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풍우낭왕(風雨浪王)
여명(黎明)이 움터오고 있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둑어둑한 낙양(洛陽) 대로(大路)에 한 사내만이 발걸음을 옮
기고 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칠흑처럼 새까만 흑의(黑衣)였다.
허리춤에는 검집에 없는, 검신(劒神)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넉자 길
이의 검이 매달려 있는데 빛이 비치지 않는 이 시점에 검신은 마치
무언가에 반응하듯 시퍼런 검광(劒光)을 토해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는 보검임에 틀림없었다.
이내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빛이 보이는 객잔(客棧)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화객잔(龍華客棧).
낙양에서 내로라 하는 객잔이라 낮이 되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때문에 이렇게 어두운 새벽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하루 내내 바쁘기
에 여느 곳의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요리를 준비하는 것
이다.
젖은 천으로 탁자 위를 열심히 닦던 용화객잔의 점소이는 주렴이
걷혀지는 소리를 듣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손님, 아직 문 열 시간 아닌뎁쇼."
쩌렁!
하지만 대답은 없고 대신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자 점소이는 돈 냄
새를 맡았는지 눈을 번쩍였다.
새끼줄에 꿰어져있는 은자 뭉치. 족히 이십 냥은 될 것 같았다.
점소이는 빠르게 그것을 집어 가슴 안에 갈무리하곤 그때서야 손님
을 보았다.
'허어억……!'
흑의사내를 본 점소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무서운 용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외모가 준수
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강했다.
당장이라도 품안에 넣었던 은자 꾸러미를 꺼내 내려놓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점소이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흑의사내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기에 고저(高低)가 분명치 않았지만 이상케도 점소이
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죽엽청(竹葉淸)."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몸을 퉁기듯 달려가는 점소이의 신형은 여느 날보다 민첩했다.
"휴……"
흑의사내가 죽엽청 한 병만 달랑 받아들고 순순히 객잔을 나가자
점소이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생활도 십 년하면서 숱한 사람을 보았지만 저처럼 살기 등등한
사람은 처음 보는군. 죽엽청이 원수라도 되는 거야 뭐야?"
그렇게 투덜거려도 뒷말은 자신만 들을 수 있도록 미약하게 말한
점소이는 혹시 그 사내가 다시 들어오지 않을까, 문을 흘깃흘깃 쳐다
보며 다시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 * *
망산(邙山)
낙양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사람이 임종(臨終) 때 한 번쯤 생각
하게 되는 죽음의 산이 바로 이곳, 망산이었다.
죽음의 대명사라 불리는 것처럼 망산 곳곳에는 봉분(封墳)으로 즐
비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하나의 봉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시퍼런 서슬을 뿜어내는 나검(裸劒)과 짙은 흑의만 보면 영락없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구릿빛 피부와 빛을 갈무리한 동공은
결코 귀신의 것이 아니었다.
휘유우웅……!
마치 북망산에 묻힌 영혼들을 위로하듯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
왔다. 어깨까지 늘어진 사내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진다.
바로 그 순간, 나검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퍼런 검광이 곳곳
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격동(激動).
검광의 떨림은 서서히 사내의 몸으로 전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앞의 봉분을 내려보던 사내는 품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개봉(開封)했다. 탁한 주향(酒香)이 후각을 자극했다.
주르륵
이윽고 호리병의 긴 목을 따라 흘러내린 투명한 액체가 빽빽하게
자란 무덤 위의 초림(草林)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다시 격동……
무엇이 그토록 그를 슬프게 하는 건지, 철한(鐵漢) 같은 흑의사내의
뺨 위로 굵은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휘이잉!
자연(自然)도 그가 우는 모습을 꺼려하는지 다시 거센 바람을 보내
사내의 머리칼을 흐트러지게 함으로서 눈물을 가리게 했다.
불어닥친 바람은 끊어질지 모르고……
그런데,
그 흑의사내의 등뒤로 언제부턴가 백의(白衣)의 사내가 서 있었다.
맹(盟)
백설처럼 희디흰 백의에 새겨진 글자.
현 무림(武林)을 통틀어 지혜로운 백학(白鶴)의 색을 복색(服色)으
로 삼고 '맹(盟)'이라는 글자를 남길 수 있는 곳은 단 한 세력뿐이다.
무림맹(武林盟)!
마도(魔道), 사도(邪道)의 무리들을 견제하자는 목적 하에서 만들어
진 정도무림 연맹이었다.
"풍우낭왕(風雨浪王)."
그가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풍우낭왕이라 불린 그는 백의사내의 출현을 진작에 알고있었는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눈물을 훔치며 등을 돌렸다.
남자 같지 않은 고운 용모에 유독 긴 팔.
"장수검(長手劒)?"
풍우낭왕도 백의사내를 아는 눈치였다.
"맞다."
장수검은 자신의 정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장수검 송효(宋梟)는 현 무림맹주 송무걸(宋武傑)의 둘째 아들로 팔
이 길어 장수검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팔이 길다 함은 상대와 싸울 때 거리가 두 세치 정도 이익이 있다
는 얘기였다.
"백호대(白虎隊)의 대주가 무슨 일이지?"
풍우낭왕이 눈을 살며시 좁히며 살광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장수왕
이 자신의 일을 방해해 기분이 상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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