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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메리(자료용)

작성자
김효직
작성
06.12.22 14:36
조회
210

.메리 1세:Mary I

1)개요

Mary Tudor라고도 함. 별칭은 피의 메리(Bloody Mary).

적법한 왕위계승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1553~58).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을 박해해 '피의 메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2)초기생애

헨리 8세와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메리는 어릴 때부터 동맹국이 될 만한 여러 군주들에게서 결혼신청을 받았으나 성사된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잉글랜드가 유럽 열강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 일종의 볼모역할을 했다.

학구적이고 총명한 소녀였던 메리는 어머니와 공작 신분의 여자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친척인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약혼했으나 카를은 메리에게 막대한 액수의 지참금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무시당하자 카를 5세는 즉시 파혼하고 더 이익이 될 만한 결혼상대를 찾았다. 메리는 1525년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또다른 약혼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러들로 성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아버지가 앤 불린과 재혼하면서 급속히 혼란에 빠졌다.

헨리 8세는 1520년대부터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할 계획을 꾸몄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죽은 형의 아내였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황은 헨리에게 캐서린과 이혼할 권리가 없다고 못박았고, 잉글랜드에서 이 이혼이 합법화한 뒤에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했다.

1534년 헨리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국교회를 세웠다. 캐서린과의 결혼을 근친상간으로 치부함에 따라 사실상 메리는 사생아가 되었다.

새 왕비가 된 앤 불린은 헨리에게 딸 엘리자베스(뒤에 여왕이 됨)를 낳아주고 메리가 부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고, 어린 엘리자베스 앞에서 시녀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했다. 메리는 어머니 캐서린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편지를 교환했다.

앤 불린의 미움으로 메리는 끊임없이 처형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으나 그녀는 어머니의 용기와 아버지가 가진 불굴의 심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메리는 자신이 사생아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수녀원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해도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 뒤, 메리에게 자신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고 캐서린과의 결혼이 "근친상간에 따라 불법"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용서하겠다고 제의했다. 메리는 이를 거부하다가 카를 5세에게 설득되어 결국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을 깊이 후회했다. 헨리는 비로소 메리와 화해하고 그녀에게 지위에 어울리는 거처를 주는 한편 또다른 약혼계획을 세웠다. 메리는 헨리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의 대모가 되었다.

메리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주가 되었다. 미모는 아니었지만 노래 실력과 언어에 대한 소질이 뛰어나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딱지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으며 활동에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여러 남자들이 청혼을 해왔으나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메리는 궁정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사생아로 여겨졌지만 1544년에 이르러서는 에드워드를 비롯해 앞으로 헨리 8세에게 태어날 적법한 아이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얻었다.

에드워드 6세는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종교적 열정과 시기심 많은 고문들의 영향을 받아 예배할 때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메리는 개인 예배실에서 예전의 형식대로 미사를 올렸고 다시 한번 목숨을 잃게 될 위험에 빠졌다.

3)잉글랜드 여왕시절

1553년 에드워드가 죽고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올라 며칠 동안 여왕으로 인정받게 되자 메리는 노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정당한 군주는 메리였으므로 며칠 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이제 37세의 중년에 이른 메리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으며 아버지 헨리 8세처럼 강인하고 진지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잔인한 형벌과 사형집행장에 서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메리는 새로 왕위에 오른 여왕으로 신중하게 처신을 해야 함에도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가운데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다.

고문들 대부분이 왕가의 혈통을 지닌 그녀의 사촌 데번 백작 코트니를 결혼상대로 천거했으나 메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기보다 11년이나 연하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할 결심을 했다.

헨리 8세가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함에 따라 재산과 토지를 얻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그들의 부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으려는 메리의 열망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의회도 메리가 스페인 왕과의 결혼 포기를 청원하는 의원들에게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라며 무례하게 대한 일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다.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이 확실해지자 1554년 토머스 와이엇 경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와이엇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빠르게 진격해오자 이에 놀란 메리는 훌륭한 연설을 통해 수천 명의 군중을 선동해 반란군에 맞섰다.

패한 와이엇은 처형당했고 메리는 펠리페와 결혼해 가톨릭을 복귀시키고 이단 처벌법을 부활했다. 그뒤 3년 동안 반란자들의 머리가 교수대에 걸렸고 이단자들은 쉴 새 없이 처형당했다. 그 가운데 300여 명은 화형을 당했다.

이 때부터 메리는 '피의 메리'라고 불리며 미움을 받았으며 그녀의 스페인 출신 남편은 불신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메리 자신은 악독한 살육으로 비난을 받았다. 메리는 국민의 뜻과는 달리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해 잉글랜드가 유럽에서 갖고 있던 마지막 발판인 칼레를 잃었다.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고 건강 역시 좋지 않아 비탄에 빠진 메리는 몇 차례의 상상임신으로 더 낙담했다. 그녀는 1558년 11월 17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와 함께 그녀가 추구했던 모든 것도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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