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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펌] 내 인생의 선생님

작성자
Lv.7 퀘스트
작성
04.11.09 09:25
조회
223

어제 아침 이글을 읽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더랬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 그 따스함을 나누고 싶어 퍼왔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오늘 그밖의 질문들에 올라온 질문 덕분에

고마운 선생님 한 분을 떠올리게 됐어요.

학교나 학원 선생님은 아니구요, 제가 다니는 안과 의사 선생님이세요.

시골에서 할머니랑 살다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서울에 올라와 낯선 생활에 적응을 했는데

오학년 때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전에 살던 동네보다 조금 살기가 나은 곳으로 새 집 사서 옮겨간 곳이라

식구들이 모두 좋아했지요.

저도 처음엔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요새 말로 '왕따'처럼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질 못하고 '전학생'답게 찌그러져 살았었지요.

저는 어디서나 명랑하고 밝은 성격인 편이었는데

5학년 때의 기억은 참으로 아프게 남아있어요.

막 사춘기가 시작될 때여서 엄청 힘든 시기였어요.

5학년 때 생일선물로 엄마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사주셨는데

제가 꼭 그 주인공 '제제'인 것만 같아 그 책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ㅎㅎ

지금 생각해보면 빙그레 웃음도 떠올릴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답니다.

또 제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만성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열도 없고 다른 아무 증상 없이 머리만 아팠는데

시험을 앞두거나 TV를 오래 보거나 누워서 오래 있거나 하면 더 머리가 아프곤 했어요.

처음엔 걱정하시던 부모님도

열도 없고 시험이나 어려운 일 앞두고 두통을 호소하니

좀 꾀병인가..싶기도 하셨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시더군요.

저는 심각한데 남들한테는 짜증만 나는... 그런 두통이었어요.

하여간 안 그래도 10살때부터 쓰던 안경 때문에 인상이 좀 달라졌는데

초등 5학년 때부터 중학생 시절 동안 제일 이마를 찌그리고 다녔던 것 같아요.

온 세상이 우울했었죠.

친구들과 어울리질 못하고 힘들던 5학년말 즈음에

안경을 다시 맞추러 새로 이사간 동네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굵은 안경을 끼신 여의사 선생님이셨어요.

시력검사를 하는데 대뜸 옆에 서계신 아버지한테

"애가 어쩜 이렇게 참하게 말을 잘해요?"

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저 저~~~~~~~~~얼대!!!! 참하지 않아요. 아주~~~ 전형적인??B형이거든요)

아버지도 당황하시면서

"아, 네...^^; "

하셨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러셔요.

"시력검사 하면서 이렇게 얘기 조근조근 잘 하는 아이 못 봤어요. 다른 애들은 '보여요, 안 보여요' 이러는데 얘는 '흐릿하긴 하지만 4자 같아요' '뭉크러져 보이긴 해도 아까것이 덜 어지러워요' 이런 식으로 말 하네요?"

그것이 새 동네로 이사가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어요.

왜냐하면 전학 이후에 저는 매일 우울해하고 성적 마구 팍팍 떨어지면서

부모님들도 쟤가 왜 저러냐.. 좋은 동네(?) 와서...하면서 저를 잘 이해해주시지 않았고...

그러면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꾸중은 많이 들어도 칭찬은 들어보질 못한... 아주 우울한 해였거든요.

그러더니 또 이런 말씀을 하셔요.

"얘, 내가 안경 정확하게 맞춰줄테니까 이제 인상 찌푸리지 말고 다녀. 웃으면 예쁠(?) 얼굴이잖니.

그리고 내가 보니까 너 나중에 큰 일 하겠다. 내가 진료하면서 환자 얼굴을 매일 들여다 봐서

척 보면 알아. 그러니까 인상 펴고 다녀. 알았지?"

그 순간, 저도 알았습니다.

제가 예뻐서도 아니고 진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신 말씀도 아니라는 것을요.

열두살이나 먹었는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습니까? ^^

그런데도 그 말씀이 싫지 않았습니다.

내가 쳐져 있으니까 일부러 기운 내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란 걸 알만큼

눈치가 빤했는데도 그 말이 은근히 힘이 되더란 말이지요.

난시가 심한 사람들은 난시각도라는 게 자주 바뀌어서

안경으로는 정확하게 교정이 안 되니까

거의 두 세 달에 한 번씩 안경알을 바꿔야했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은 어디선가 무언가를 끄집어 내어 저를 칭찬해주셨어요.

안과 갔다 오는 날은 눈이 환해지면서 발걸음까지 깡총거리며 돌아오곤 했지요.

그러면서 가슴 속에서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는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걸 스스로 느꼈어요.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느낌이었어요.

몸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뜨끈하게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그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솟아오르곤 했죠.

그러면서 시나브로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우리 엄마였으면 매일 볼 수 있어서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요.

그러다가 중학교 올라가서

더이상 안경으로 교정하는 데 한계가 오니까

제게 하드렌즈를 권해주셨어요.

그러면서도 막 제 칭찬을 늘어지게 하시면서

"너는 다른 아이들하고 다르니까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무한테나 렌즈 안 권한다, 너."

하시는 거에요.

사실 하드렌즈가 처음 적응할 때 엄청 힘들거든요.

시도한 사람 중에 30% 정도만 성공한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는 특별해. 나는 할 수 있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힘들다는 하드렌즈를 그때부터 13년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아주 잘 끼고 있답니다.

렌즈를 끼고부터 만성두통이 사라지고

시력이 거의 2.0까지 나오면서 (안경으로는 잘해야 0.6까지 밖에 교정을 못했었거든요)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눈이 밝아져 새 세상이 보였고

두통이 없어지니 날개를 단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선생님을 만나는 몇 년 간

저는 자아존중감을 맘껏 충전하여

예전의 밝고 명랑한 학생으로 돌아가 있었지요.

렌즈를 끼고부터는 1~2년에 한 번 정도 밖에 안과에 갈 일이 없는데

어느날 대학생이 되어서 안과에 찾아갔던 날,

대기실에 앉아있다가 진료하시는 선생님 목소리를 들었어요.

"어머, 어쩜 얘 이렇게 튼튼하게 키우셨어요. 몸이 좋아도 물살인 애들 많은데 얘는 통뼈네요. 이렇게 근육 단단하고 뼈 굵은 애들은 비만이라고 구박 안 해도 돼요. 어머니가 영양관리를 잘 해주시나봐요."

슬쩍 진료실을 넘겨보니 통통한 남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진료를 받고 있더라구요.

그 선생님이 안약을 넣어주실 때는 또 이러셔요.

"이게 눈에 들어가면 좀 시원한 느낌이 들 거야. 괜히 겁 먹을 필요가 없단다. 선생님 말 잘 들을 것 같이 생겼는데 절대 눈에 손 대지 말자. 뭐 믿음직스러워서 따로 당부 안 해도 되겠는 걸?"

사실은 모든 환자에게

특히 어린 환자들에겐 자세한 설명과 적절한 칭찬으로 따뜻한 말씀을 해주시는 거였어요.

그래요.

제가 참해서도 아니었고 큰 인물(???^^; )이 될 관상은 물론 아니었던 거죠.

시력이 지독히 나빠 항상 얼굴을 찌뿌리고 다니는

못된 사춘기 소녀였을 뿐이었겠죠.

그런데도 선생님은 제가 항상 용기를 북돋우워주시면서

어디서 들어보지 못한 칭찬으로 제게 힘을 주셨던 거에요.

저 꼬마 녀석도 집으로 돌아가면서 까치걸음을 깡총깡총 뛰겠구나... 생각했어요.

저 녀석도 이 안과 다니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리고 저처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선생님이 예쁜 마음을 키워주셨기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선생님의 고마움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고요.

시력을 정확히 교정하게 되고, 두통을 고치게 되고, 따뜻한 칭찬과 자신감까지 얻게 되어서

저는 제가 그때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어디 가서 점을 보시면 제게 인복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오시는데

저는 제가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복으로 알고 지내도 될만큼 큰 인연이었다고 생각해요.

렌즈 이야기에 묵은 옛 생각이 나서 수다가 길어졌습니다.

이젠 안과에 가면 칭찬보다도 '시집 안 가냐'는 걱정을 더 많이 하시는 선생님이시지만 ^^;

제게 너무도 큰 힘이 되어주셨던 그 분께

이렇게 몰래 짝사랑고백을 하게 되네요.

나중에 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

고운 편지지에 감사의 뜻을 예쁘게 적어서

꼭 선생님께 드리려구요.

'....큰 인물은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제 남편도, 제가 낳을 아이들도...

계속 맡아주셔야 해요!'

라고 떼를 쓰면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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