는 가장 위에서 군림하며 다른 이들을 쥐어짠다. 농장의 경우와 같이 배신을 종용하는 초월적 힘(악마)이 전체 구조를 손에 쥐고 흔들 경우 배신의 만연은 가속화된다.
주인공 위버는 이 배신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끊어낼 수 있다. 기억을 잃었지만, 그에게는 강대한 힘이 있고, 그 힘은 어비스를 찬란한 은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그 힘으로 그는 농장에 가끔씩 찾아오는 악마를 제거할 수 있고, 농장에서 군림하는 악마의 하수인을 짓밟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일시적일’ 뿐이다. 더 강력한 악마가 찾아올 것이고 이는 악마의 정점 세 악마대공을 없앨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다. 서로를 믿지 않고 배신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 태도였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찍어 눌렀던 절대권력이 영웅적인 타자에 의해 제거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그들에게 승리하는 것은 욕망이다, 라는 명제는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진리가 되었으니까. 이것은 악마를 쳐내고, 악마의 하수인을 쳐내는 것으로는 극복불가능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 신뢰가 싹트고, 협력하는 경험을 겪어가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더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그 아름다움에 눈물지어본 경험이 없으면, ‘농장’의 배신의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영웅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뿐이다. 그래서 영웅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악조건 속에서 필요에 따라 탄생한 영웅은 다시 필요에 의해 사라져야만 한다.
농장의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그 동안 살아오며 견지했던 그들 자신의 태도와 대결해야만 한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그들 자신이다.
그리고 위버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은빛 어비스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난한 문제해결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에 대해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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