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사실 좀 웃긴 상황입니다.
A : 포르노는 예술 장르가 될 수 있다. 예술로 승화시키자.
B : 포르노가 꼴리면 그만이지 뭘 더 따지냐.
A : 그래서 포르노가 예술로 진화할 가능성을 포기하자는 거냐.
B : 포르노가 왜 저질이냐.
A : 이러이러해서 저질 아니냐.
B : 원래 그런 건데 왜 따져.
A : 예술적인 장르로 발전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하잖아.
B : 포르노는 원래 그런 거다. 따지지 말자.
A : 그래서 현재에 만족할 거냐?
B : 아 포르노는 꼴리면 그만이라니까. 뭘 더 발전시켜.
A : 최소한 말은 돼야지.
B : 말이 안되면 어때! 어차피 포르노인데!
A : 이렇게 이렇게 하면 발전할 수 있다니까?
B : 포르노는 발전시켜봐야 포르노야. 꼴리면 그만이라니까!
A B 모두 맞는 말이죠.
그런데 다툼은 일어난단 말입니다.
재밌죠?
givemeacake님의 비유를 빌리자면,
예술이 되지 못해도 목적에 충실한 포르노로 남고 싶어하는 감독이 있는 거겠죠.
본문에서 펜드런은 알카사스의 말에 고개를 숙였지만 '네, 저는 제가 재미있는 글을 쓰고, 그것이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해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것을 쓰기 위해 반드시 그것을 사용해야 했는가'라는 것은 문학적 의미로 치열할 수도 있지만, 모든 다양성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면 '밥이 있는데 빵을 뭐하러 만드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헤헤 이 글을 쓰신 작가님은 하얀로냐프강의 작가분이십니다. 장르내에서도 이런 고민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이쪽 판이 재미있는 점이 그거에요. 문학으로써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저 즐겁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거. 전 그게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즐겁기 위해서 글을 읽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대편에는 정말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한편에서 다른 한편을 재단하기 보다는 그냥 서로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양탕님의 글은 이 판이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부분을 끄집어낸 것 뿐입니다. 제 문제제기도 단순히 초인이 나오는 재미위주의 이야기는 나쁘다.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도 있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하는 경계문학도 있는 현재의 장르의 상황을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보고있는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그것을 사용해야 했는가?가 문학적 치열함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면 다양성을 말살할 수 있다고 하셨죠? 무의식적으로 은혼님도 인정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장르판타지의 세계에는 문학적 치열함을 가지지 않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이야기들이 상당수라는 걸요. 그런 이야기들에 알카사스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없는 짓입니다. 작가가 그걸 의도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걸 보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무영신마괴님//
먼저 좋은 내용이 담긴 단편소설을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재의 장르문학 또는 환상문학의 현실을 잘 반영하는 듯도 하고, 어쩌면 이상균 작가님이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꼬집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알카사스의 지적이 공감이 가는 만큼 저 역시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장르물인가 장르문학인가를 나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알카사스의 지적처럼 본질에 대한 규명이 아니지요. 저에게는 무의미한 논의로 보입니다. 역시 그 소설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가?"(본문인용)가 중요한 것이겠죠.
2. 무엇보다도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하는 거라네." 라는 부분에는 적극 공감합니다. 현재 많은 독자들이 양판소라 부르는 책들을 저 역시 보면서, 작가분들이 글을 쓰기 전에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전혀 걸리지 않는 높은 수준의 장르소설도 적지 않기에 저는 이를 양판소에 한정하고자 합니다)
3. 그러나 알카사스의 마지막 질문 <왜 자네는 그 이야기를 '미래소설'로 썼는가?"> 에는 적지 않은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무영신마괴님의 질문<우리의 장르소설들은 주인공이 초인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에서 좀 더 강하게 드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질문을 드려봅니다. <우리의 장르소설이 '주인공이 초인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꼭 말해야만 합니까?>
(이렇게 반대로 질문하는 것이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외 다른 지성종족이 존재하고, 마법과 검술이 무력을 대변하는 판타지를 끌어오고, 무공과 기진이보가 존재하는 무협을 끌어오는 것을 보며, 그 각각의 존재가치를 "필연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초인을 빌어서 표현해본다면, <작가가 그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초인이 등장하는가 등장하지 않는가로 인해서 필연적이거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들(초인 및 환상문학에서 상상의 산물이 되는 것등)을 글속의 소재의 하나 또는 구성요소의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지요.
4. <그저 재미있게 쓰기위해, 편하게 쓰기위해 초인이란 소재를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까?>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다라는 생각입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소설의 태생과 그 역사가 재미 또는 흥미라는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다고 여기기에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단지 '편하게'라는 어감보다는 그쪽이 더 독자들에게 대리만족(통쾌한 맛)을 준다고 여기기에 작가들이 쉽게 글속의 소재로서 가져오는 것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5. 마지막으로 저 역시 다양한 내용을 중심 줄거리로 삼는 소설들이 출간되기를 바라는 독자의 한명입니다. 초인이 만능이어서 자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일구어 가는 모습은 이제는 식상한 면이 있다고 느끼는 독자라는 것이지요..
그런 저의 성향상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위해 일방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보다는 그 이야기를 통해 인간관계라던가 인생항로 또는 다른 어떠한 갈등과 고민등을 엮어내고 풀어내는 소설들에 정을 느끼고,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한 소설들도 끊이지 않고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판타지와 무협이 지향하는 바가 '재미'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싫은) 토론이군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첨병을 달리는 게임쪽을 공부하는 중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공부를 시작한 후부터 들은 금언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지요.
"게임으로 예술하려면 니돈으로 해라"
물론 자금을 얻어서 게임을 만드는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판타지나 무협이나 모두 시장지향적인 출판물입니다. 따라서 시장이 원하는 방향 즉 재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금을 따내서 게임을 만드나 시장에서 팔리기 위해 판타지나 무협을 쓰나 똑같은 것이죠.
존카멕은 게임을 만들어서 시장에 내보입니다. 단 그것은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기 위한 게임들이죠. 문학으로 치자면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선지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존카멕이 될수는 없지요. 혼자서 다만들고 집 뒤뜰에서 로켓제작이 취미인 괴물을 따라가려면 가랭이가 찢어지다못해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는 그가 만든 엔진을 사다 씁니다.
문학에서는 모두가 존카멕이 될수 있을까요? 해리포터의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양탕님.
오만 입니다. 개인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아무리 주장하여도 동일한 답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그리고 현제의 장르문학이 문학으로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꿈을 걷다' 를 빌밀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학이 아니라도 그것은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독자는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번의 한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현제의 장르소설의 문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그 페혜의 원인을 그러한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 꼽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글을 보고서 무엇을 느끼라고 기필 하였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짧은 글에 자신의 주장하나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 하는 것임에야 여러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왜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로크미디어의 '꿈을 걷다'의 탄생 이전에 어느 누가 자랑스레 '문학'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쪽이나 당하지나 않을까 무서워했지.]
지금의 장르소설은 문학적 가치가 없다. 그러나 찾아보면 그러한 소설도 있다.
라는 주장은 뒤에 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이 태어남으로 해서 전자의 문학적 가치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아무소용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임을 왜 모르고 계시는 건지.
[혹시나 해서 추가하는데 장르적 도구를 쓴다고 해서 장르'문학'이라 정의하는 망나니같은 답변이 없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꿈을 걷다'를 이야기 하기 전 바로 윗줄에 이러한 의미가 깊은 글을 남겨 '자신의 오류'를 그대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러한 단적인 문장만 보아도 양탕님이 얼마나 개인의 생각에 치우쳤고 공정성이 없고 분별력이 떨어지는 주장을 하고 계시는 것인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지금의 장르소설의 시장이 어둡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그것이 앞으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본문에는 단지 문학적 쓰레기로 표현되고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써 기분이 상하고 쓰디쓴 한 마디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다르고 '어' 다른법인데 좀 더 자기자신의 생각을 정리 한 후에 명확한 명제를 들고서 이야기 하였으면 합니다.
한 낯 단어조차 표현함에 있어 모든것이 다르듯이 문학역시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으로 변하는 '요술봉' 같은 신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석하지 못 한 것을 양탕님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달리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시고 계시면 안됩니다.
<죄송 합니다. 글이 밑에 게시물이 삭제가 되어 이동을 하였습니다. 본 게시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글임을 밝힙니다.>
givemecake님/
일단 허영만화백의 만화가
"다시 말해보세. 미래소설의 본질은 미래소설이기 이전에 소설이고, 소설이기 전에 글이며, 글이기 이전에 작가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미래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미래소설이라는 것은 겉 껍데기일 뿐이요, 진정 하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소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소설 안에서 글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그 글 안에서 작가는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겠는가?"
를 충족하는지부터 따져보시는것이 좋겠군요. 지금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완성도의 차이를 이야기하는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문필가 길드라니 황당하군요. 길드는 상공업자의 동업자 조합으로 도제 제도를 포함하는 면허와 허가 제도를 수반하여, 품질인증이나 과다 경쟁방지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길드처럼 강제력은 없지만 요즘으로 따지면 지역 변호사회나 의사회, 건축사회 등이 그 예이고 주유소나 편의점, 프랜차이즈를 일정한 거리 이내에 두지 못하게 하는 것도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쇄길드나 출판 길드는 당연히 존재할 수 있지만 문필가 자체에게 지역적 제한이나 출간량의 제한을 둘 수 있는 것인가요? 문필가가 장인(匠人)들처럼 도제부터 길러져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인증받아 면허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원고를 싸들고 출판업자를 찾아 다녀야 하는 문필가는 본질적으로 길드같은 조직적 행동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길드가 취급하는 상품(객체)일 것입니다.
이렇게 관(觀)이 잘못 되면 제대로 된 설정이 나올 수 없고, 잘못된 설정에서 스토리가 바로 흐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아울러 아래 양탕님의 글은 아예 논제가 잘못 되었기에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관료제와 봉건제는 상호 대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관료제에 대비될 수 있는 것은 신분제이고, 봉건제에 대비될 수 있는 것은 군현제 내지 중앙집권제이므로 다퉈봐야 바른 결론이 날 리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봉건의 흔적이 없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이미 봉건제가 종료하므로, 15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에야 봉건제가 종료한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양권에서는 봉건제가 관심꺼리가 되기 어렵습니다. 2500년전 공자의 사상 자체가 귀족(人)과 평민(民) 사이에 관료(士)를 끼워넣기 위한 것이었므로 동양권에서 신분제와 관료제의 논쟁이나 다툼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서양에서는 7세기경에야 봉건제가 시작되는데, 이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시작되어 본격적으로는 이들에 의한 로마제국의 붕괴에 기인합니다. 이미 게르만족이 동서로마제국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신(新)게르만족 연합체인 프랑크족들이 로마제국 대신 유럽을 차지하여 나눠가진 것이 유럽 봉건제도의 실체입니다. 변방이었던 영국이 다소 복잡하고 정복의 출발지인 독일의 상황이 다소 이질적이었던 차이가 있지만 유럽의 중세란 게르만 정복자 밑에서 설치던 교회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신분제와 관료제가 극명히 대비되었던 것도 아니고 지배층만 게르만족으로 바뀌었을 뿐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존 로마의 관료들이 그대로 행정을 담당한 것도 동양의 정복왕조인 요금원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을 이룬 것은 프랑스이고 독일, 이탈리아는 거의 18, 9세기까지 봉건제를 지속했으므로 막스베버 같은 이들이나 일본 정치학자들의 이론은 후진국의 자기합리화 아닌가 의심해봄직 합니다.
허영만의 식객은 매 권의 주제가 다르죠. 하지만 그 주제들은 모두 음식(혹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어나오는 인간적인 맛을 다루고 있습니다.(맛 대신 면모라고 봐도 되겠군요.)
타짜 역시 마찬가지죠.
누군가는 "윤리적인 입장에서의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대충 비슷하다고는 생각합니다.
반면, '마계대전' 이후의 김성모는 그런 점이 없어요.
김성모의 만화 대부분은 '폭력' 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런데 '폭력에 대한 해결' 이라거나 '폭력'에 대한 '어떤 것' 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나 현상만을 다루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죠.
권선징악적 요소는 없습니다. 폭력이 더 큰 폭력에 무너질 뿐이죠.
음... 그냥 간단히 말하죠.
장르문학이란 '소비문학', '상업문학' 으로 정의할 수 있죠. 기본적으로 '팔리기 위한 공산품' 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문학'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 '문학' 의 가치도 담고 있다 봐야겠죠?
'소비' 즉 '상품성' 이라는 가치를 포기하면 장르문학이 아닙니다. 순수문학이죠.
'문학' 이 요구하는 가치를 포기하면 장르문학이 아닙니다. '글로 표현된 다른 무언가.' 겠죠.
제대로 된 소비문학이 되려면 '소비성' 을 극대화 한 상태에서 '문학' 의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적절한 비율을 찾기가 매우 어렵단 말입니다.
이 상황을 놓고 입장이 갈라집니다.
'소비문학이니 소비성에 집중하자. 문학적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문학적 가치를 포기하면 장르문학이 아니다.'
'소비성 가치도 문학적 가치도 중요하다. 소비성 가치가 중요하지만 문학성 가치도 중요하다.'
'언제까지 소비문학으로 남을 것인가. 문학의 주류로 올라서려면 소비성을 배제하거나 줄여야 한다.'
대강 이렇게 갈라지죠.
이 상황에서 제가 지지하는 것은 '소비성 가치도 문학적 가치도 중요하다. 소비성 가치가 중요하지만 문학성 가치도 중요하다.' 예요.
위의 포르노로 따지면 '변태적 행위로 인해 꼴리는 포르노' 가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흥분 상태를 이끄는 표현' 으로 설명할 수 있겠군요.
후... 예전의 대중문학을 폄하하던 순수문학쪽 입장을 보는듯 하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앙탕님의 글은 초인이 등장함으로 문학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글이었고 본문글에서는 미래문학으로 반드시 써야만 하는가 하며 미래문학에 굳이 메시지를 담으려한다고 똑같은 의미를 가진 글이었는데 말입니다. 둘다 장르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글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같은 만화카테고리의 두 작품이 무엇이 다른가 묻고싶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가 되는 메시지가 아닌 두 작품이 어떤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길래 givemecake님이 다르다고 하시는지 묻고싶었네요.
장르문학과 마찮가지로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화인데 허영만의 만화와 김성모의 만화가 다름을 인정한다는것 자체가 넌센스군요.
그냥 만화도 한번 지금 문학이 들어가느냐 마느냐라는 논란이 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시죠. 만화에 무언가 덧붙일게 있나요? 순수만화와 대중만화가 나뉘냔 말입니다. 거기에 장르만화가 나뉘냔 말입니다. 만화일 뿐이죠.
왜 자꾸 없는걸 있다고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만화에 귀족주의가 있나요? 허영만 '만화' 와 김성모 '만화' 글자라도 차이납니까. 김성모 만화의 메시지를 대라면 100가지도 넘게 댈 수 있어요. 장면마다 때내서 말하면 되는 문제니까 말이죠. 그만큼 타인이 느끼는 메시지는 다른겁니다.
이것참... 장르문학은 어떤거고 장르소설은 어떤겁니까?
'교육만화'는 교육을 쉽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 된 상업만화 입니다.
애초에 재 해석이 필요없는 단정적인 글에 가깝고 '아동만화'나 '성인만화'와는 괴를 달리하고 있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애초에 '아동'과 '성인'의 기점을 나눈시점에서 수위에 조절이 부가적으로 따라 오는 것들이고 아동만화에서 엄청난 폭력이나 잔인성 섹슈얼이 가미되는 작품이 아동들에게 악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 하여 '성인'과' 아동'의 수위를 나우었다고 봅니다.
문학적이고 내제적인 폭력과 섹슈얼이 내제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할 수 있는 나이를 기준으로 수위를 나누었겠죠.
애초에 두분이 얘기 하시는 장르문학 이나 순수문학에 대한 이야기와 벗어난 듯 한데 왜 두분다 자꾸 이야기 하시는 건지
앙탕님의 글은 '장르적 도구를 쓴다고 모두 다 장르 문학이라고 부르지 말자' 라는 게 주제죠.(그렇죠?)
=> 아닙니다. 단지 추가한 말일 뿐입니다. 글을 어떻게 읽으시는겁니까.
이 글을 말입니다.
======================앙탕님의 글 발췌=========================
10. 다만 대부분의 무협/판타지 소설들을 일컬어 장르문학이니, 환상문학이니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그것은 문학을 문학이게끔 노력하는 이들과 문학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 대한 모독이고, 노력을 폄하하는 처사다. 혹시나 해서 추가하는데 장르적 도구를 쓴다고 해서 장르'문학'이라 정의하는 망나니같은 답변이 없었으면 좋겠다. 로크미디어가 왜 장르문학, 환상문학같이 잘 알려진 범주를 쓰지 않고 '경계문학'이라는 생소한 말을 썼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문학으로 자처하는 장르물과 같은 선상에 놓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이라고 자랑스레 붙여놓을 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크미디어의 '꿈을 걷다'의 탄생 이전에 어느 누가 자랑스레 '문학'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쪽이나 당하지나 않을까 무서워했지.
===============================================================
사물은 보는 각도에따라서 다양하게 보인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군요.
전 마이너 카피 버전은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위에 기재하였고 그것이 크게 잘 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시가 상업적으로 값을 매겨 팔리고 있다하여 순수문학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기준으로 무엇을 나누더라도 기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사실은 알 것 같군요.
무엇이든 대비되는 사실이나 구성 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두분이서 말씀하신 해석에 따라 나뉘겠지요. 그러한데 그것중에도 기준이 세워져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겠지요.
저는 두분의 의견에 크게 잘 못되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분의 논점이 자꾸 내려오면서 변질되어 진 것 같아서 한 마디 끼어들었습니다.
늦은신밤 주무셔야 한다는데 죄송합니다.
첨언합니다.
양탕님은 '문학을 문학이게끔 하는 특성은 누군가 말한 바와 같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라는 걸 전제로 깔아놓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 이라는 '요소' 가 필요하다는 거죠.
흔히 말하는 '주제' 입니다.
* 여기서 초인 어쩌고 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양탕님의 오류지만.
[ 다만 대부분의 무협/판타지 소설들을 일컬어 장르문학이니, 환상문학이니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그것은 문학을 문학이게끔 노력하는 이들과 문학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 대한 모독이고, 노력을 폄하하는 처사다. ]
라는 부분을 위의 부분과 연결해 보면, 대부분의 무협/판타지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 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어서 문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됩니다.
문학적 수준과는 아무 연관이 없어요.
문학이 요구하는 기본 '요소' 의 부재가 문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givemecake님/
4. 문학을 문학이게끔 하는 특성은 누군가 말한 바와 같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와 비슷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실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되는 배경을 무대삼아 작가의 세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이 같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비록 참여문학 쪽에 조금은 가까울지 몰라도.
글을 띄엄띄엄 읽으시는건가요? 앙탕님이 초지일관 말하고자 하는것은 현실성 부재입니다. 현실성이 없다 이거죠. 글이 말하고자 하는것은 이 본문 글에서 나온겁니다. 그래서 초인이 나온거구요. 초인이 존재하는것 자체로 현실성이 없다 이겁니다. 존재에 대한 성찰이 뭔고하니 '상식적인'수준에서 실제할것 같은 배경에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의 글을 쓰라는거죠.
자꾸 딴소리를 하시네요. 왜 초인이 나왔겠습니까 목적의식과 글의 주제가 필요하다는것이 앙탕님의 글의 요지였다면 왜 초인이 나왔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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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다면 무협/판타지 소설이 문학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결국 초인(超人)의 문제와 연결된다. 무협/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초인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이 아닌 그냥 물리적 힘이 강한 이를 지칭한다. (정신적 의미에서 초인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작가(인간)는 스스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존재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인이 주체로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차별화되고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여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은 문학적 문법에서 굉장히 동떨어진다.
이거는 그럼 뭔가요. 목적의식이나 주제가 초인하고 관련있습니까. 말이되는 이야기를 하세요 좀.
[ [ 이것은 읽는 이를 위해 굉장히 단순화시킨 도식이다. 만약 주인공(=초인)이 가진 힘이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에서 차별화되지 않고 초월적이지 않은 단순한 부가조건에 불과한 상태이고(즉 그것이 주체가 아니고), 우리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것은 문학의 수준에 근접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편으로는 주인공에게 비현실적인 힘과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이후의 과정을 어떻게 서술해가고 결과는 어떤지에 따라 문학에 가까운가, 한 여름밤의 꿈에 가까운가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밖에 같은 견지에서 다른 가능한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좀 더 관심있으면 테리 이글턴의 문예 이론이나, 아니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 앞의 이건 왜 따오시지 않습니까. 차별화되지 않고 초월적이지 않은 단순한 부가조건에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려내고 있다면은 왜 빼신겁니까. 글을 입맛대로 빼오진 마십시오.
또한, 8번에 보면 이런 내용도 있죠.
[ 장르물과 장르문학의 간극에는 초인이라고 불리는 풀기 어려운 난제가 있다. 만약 작가들이 문학의 자리에서 존경받고 싶다면 초인의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장르의 법칙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장르를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있으니까. 우리들이 대가라고 말하는 몇몇 작가들이 바로 그렇다. 정상수도 그것을 시도하는 것 같고. ]
이전의 말과 이 내용을 연결하면, 초인이 있으면 장르문학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초인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장르문학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핵심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 즉 초인을 어떻게 '요소' 안에 편입시키느냐 입니다.
푸른노을님/'장르물과 장르문학'이라는 게시물의 동선을 설명해드리면, 1. 기본적인 문학의 정의는 이러저러하다 ->2. 장르가 장르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르'문학'이 되려면 저런 문학의 정의가 필요하다. -> 3.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장르물에서 장르문학으로 가려면 '초인'이라는 문제가 제일 먼저 걸린다. -> 4. 초인이라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소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물론 초인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문학적 수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 5. 그런데 장르물이 반드시 문학이 되라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장르물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장르물을 문학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이 정도가 되겠네요. 아주 간단합니다. 제 게시물에 반박을 하려면 위 도식 중 2번과 3번을 선택하면 됩니다. 2번같은 경우는 장르물이 장르문학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제기한 문학적 정의가 아니라 다른 문학적 성질이 있을 수 있다, 3번 같은 경우는 장르물에서 장르문학으로 가는 길에는 초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반박하면 진짜 재밌는 논쟁이 이러나게 된다고 생각해요.
제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는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맥락이고, 글에서 어느 부분이 중요 맥점인지 파악한다음에 그 부분을 건드는 것이 아닐까요.
1. (5번의 내용) - > 초인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부분
1) 무협/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초인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이 아닌 그냥 물리적 힘이 강한 이를 지칭한다.
-> 용어의 정의입니다.
2) 정신적 의미에서 초인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작가(인간)는 스스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존재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런데 초인이 주체로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차별화되고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여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은 문학적 문법에서 굉장히 동떨어진다.
- > 이 경우 문학적 문법에서 동떨어진다는 것은, 2) 번에 있는 '작가는 스스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존재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통해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2. (6번의 내용입니다.)
1) 주인공(=초인)이 가진 힘이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에서 차별화되지 않고 초월적이지 않은 단순한 부가조건에 불과한 상태이고(즉 그것이 주체가 아니고), 우리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것은 문학의 수준에 근접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 > '현실적인 초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의할 필요는 없겠군요.
2) 한편으로는 주인공에게 비현실적인 힘과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이후의 과정을 어떻게 서술해가고 결과는 어떤지에 따라 문학에 가까운가, 한 여름밤의 꿈에 가까운가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밖에 같은 견지에서 다른 가능한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 > 비현실적인 초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탕님의 글을 자세히 보면, 비현실적인 초인의 등장이 글을 문학에서 배제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을 어떻게 서술하는가' 입니다.
3. (7번의 내용입니다.)
1) 현재의 무협/판타지 소설들은 장르문학, 환상문학이라고 불릴 수는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주체로서 초인이 하나의 지배적 경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 초인이 하나의 지배적 경향이 되어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2) 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로크미디어에서 나온 '꿈을 걷다, 경계문학 단편선'의 글들이나 아주 극소수의 작가들이 풀어내는 소설들은 분명 문학의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을 주장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잠깐 조그만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로스 건국사'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다. 정상수가 지닌 미덕은 영지물이라고 불리는 철저히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초인)의 역할을 축소화시키고 봉건제, 관료제라는 새로운 주체를 등장시켰다는 것에 있다. 다만 그것에서 조그만 부조리를 느꼈을 뿐이고, 그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 > 사실 이 부분만 봐도 푸른하늘님의 판단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양탕님은 정상수님의 글 '아로스 건국사' 에 나오는 '초인' 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좀 더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을 표현했죠.
바로 이 점,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라는 부분이 위에서 설명한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 입니다.
정리할까요?
'초인의 등장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면 문제가 된다.'
라는 겁니다.
이 경우 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죠.
반면, 정상수님의 아로스 건국사처럼 '초인이 등장하더라도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봉건제, 관료제라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 등)' 이 있다면 문학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다른 요소도 필요하겠지만요.
제 3자의 입장에서 무례가 안된다면 제 생각을 기필하여 보겠습니다.
애초에 발단이 되었던 '김성모'작가와 '허영만'작가를 놓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애초에 양탕님이 말씀하셨던 초인의 '원맨쇼' 폭력성등의 이야기 등을 조합하여 보았을때 '럭키 짱' ' 마계대전' 같은 폭력적이고 주인공 만능의 이야기 인 김성모 작가와 '식객' '짜장면' '비트' 폭력성이나 그런 것들을 배제 하더라도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변화나 내용의 비화가 적은 '허영만' 작가는 지금의 논재에 좋은 비교 되상이 된다고 봅니다.
김성모 작가와 허영만 작가가 어떤의도를 가지고 기획을 하고 탄생되었는지를 알 수 없기에 애초에 판단은 하겠지만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애초에 둘다 '만화' 임은 푸른노을님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만화' 임은 givemecake님의 의견에 어느정도 공감이 가기고 합니다.
만화라는 틀에 다른주제를 이야기 하고 다른구성요소가 들어갔으니 다른해석 또한 존재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두분의 글을 읽어 내려오면 너무나 광범위하고 자기해석적이라 출발점과 주제가 명확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저와 또 다른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애초에 이러한 문장과 이야기성이 존재한다는 기준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다른 만화' 이기는 하지만 같은 만화이고 다른의미성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묵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givemecake님이 말씀하셨던 '다른 만화'임은 맞지만 그것이 두 만화가 가지는 가치성에 대한 비교는 아니라고 봅니다.
김성모 역시 학생이라는 신분의 폭력앞에 어려움이나 어른들의 무괌심이나 허영심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 할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임을 가만하여 주시면 감사.)
어차피 해석이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인데 다른생각을 지닌사람이 다 틀렸다고 하면 이 세상에 옳은 사람은 결국 한 사람만이 남게 되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죠.
부분적으로 다들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항상 여지를 남겨두고 이야기를 하셨으면 합니다.
왜 이런 광범위한 '구성' '주제' '문학적 가치' '현실성' '비화성' 같이 상반되고 동 떨어진 주제가 한 문장에 기필되어 그 논쟁을 이르키는 것인지 전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 것들은 따로 때 놓을 수는 없겠으나 함께 논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 합니다.
애초에 앙탕님이 주제를 조금만 더 좁혀주었으면 이런 다분적인 글이 많이 생성되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주제 자체가 토론하기에 적당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결론을 조심스레 내려봅니다.
부분적으로는 앙탕님이 기술한 글도 다 동의가 가능한 부분이 많고 그의 염려가 다분적인 글이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빡빡하고 결론지어진 끝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옳은 것도 많지만 너무 다른것도 많다는 것이죠.(틀렸다는 것이 아님)
해석의 다양성을 무시한채 광범위한 주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성립이 안된다고 봅니다.
4. 문학을 문학이게끔 하는 특성은 누군가 말한 바와 같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와 비슷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실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되는 배경을 무대삼아 작가의 세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이 같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비록 참여문학 쪽에 조금은 가까울지 몰라도.
5. 그렇다면 무협/판타지 소설이 문학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결국 초인(超人)의 문제와 연결된다. 무협/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초인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이 아닌 그냥 물리적 힘이 강한 이를 지칭한다. (정신적 의미에서 초인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작가(인간)는 스스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존재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인이 주체로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차별화되고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여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은 문학적 문법에서 굉장히 동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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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초인이 주체로 활동하여~이하의 문장는 물리적 힘이강한 초인이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신적 의미의 초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고과정을 거쳐서 정신적 성찰이된 초인에 대한 의견으로 변하는지 모르겠군요. 문학적 문법에서 동떨어진다는 건 4에서 정의한 앙탕님의 문학의 정의에 반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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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4에서 정의한 앙탕님 자신의 문학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환상문학의 현실성을 논한 글인데 '초인의 등장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면 문제가 된다.' 어찌보면 그리 될수도 있습니다. 초인의 등장이 아닌 환상문학에 등장하는 비현실성으로 대체하면 맞겠지요. 비현실성의 단적인 예로 초인을 드신것 뿐이니까요.
문퍼와님/맞습니다. 해석의 다양성은 존재하고,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의 거대담론을 만들어 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제를 그렇게 넓히지도 않았다는 판단도 듭니다. 초인이라는 주제로 폭을 좁힌 것이지요.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논쟁을 유도하게끔 약간은 자극적으로 쓴것이고요.
이것은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요. 전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생각이 다양하게 존재함을 인정하나, 그 생각을 긍정하지는 않습니다. 논쟁을 원천봉쇄하는 입장은 나나 상대방에게나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푸른노을님/저는 초인을 부정하지도, 그것에 가치 판단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초인이 존재한다고 현실성이 없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의미를 담은 문장도 없습니다. 오히려 초인이 장르를 장르이게 하는 장르적 도구라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 생각은 제가 쓴 게시물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여러 많은 분들이 글을 보면 저를 보는 선입관이 하나의 단단한 벽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에 뻔히 드러나는 의미가 왜 전해지지 않을까 고민해봅니다.
양탕님.
이 작은 글만 보아도 '주제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초인이라는 대두되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인지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인지' '상대주의적인 입장' 에 대한 이야기인지 다 중요하고 논점이 되어 이야기 할 만한 주에가 산재하여 있습니다.
적어도 글을 쓰려면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그 주제에 대한 평을 아주 열렬히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물론 하나의 주제만으로 이루어진 '구성'을 이야기 하는 것으 프로작가도 아니고 그것을 가만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고 양탕님의 의견역시 초인의 '원맨쇼'나 지나치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대비하는 것은 저역시 현제 문학의 오류이거나 상업성에 치우치는 전략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 '원맨쇼'의 가치성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문학을 출판할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 한다면 수긍 할 수 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의지와 상반되는 의견이기는 하나 '다른 관점에서' 본 '요지'이고 그렇다면 전과 다른 출발점에 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때 너무나 양탕님의 글은 많은 해석이 나 올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것을 수승할 필요는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주제 넘는 말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로크미디어에서 나온 '꿈을 걷다, 경계문학 단편선'의 글들이나 아주 극소수의 작가들이 풀어내는 소설들은 분명 문학의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을 주장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잠깐 조그만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로스 건국사'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다. 정상수가 지닌 미덕은 영지물이라고 불리는 철저히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초인)의 역할을 축소화시키고 봉건제, 관료제라는 새로운 주체를 등장시켰다는 것에 있다. 다만 그것에서 조그만 부조리를 느꼈을 뿐이고, 그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양탕님은 정상수님의 글 '아로스 건국사' 에 나오는 '초인' 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좀 더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을 표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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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mecake님 이건 앙탕님이 그 위에 쓴 걸 다시 읽어보시죠.
[ 이것은 읽는 이를 위해 굉장히 단순화시킨 도식이다. 만약 주인공(=초인)이 가진 힘이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에서 차별화되지 않고 초월적이지 않은 단순한 부가조건에 불과한 상태이고(즉 그것이 주체가 아니고), 우리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것은 문학의 수준에 근접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힘이 주체가 아닌 부가조건에 해당되기에 적은겁니다. 풀어보자면 비현실적인 것(힘)이 주체가 아니라 부가요소이고 다른 현실적인 요소가 주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풀어냈으면 되지 않았을까(이전 봉건제도어쩌고 글 참조) 했던 겁니다. 초인을 부정하고 안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어디까지나 현실성입니다. 후...
문퍼와님/이것은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문제인데, 에세이를 쓰는 제 스타일은 첫째로 현실태와 글을 쓰는 이유 혹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저만의 에피소드나 자극적인 문구로 먼저 시작하고 둘째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셋째로 문제제기에 대한 답안 도출과 그 근거를 갖다대는 작업을 하고, 마지막으로 결론내리고 다시 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자극을 하거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집니다.
물론 위에 열거한 각 부분마다 문장 하나하나 주제가 다양하고 명확하지 않다고 씹을 수야 있겠지만, A4 1~2장 분량의 에세이에 적합한 읽기 방식은 아닙니다. 저렇게 구성을 하는 그 구심점에 무슨 주제가 있고, 그것이 적합한지 부적합한지 판단을 해야겠지요. 제가 보기엔 그다지 산만하지 않은 글에 주제가 너무 다양하다고 말하면 조금 난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방금 위의 댓글은 문퍼와님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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