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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작성자
Lv.5 보인전개
작성
18.05.03 11:50
조회
447



프롤로그 치곤 좀 깁니다. (만자 정도)


칼을 갈고 쓴 글입니다만, 어떤 점이 부족한지 제가 모르는 독자 분들의 눈에서 발견하신 부분들을 듣고 싶습니다. 



짧막하게.


“재밌어요” “재미없네요.” “흥미롭네요” “지루하네요”


이런 한마디라도 좋습니다. 지적도 좋습니다. 덧글 부탁드립니다요. 

그럼 시작합니다. 



-   Prologue   -




나는 유유자적하니 걸었다. 

내 앞으로의 인생도 그랬으면 싶을 정도로 느긋하게, 삶의 낙을 떠올리며 한걸음, 또 한걸음. 

그렇게 걷는 곳은 시야가 탁 트인 곳의 한 복판, 드넓은 바다가 한편으로 보이는 도시의 대 광장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상쾌한 바다내음과 숲의 나무향이 뒤섞여 코를 간지럽히는 건 좋지만, 아쉽게도 바다를 볼 수는 없었다. 개미집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잡스런 장비를 들고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항하라!]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인질을 풀어줘! 네놈이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시다!" 

[반복한다! 인질을 풀어주고 투항하라!] 


아. 

정정해야겠다. 저 사람들은 내게 집중하는 게 아니다. 나의 왼팔에 목을 죄인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왕이니까. 


동맥의 1mm 앞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는데 덜덜 떠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왕 답게도 위엄을 잃지 않는 위풍당당한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상황을 인지한 모양이다. 귀엽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군인이다. 각종 화기. 즉 총기류가 2열로 주둔해있고, 뒤편에는 로켓 런처 RPG 7을 든 사람들도 보인다. 당연하게도 내 머리를 겨냥한 체 위협하고 있다. 

... 한 명을 상대하는데 이렇게나 공을 들이다니, 화려하시군. 

나머지 중에서도 대다수는 제복을 입은 경찰이다. 경찰들은 차량의 뒤로 몸을 가리고 총을 겨누고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소수인 방송국 기자들이 촬영장비로 나를 찍고 있었다. 전체를 대략적으로 세봐도 천명을 넘기는 숫자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들에겐 사상 초유의 사태일 테니까. 실시간으로 방송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겠지. 

참, 위에 헬기도 떠있는구먼. 총 5대의 헬리콥터가 내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 

그들이 만든 거대한 반원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 때,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이봐! 안 들리나! 투항하라고! 테러리스트에게 협상은 없다! 당장 투항한다면 사살하지 않겠...네? 아...] 


지휘권자인 중년의 경찰은, 확성되어 쩌렁쩌렁하게 공간에 울려대던 목소리를 갑작스레 멈췄다. 그리고 옆의 한 검은 정장의 남성에게 확성기를 건넨다. 아니, 건넨다기보다 뺏기다시피 했다. 

내게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이군. 


[반역자여!] 


그래. 좋은 어감이다. 


[나는 왕실 기사단의 기사단장. 세레노다. 이방인이여! 원하는 바를 말하라!] 


... 여기서 말해봐야 안 들릴 텐데. 100미터는 떨어져 있잖아. 


[너를 죽이겠다!] 

그는 맹렬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킨다. 

[이 세계에 더러움을 행하는 너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너는 빛으로부터 영원토록 버림받으리라. 네 영혼은 영원히 빈궁할 것이며, 네 모든 과거는 파괴되리라. 인과를 이은 모든 끈이.. 

버려지고! 빈궁해지고! 파괴되리라!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것이 너의 최후이다! 더러운 반역자! 살인마! 그리고 왕 시해자여!] 

[오오오오오!] 

[선량한 우리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지금 이 순간 정의는 실현될 것이다!] 


멀뚱하니 듣고 있던 나는, 내 유일한 대화 상대인 왕에게 조용히 물었다. 


"야. 왕." 

"뭐, 뭔가?" 

"저기 쟤네들, 니가 죽기를 바라는 거 같은데? 벌써부터 나보고 왕시해자라고 하잖아." 

"그... 그럴 리가 없네! 자, 자네. 생각을 달리해보게나!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응? 어, 이건 어떤가? 지구 반대편의 섬에서, 자네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수십억 달러의 돈을 가지고 편안하게 생을 지내는 거지. 어, 어떤가? 응?" 

"아니, 그건 별로 관심 없는데. 이건 어때?" 

"뭐, 뭔가! 뭘 원하지?" 

"17번을 되살려 봐." 

"...!" 

"그가 살아난다면, 당신을 보내주지. 그리고 자수할게." 


가엽게도, 왕의 입은 그걸로 다물어졌다. 그래. 아무리 눈치가 없는 당신이라도 이러면 알아들을 것이다. 합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건지, 세레노 왕실 기사단장님께선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적인 표현들을 모조리 악다구니로 바꿔서 외쳐대고 있었다. 

그의 말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격렬하게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꼭 저 행동이 무의미하진 않다. 

아니 오히려 목적이 충분히 충족된다고 할 수 있겠지. 


여기에 왕을 인질로 삼고 대립하는 내가 이 사회에 남은 유일 무의 한 벌레이며, 악의 근원이라는 사실 말이다. 

태생부터 불행한 고아원의 아이들 수백 명을 폭행해 불구자로 만들고, 순결한 수녀들을 강간하고 유린했으며 해외에 창녀로 팔아넘겼다. 고위층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무작위로 찔러 죽이는 파렴치한 살인마였던 동시에 자신의 쾌락을 위한 살인조차 서슴지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왕을 죽여서 이 사회를 붕괴시키고 무법지대를 만들려 한다. 지옥에서 태어나 보이는 모든 것을 지옥화하려는... 


'실존하는 적 그리스도.' 


그 사실을, 저 기사단장이 직접 입으로 꺼냄으로써 모두에게 상기시켰고, 나를 죽이는 데 타당한 이유를 만든다. 

이런 걸 '합리화'라고 하던가? 그래. 완벽한 합리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근데 있잖아. 왕." 

"뭐 또, 또 뭔가?" 

"자꾸 불러서 미안한데, 너는 알고 있지?" 

"뭘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의 악독한 죄악들 말야." 


사실은, 그중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지. 


라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이내 삼켜냈다. 

그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걸까? 이제 와서? ...관두자고. 인간으로서의 격이 떨어진다. 

어쨌든, 기사단장의 말대로 여기서 왕을 죽여 왕시해자가 된다면, 나에 대한 지독한 전설들은 모두 진실로써 확증될 것이다. 

아마 저 기사단장이 가장 그 결말을 원하겠지. 악을 죽이고 정의가 승리했다-라는 반론의 여지없는 깔끔한 끝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들 중 유일하게 맞는 것도 한 가지 있긴 하다. 

바로 내가 지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운이 없는 인간들 중에서도 최강. 극도의 불운으로 모든 것을 잃은 채 태어난 인간들 중 한 명. 태어나는 순간 종말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다. 벌레만도 못한, 웃기지도 않는 운명이랄까... 

더럽다 못해 구역질 나는 나의 세상, 이 곳에서 바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자유' 


바다보다 더 크고 넓은 그것. 17번이 가르쳐 주었던, 내 유일한 삶의 의미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이룰 수 없을 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라." 


왕의 등을 발로 차내었다. 왕은 휘청거리며 앞으로 넘어졌지만, 다급히 일어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가서 내 말을 전해." 


부들부들 떨리는 머리로 겨우 고개를 끄덕거리는 왕. 희망을 주니, 그제야 비로소 공포가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세레노 기사단장. 당신의 말한 것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 그러니?" 


"그러니, 지금부터 실행해볼까 해. 피의 만찬을 즐겨보자고." 


슈욱! 난 품에서 나이프를 잡아 던졌고, 그것은 정확히 왕의 이마에 직격 한다. 왕의 옷에 수신기가 달려, 내 말이 그들에게 전혀 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왕은 즉사하여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그렇게 난 진정한 의미의 악이 되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얼굴은 실로 그로테스크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금방이라도 절망에 울음을 터트릴 듯 하지만, 묘하게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 것이다. ...고생이 많구먼. 

[왕이시여어어어어어어!!! 이럴 수가! 이럴수가아앗! 전군! 장전하라앗!] 


쩌렁쩌렁 울리는 기사단장의 명령으로서, 전투 개시의 막이 올랐다. 

그래. 시작이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이었다. 죽음이라도 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은가? -라는 멋들어진 핑곗거리를 떠올린다. 지옥에 가면 17번에게 농담 삼아 들려줄 수 있겠군. 그는 또 뭔 개소리를 하냐며 웃어젖히겠지만 말이지. 


"보아라. 나의 죄악을." 


최후의 시동어다. 

오른쪽 귀에서 나오는, 하늘거리며 날아가는 푸른 나비. 두 마리의 나비는 각각 내 양손바닥 위에 머물렀으며, 그것은 이내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길로 화하였다. 


[쏴라!] 


터져 나오는 화약무기의 발포음! '나'라는 한 점으로 쏟아지는 무수한 강철의 살상 무기가 공기를 가르는 모습도, 소리도 없이 쇄도한다. 

하지만 피할 필요도, 막을 필요도 없다. 

탄환과 로켓들은, 내 양손의 불꽃을 근원으로 뻗어 나오는 열기에 녹아내리고, 터져나간다. 무수하게 허공으로 흩뿌려진 파편, 그 하나조차 내겐 닿지 않는다. 녹아내리고, 끝내 기화되어 소멸한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이 대광장을 가득 메우는 총탄음! 

그 앞으로 난 거리낌 없이 걸어나간다.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공기 중의 수분이 증발하며 일어나는 아지랑이로 인해 뒤틀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마치 이 현실이 지옥으로 화한 착각을 방불케 한다. 


그렇게도 날 죽이고 싶어? 좋아. 놀아보자. 


오른 손바닥을 펴서 그 위에 마력을 집중시킨다. 구체형의 불꽃을 만든다. 대포알 정도의 크기지만, 폭발했을 때의 위력은 고작 그 수준이 아니다.

"간다." 


야구선수처럼 몸을 뒤로 틀었다가, 앞으로 기울이며 불꽃 공을 힘껏 내던진다! 타깃이 너무 많으니, 빗나갈 일은 없겠다. 

길게 불길의 궤적을 남기며 적진을 향해 쏘아져 나간 푸른 불꽃의 보주. 대기를 찢는 굉음을 토해내며, 군인들의 한 복판에 작렬한다. 

직격 순간의 대폭발! 공기를 찢는 폭파음이 터져 나왔다. 

".....!" 

".....!!" 

폭발에 휘말린 인간은 모조리 증발하느라 조용했고, 멀찌감치 떨어진 인간들만이 질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얼굴이다. 폭발음에 묻혀 아무 말도 들리진 않았지만, 그 창백한 얼굴 속 입모양을 보니 대충 알만 하다. ...가장 불쌍한 건, 신체 일부가 녹아내리고, 남은 전신에 불이 붙어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는 병사다. 그런 이들이 열댓 명쯤 있었다. 

폭발 후 남은 자리엔 시체의 흔적도 없이 깔끔했다. 포장된 아스팔트 바닥이 움푹 파여, 반경 20미터의 시커멓게 파인 지면이 드러났을 뿐이다. 

재호가 있었다면 왜 '청염구靑炎球'라고 외치지 않았냐고 한마디 했겠구먼. 어쨌든, 이쪽도 준비한 무기는 충분하다는 걸 알려보자. 난 양손의 위로 각각 불꽃의 보주를 만들었다. 


알겠어? 이번엔 두방이야. 


군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이, 내 눈에도 확연히 보일 지경이었다. 왜 그래? 설마, 너희가 이길 거라 여긴 건 아니잖아? 나 정도의 악을 죽이려 했으면, 너희 역시 죄악의 진흙을 뒤집어 쓸 각오가 된 거 아니었나?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푸른 불꽃. '라 다미트로이'의 위력을 처음 본 놈들에겐, 자연재해급의 임팩트일 거다. 


그래. 두려우면 도망쳐라. 고작 천 단위의 병력으로 나를 상대하려 했다니, 이건 기만이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 


인간은 존귀하다. 

사람을 죽여놓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러니 하긴 해도, 진심으로 인간의 생명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도망친다고 한들, 그 행위를 깔보고 비웃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자존심을 버리고 삶을 택하는 용기를 칭찬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정말 병신같이 용맹하게도, 그들은 총을 내려놓지 않는다. 광기 어린 눈빛으로 지금까지도 탄창을 교체하며 쏴 제치고 있을 뿐이다. 


지휘권자인 기사단장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전력의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임을. 때문에, 이 무의미한 살육전이 이어지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기자가 마이크를 들고 그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보라는 듯이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대고- 


[크아악! 이 간악한 자 같으니! 지옥에 떨어지리라!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아아아아!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이 악몽의 순간은 여기서 종말을 고하고, 평화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쏴라! 빈틈을 주지 말고 쏟아부어라!] 


-라고 외쳤다. 


... 뭐하는 짓거리냐 저 썩을 자식은. 

아아, 그래. 수많은 군인을 죽인 학살자 취급을 하기 위해, 실제로 학살을 하도록 만들겠다? 뭐 그런 의미냐? 

단지 그딴 이유로 저 병신 같은 명령에 굴복하는 게 자신의 본문이라 생각하는 멍청이들을 모조리 죽게 만든단 말이야? 


... 그래 좋아. 원하는 데로. 


허공에 뜬 두 보주를 다시 흡수한다. 그리고 오른손에 불꽃의 힘을 응축시킨다. 

항상 기술을 쓸 때면, 굳이 기술명을 만들어주었던 재호가 떠올라버린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뭐, 이미 공간에 작렬해대는 격발음 때문에 아무도 들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난 재호를 기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기술명을 외쳤다.

'휘몰아쳐라. 멸망의 인도자여' 


전신의 몸을 틀며, 오른손으로 크게 어퍼컷을 날리는 자세로, 불꽃의 힘을 비틀려 방출한다. 

해당 공간의 공기를 태우는 동시에 주변의 공기를 격렬하게 빨아드리면서 점점 불어나며 나아가는 푸른 불꽃의 소용돌이! 

집채만 한- 정확히는 10층 건물 크기의 막대한 소용돌이는, 그 자체로 비전력의 응집체다. 때문에 주변을 '빨아드리는' 힘은 일반적인 열대성 저기압 수준과는 궤를 달리한다. 

실제 허리케인과 비교하면 작은 크기지만, 이 대공원 안의 모든 생명체를 당겨오기에는 충분하다는 이야기. 

이미 주변의 나무들과 벤치, 조각상 등 잡스런 것들이 뽑혀 나와 날아오고 있었고, 굳이 그걸 육안으로 보지 않아도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람의 흐름을 저들도 인지했으리라. 그것은 가까워질수록 크게 압박을 가하겠지. 

역시 기자들은 이미 몸을 피신하고 없었지만, 군인과 경찰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그 가련한 총알로 나를 맞추면, 이 악몽이 끝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열심히 방아쇠를 당기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병신들아. 


소용돌이는 곧 적진의 중심으로 이동했고, 그리고 당겨진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날려와서, 화염의 소용돌이에 파묻힌다. 그리고 나갈 때는 공허하게 흩뿌려지는 검은 재가 된 채였다. 


그 장관을, 아무 감동도, 쾌감도 없이 지켜보았다. 

날 죽이려 한 녀석들이기에 그리 미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또 통쾌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멸망의 인도자'에 휘말려들지 않는 인간은 기사단장을 비롯한 11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능력을 개방하고, 검은 정장 차림에서 황금색의 갑주를 입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들 이외의 모든 전투원이 한 줌의 재로 산화한 후에야, 나는 기술을 거두었다.

사람으로 가득 찼었던 대 광장, 이제는 폐허에 가깝게 초토화가 된 광장이, 고요로 물들었다. 조용하 군. 인파로 가득했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었던 기사단장이 각오가 서린 눈빛으로 걸어 나오고, 그의 뒤를 10명의 기사들이 따라 걷는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 역시 고개를 치켜세우며 마주 걸어간다. 대화를 하려면 이건 방해가 될 테니, 잠시 불길은 접어두고 나아갔다. 이윽고 서로의 말이 들리기에 충분한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걸음이 멈춰졌다. 


"......" 

"......" 


분노한 얼굴로 맹렬하게 나를 노려보는 기사단장. 그것을 차분한 눈으로 응대했다. 


"비할 바 없이 악독한 사탄의 사생아여. 이 곳은 너의 무덤이 되리라." 


아 그렇군. 몰랐었네. 알려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너희가" 

"응?" 

"너희가 처음부터 나를 상대했다면, 저 병력을 잃을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 이제나 나선 거지?" 


기사단장은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는 부들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참고 있군. 어쩐지 울분을 참는 건 아닌 것 같다. 


"크하하하하하핫!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하하하하하!" 

"캬하핫." 

기사들은 이마에 손을 대고 허리를 젖히는 등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그딴 게 중요한가? 이제 곧 처절한 꼴을 한채 뒈져버릴 니 운명보다, 그게 더 중요하단 말이냐?" 

"크크크큭, 진짜 웃긴 놈이구만. 끝까지 말이야."


...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다. 

저 11명은, 비전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다. 그것도 지금 느껴지는 감각으로 볼 때 최상급이다. 

저들과 홀로 대립한 시점에서 이미 내 승률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하지만, 한 명. 운이 좋으면 두 명은 죽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 일말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나에게 잔인한 학살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군. 

상상 이상의 쓰레기들이구나. 너희들. 

나는 그들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 두 가지야." 

"아? 그런가? 말해봐라. 네 잔망스러운 유언은 또 나름의 듣는 재미가 있구나!" 

"아하하핫!" 


또 한걸음을 걷는다. 


"첫 번째.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옛말이 있지. 근데 그 주인공인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갔어. 난 연기가 날 이유를 몰랐거든." 


"그래서?"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때진 않았지만, 누군가 땠기에 굴뚝에서 연기가 난 게 아닐까. 다시말하자면, 법의 위에 선 권력자가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에 따라 삶을 살고, 그 죄를 모조리 내게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닐까?"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놓치고 말만큼의 미세한 고개의 끄덕거림. 그런 세레노 기사단장의 표정은 미묘했다. 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듯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착용했을지 모를 수신기를 대비하여 말을 아끼지만, 순간적으로 보였던 놈의 미묘한 반응은, 분명한 인정으로 보였다. 


그래. 겉으로 드러난 건 이유 없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폭주로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하지만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특정 정당의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줬다. 어마어마하게 말이다. 

목적이 분명한, 철저히 계산된 행위였다. 

덕분에, '그 정당'의 수장이었던 한 남자는 이 나라의 최고위층에 설 수 있었다.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이었고, 마지막엔 최후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을 왕마저 배신했다. 


... 그 왕시해자라는 역할마저 내가 충실하게 해내게 되었다는 시나리오.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크, 진짜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군. 

곧 이 나라는 독재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 세레노 기사단장은 크게 고개를 휙휙 저으며 명확한 부정 의사를 밝힌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 한걸음 나아간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네놈의 새치 혀가 만들어낸 어떤 핑계도 널 구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넌 그렇게 말하겠지. 모든 국민들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너도 간과한 게 한 가지 있다. 


"두 번째. 7.23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 


예상 밖의 질문에 세레노 기사단장은 오른 쪽 눈썹을 씰룩였다. 참 아이러니 하구만. 진짜 웃기지도 않았던 재호의 드립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그게 대체 무슨-"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방심해서." 


내 오른손은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였다. 

오른손의 손아귀에 푸른 불씨를 남겨두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장 재수 없는 새끼와 동귀어진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어... 어?"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가슴의 중심부위가 움푹 파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변이 검게 타버린 탓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고, 본래 그 안에서 뛰고 있어야 할 심장은 내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푸른 불꽃의 폭발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면 낼 수 있는 한계치의 스피드. 하지만 그 반발로 내 오른손의 절반은 흔적도 없이 터져나가 버렸다. 남은 건 엄지, 검지, 중지뿐. 그 세 손가락으로 놈의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그건 내..." 

"너, 전투태세에 들어간 거 꽤나 오랜만이지? 배에 기름때가 낄 만큼은 여유롭게 살았나 봐?"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지? 이게 번뜩이는 번갯불의 속도다. 

그렇다고 한들, 네놈의 감이 이 정도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막아냈겠지. 완전히 녹슬었구나. 쓰레기 새끼야. 

손에 쥔 심장을 으스러뜨린다. 순식간에 허물어져 바닥을 나뒹구는 기사단장, 마지막 순간 마주친 그의 눈빛에는 황망함이 담겨 있었다.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으며 결국 정상에 서게 되었지만, 그 과실을 한입 맛보지도 못한 체 순간의 방심으로 세상을 하직한다니, 억울해서 미치겠지? 하지만 한마디 토로조차 할 시간은 없다. 


그대로 죽어. 버러지야. 


난 놈을 향해 웃어주었다. 마음 같아선 침이라도 뱉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겠지. 


"어, 우와 아앗!" 

"캬아악! 네놈!" 


다음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초 근접 거리에서, 기사들의 공격이 내 육체를 꿰뚫었다. 뭐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파악할 겨늘도 없었다. 

뭔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날 타격하고 분리하고 관통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완벽하게 난도질을 당하며 깨닫는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구나. 


"어, 컥, 커걱..."


내 짧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아아, 이걸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달해서야 아쉬움이 남았다. 추구했던 사상, 부여받았던 임무, 구원하고 싶었던 그녀에 대한 기억까지.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이 이렇게 종말을 고하며, '나'라는 존재가 지워진다. 


죽을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뼈에 사무치도록 아쉬웠다. 

너무나도 아쉬워, 이 빌어먹을 세상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째서 난, 이토록 비참하고 더럽게 살아야 했는 가! 

결국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 채로, 모든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채로 죽을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게 하지 말란 말이야! 


근데, 

아직 아니었다. 


의식이 끈기기 0.03초 나 남았을까? 죽음을 앞두고 시간의 흐름은 영원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인적으로 귀여운 이 여성의 목소리... 


* '일곱 죄악의 노래' 중 '분노'를 활성화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망 순간, 극도의 분노로써 비전력을 운영하면, '자아 회귀'가 발동됩니다. * 


'... 뭐? 자아, 회귀? 그게 뭐야? 돌아간다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 


* 다시 만납시다. 다음번에도 꼭 저를 선택해 주시길. * 


'뭔, 차라리 악담을 해라. 내가 미쳤다고 또 너를-' 


* 기대하세요. 당신 같은 벌레에게 최적인 똥 구정물 속의 삶을 선사해드릴 테니까요 * 


'... 말을 말자.' 


그 아리따운 목소리로 끔찍한 악담을 구사하는 걸 들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Prologue Fin   -




Comment ' 7

  • 작성자
    Personacon 가상화폐
    작성일
    18.05.03 12:13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Personacon 황윤
    작성일
    18.05.03 12:21
    No. 2

    초반에는 흥미롭다 점차 지루해지는 것 같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소설씁시다
    작성일
    18.05.03 13:44
    No. 3

    저도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5 흰색코트
    작성일
    18.05.03 14:27
    No. 4

    저 역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백우
    작성일
    18.05.03 18:05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8 육감
    작성일
    18.05.03 18:37
    No. 6

    글 초반 묘사 부분이나 중요 장면은 좋아 보였습니다. 다만 다른 분들이 지루 하다고 느낄만한 부분이 있는데 혼자 생각 하는것들을 서술 하는 장면이 너무 긴것이 군더더기로 느껴 지는것 같습니다. 급박한 순간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 하고 그런 생각의 서술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보다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 보인전개
    작성일
    18.05.03 20:55
    No. 7

    답변주신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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