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 초쯤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류씨가 주인공이며 류씨의 일상이다.
류씨의 직업은 소설가이다.
배경은 2042년 배경의 근미래다.
미래에서 소설가란 직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엄연한 자격증이 있으며 취득하기 꽤 어렵고 또한 등급별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학계가 굉장히 권위적이다.
이처럼 소설가란 직업은 전문직이며 아무나 할 수 없고 대우와 존경을 받는다.
굳이 비교하자면 변호사나 의사 처럼 사회적 대우와 인식이 있다.
미래에서는 검색 엔진이 세밀하게 발달 되고 인공지능에서 음성 채팅만으로도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다.
미래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 되어 필요한 자료를 찾기가 아주 쉽다.
거진 모든 작가가 타인의 작품 속 문구를 카피한다.
소설가인 류씨 또한 그렇고 그런 작가중에 하나이다.
누구나 글을 쓸수 있는 현재와 달리 국가 공인 자격증이 있어야 소설가가 될수 있는 권위적인 문학계에서 파쿠리는 일종의 작법으로 인정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짜집기로 흔해진 문체 속에 자신만의 창의적인 묘사에 골몰한다.
그리고 작가는 평소처럼 글을 쓰다가 이것저것 배껴서 쓰면서 이건 어쩔 수 없어. 라며 자기 별명을 했다.
이런 류씨에게도 롤모델인 유명한 소설가가 있는데. 어느날 그의 소설을 읽다가 류씨는 서글프게 운다.
존경하던 작가가 본인의 글을 파쿠리했다.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갑자기 이 소설이 생각나네요.
서럽게 펑펑 우는 류씨는 왜 울었을까?
난 이 소설을 이천년도 초쯤에 읽었다.
언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날정도로 오래된 소설이다.
그리고 내가 읽었던 스쳐간 소설중에 하나인데.
최근에 다시 생각났다.
발전된 과학의 기술로 국가가 인간의 삶을 통제 하는 수준으로 지배에 가까운 통제를 한다.
건강 관리라는 명복으로 하루에 피울 담배의 갯수라던가, 몇시에 일어나는지, 아침 점심은 뭘 먹는지? 길을 가르쳐주는 네비게이션처럼 인간의 일상을 인공지능이 간섭한다.
사람들은 거기에 거부감이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창의성이 부족해진다.
그래서 창작을 작가들은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거기에 반발과 위기감이라는 찾을 수가 없다.
누가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 유행 했던 문단을 카피하는 것에서 그 작가의 필력을 인정 받는 시대로 전락한 것이다.
작중에서도 파쿠리는 패스티시 기법이라 해서 하나의 작문 기술로 일상화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이것은 지은이의 반어법이다.
2018년 파쿠리 치기 시작한 작가들은 오마쥬라 변명한다.
그것도 독자들에게 들키고 나서 마지 못해.
허구의 이야기가 진짜로 2042년에는 파쿠리는 하나의 소설 작법으로 인정 받는 끔찍한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싹하다. 이 소설의 저자는 혹, 전생자가 회귀2차를 맞이해 우리에게 미리 경고를 해준게 아닐까? 란, 판타지적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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