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저계급론에 대해서는 사회의 변화 추이를 지켜보고 그것을 반영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문제가 문피아에서도 끊임없이 회자가 되는 것 같다.
과거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 문피아의 내 서재에서 <흙수저에 이어 흙자식이라...>는 제목으로 몇 마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의 모순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터진 문제라고 본다.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우리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에도 구한말의 근대화 실패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없었고, 그 결과 유교적 봉건 질서를 해체하고 타파할 의지도, 노력도, 생각도 전혀 없었기에 발생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승만이 한국사회와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이유는 그의 측근 세력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승만이란 인물이 오랜 서구생활과 교육을 통해 한국의 전근대적인 봉건 질서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백안시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인들의 구원투수가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중공업 중심의 제조업 산업과 유교적 봉건 질서가 궁합이 매우 잘 맞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근면과 성실, 절약과 검약과 같은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매우 강조했다.
물론 이러한 유교적 이데올로기, 즉 엄격한 봉건적 가부장 질서의 강조는 초기 자본주의 형성에 필수적인 수탈을 가능하게 하는 식민지의 존재가 없었던 한국에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살펴보면 늘 박정희가 탓하는 것이 국민들이 게으르다, 젊은이들이 게으르다는, 게으름, 나태 타령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럴만도 한 것이 당시 젊은 남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노력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공장에 들어가서 죽어라 몸 망쳐가며 혹사당해 일을 해봤자 손에 쥐는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건희가 돈 안되는 사업에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듯이, 국민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 역시 매우 합리적인 경제학적 선택이다.
하지만 이때 박정희가 내세운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배타심, 그리고 그것을 통한 가부장 질서의 제창은 남성들에겐 매우 매력적이었다.
해방 이후 국회에서 아슬아슬하게 간통죄가 통과되었고, 자유부인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유행했을 정도로 꽤나 개방적이던 사회는 박정희 집권 이후 급속도로 경색되어갔고 남성들의 가부장 권력이 극도로 확대되는 형태로 이행되어 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국남성들은 한국여성들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되었다.
외부의 식민지가 없는 대신 내부의 식민지를 건설한 셈이었다.
돈이 없는 남성이라도 x알 두쪽만 차고 근면성실하다는 가치만 있으면 괜찮은 남성으로 취급되었다.
지금은 상상할수도 없는 반지하 단칸방에서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남자로서는 가히 인류 역사상 보기 힘든 행복한 시절이었다.
심지어 70년대 당시엔 성폭행 당한 여성을 판사가 직접 설득해 자신을 성폭행한 남성과 결혼하게 했던 것이 미담으로 신문 지상에까지 소개되던 세상이었다.
요즘 이슬람 사회에서나 보는 모습을 당시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적 봉건 질서와 초기 산업화가 절묘하게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모습이자, 남성들의 권력이 극도로 팽배했던 암울한 시절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제조업 대한민국에 놀라운 효율성을 안겨다주었다.
노동 의욕이 없었던 남성들은 갑자기 노동 의욕이 샘솟기 시작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일본놈이나 양놈들에게 내 여자들을 빼앗기고 손가락이나 빨고 살었어야 할 팔자인, 그래서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던 젊은 남성들이 다들 손쉽게 여자를 하나씩 꿰차게 된 것이다.
그것뿐이던가.
여자를 꿰찼으니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인간에게, 특히 남성들에게 자녀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욕망과 필요가 총집약된, 철저한 욕망의 산물이다.
첫째로 인간은 자식을 통해 종족의 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둘째로 인류가 원시적인 수렵 생활에서 벗어나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생산물의 저장이 가능해지자 이것이 권력과 계급, 부의 차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남성들은 자신이 평생 일군 재산과 권력이 그대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그때부터 자식에게 이것들을 대물림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영원히 소유하려 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성들에게 자손을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는 정말로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인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셋째로, 더 나아가 남성들은 부와 권력의 세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식의 입신양명까지 욕망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자식이 달성하면 아버지도 그것에 편승하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박정희 시대의 남성들은 다들 하나씩 아내는 물론 자식까지 꿰차게 되었다.
이러면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여자가 생겨서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런데 그 여자가 곧 내 자식도 낳을 것이니 혹시 내가 부와 권력을 얻게 되면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해서 백년천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혹시나 내가 부와 권력을 얻는데 실패하더라도 자식에게 나의 욕망을 대신 실현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일단 지금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노동을 해야 한다. 모두들 공장이든 어디든 몰려가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혹사를 당하며 노가대에 매진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국가도 신이 날 수밖에 없다.
국가는 남성들에게 요구한다. 지금은 힘들지 모르지만 네 자식이 부와 권력을 얻으면 너도 거기에 수저 하나 정도는 꽂을 수 있다.
아버지들은 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식의 인생을 담보로 팔아 미래의 부와 권력을 꿈꾸었고, 국가는 그런 아버지들과 그 아버지들의 인생을 인질로 삼아 마음껏 국가의 부를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
수탈할 식민지가 없던 한국은 이런 방식으로 내부적 식민지(여성과 자녀)를 구축해 경제개발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다시금 미래세대를 담보로 또 내거는 방식으로 거의 50년 가까이 유지가 되어 왔다.
아버지는 자식을, 그 자식은 또 자신의 자식을 담보로 내걸었던 것이다. 미래에는 나도 부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하지만 이러던 것도 결국엔 파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첫번째 조짐은 여성의 권리 신장이다.
지금껏 여성을 막 잡아다가 단칸방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기성세대와 달리 여성의 권리 신장으로 그것이 점차 불가능해지게 된다.
최근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가 인기다.
필자도 그 드라마를 보며 웃음과 감동을 함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극중에서 성동일은 보증을 잘못 서서 반지하 단칸방에서 다섯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맥락을 유추해 보자면 아버지 성동일은 아내나 자녀와 일말의 상의도 없이 보증을 섰고, 그 결과 그것이 잘못되어 온가족이 고생을 하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은 아버지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에 그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온가족이 다 지는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가족 질서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폭압적인 가족 질서는 너무 손쉽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있다.
하지만 2015년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이러한 폭압적인 아버지의 권력은 통용되지 않는다.
애초에 반지하 단칸방에서 한국남성과 결혼생활을 시작해줄 여성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베트남 아내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으로 사왔다가 지금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아내와 제대로 상의도 안하고 보증을 선다거나 사업을 하다 망하면 그것을 용인해줄 여자도 없다. 아니 제대로 상의를 했어도 남편이 망하면 바로 이혼당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남편이 망하면 이혼할 경우 그 여성을 자식 버린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면서까지 가정에 억압해놓던 그때 그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것이 인류의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돈 없고 사업에 망한 남자는 원래부터 결혼도 힘들고 가정을 건사하기 힘들었다. 인류 역사에서 늘 그래왔는데, 유독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만 이것이 가능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남성들은 망해도 잃을 게 없는 축복받은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남성들에게 노동 의욕을 고취시켰고, 때로는 기업가 정신도 생겨나게 해주었다.
망해도 마누라를 집에 붙잡아둘 수 있고, 심지어 망한 아버지임에도 공부 잘해서 성공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폭압적인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에게 도전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 청년들은 망하면 진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엔 망해도 마누라와 자식위에서 폭압적인 군림을 할 수 있었다.
언제든 마누라와 자식이라는 단단한 바탕 위에서 재기도 꿈꾸고 혹은 자녀에게 부와 권력을 얻어내서 아버지도 나중에 그 부와 권력에 수저 하나 정도 꽂을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구할 뻔뻔한 권리가 그당시의 아버지들에겐 있었다.
이정도면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해야 된다. 그렇게 좋은 시절에도 돈을 못 벌었다면 진짜로 무능했던 거다.
그러다 시대가 점차 변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자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
아버지들이 함부로 아내와 자식 위에 군림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식에게도 부와 권력을 쟁취하라는 요구를 쉽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국남자들은 또 잔머리를 굴린다. 자기가 직접 나서는 대신에 애들 엄마의 신분상승 욕망을 부추겨서 악역을 떠넘긴 것이다.
한국남성들은 이렇게 잔머리를 굴려서 일단 아내의 권리 신장을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내와 자식을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 드디어 유행하던 말이 바로 엄친아다.
이상하게도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른 성공한 자녀와 비교하기를 참 좋아한다.
아마도 한국의 부모들에겐 자녀가 밝고 건강히 자라고 감정을 교감하는 모습에서 전혀 행복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자식이 오로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큰 대기업에 취업하고, 그래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결혼과 자손까지 남겨야 하며, 마지막으로 부모의 노후봉양까지 해야 그제서야 행복까지도 아니고 대략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만족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 숫제 가정이 아니라 그냥 회사다. 자녀는 가정이라는 회사를 위해 성과를 남겨야 하는 직원들일 뿐이다.
혹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공부, 대학, 취업, 결혼, 자손 등등을 ‘평범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독립된 인격이 또다른 독립된 인격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월권 행위이자 봉건적 야만성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전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봉건적 야만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인 죄책감을 자녀에게 주입했다는 것이다.
흔히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과 함께 한 세트로 따라다니는 것이 부모님께 죄송해하라이다.
심지어 얼마전 슈퍼맨이 왔다라는 프로그램에선 훈장님이 등장하는 프로에서 이제 고작 만4세에 불과한 사랑이에게 부모님께 죄 지은 것이 없냐고 묻는 전근대적인 야만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도대체 만4살짜리 아이가 잘못을 하면 얼마나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고, 그걸 설명하라면 하지도 못할 한국인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야만적인 봉건사회의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전근대사회의 야만성을 유교의 잘못이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라고 항변하며 한국 전통 사회 내부의 봉건적 야만성을 은근슬쩍 합리화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만4살짜리 사랑이에게 죄책감을 주입했던 사람은 ‘훈장님’이었음을 상기하자.
결국 우리 한국전통사회 내부의 봉건성이 문제인 것이며, 이것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한국전통사회 내부의 봉건적 야만성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적이며, 수저계급론도 그 시작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의 봉건적 야만성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은 동일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지금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중심엔 한국전통사회 내부의 봉건적 야만성에 숨어 있다.
수저계급론은 어느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헬조선과 같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조롱도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유독 한국사회에서 이것들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모순을 한국사회는 계속 뒤로 뒤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50여년이 지나서 드디어 터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한걸음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겪어야 하는 진통이라고도 생각한다.
해방 이후 한번도 한국의 전통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봉건적 야만성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겪어야 할 인과응보이자, 또한 그 봉건적 야만성을 통해 이득을 취해왔던 여러 세력들(국가, 자본가, 아버지, 부모 등등의 계급 세력들)이 받아야 할 죗값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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