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독자에요님/
정사에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조가 도겸을 치며 서주의 백성을 학살해서 조조가 온다는 것에 유비를 따라 백성들이 따라간 건 정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운이 아두를 구해온 것도 사실이고 아두를 내던진 것도 정사에 있습니다.
사실 유비가 크도록 도와준게 조조입니다. 관도대전시 원소군 투항병들을 산채로 묻은 것과 서주대학살, 피의 숙청, 황제 겁박등이 모두 인의의 유비라는 타이틀을 조조와 반대 선상에 있는 유비에게 선사한 겁니다. 인의라는 명분때문에 떠돌아 다니면서도 그 어떤 군웅도 유비를 무시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진 이미지덕에 유비가 딱 한번 인의를 포기해서 서촉땅을 먹었음에도 큰 타격이 없었습니다.
서주대학살이라 하지만 전쟁중에 본보기로 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일종의 전략입니다. 적의 대항의지를 말살하고 공포심을 확산시키는거지요. 물론 이러한 강경책뒤에는 항복을 종용하거나 지배를 종용하는등 유화책이 뒤따르곤 합니다.. 이런일은 동서양전쟁을 불문하고 적지않게 등장합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건 칭기즈칸이죠. 서주대학살로 유비가 큰것이 아니라 유비가 촉을 먹었기에 성장한겁니다. 주객이 전도된듯 싶습니다. 실력이 없는 명분이란 공허한 메아리일뿐입니다. 유비가 촉을 얻지 않고 방랑을 일삼았다면 명분을 얻을 구실조차 챙길수 없었겠죠.
실제로 연의가 허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중 실제 정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삼국지 연의는 삼국지 정사를 기반으로 하여 칠실삼허의 소설입니다. 연의의 기본줄기는 정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관우의 영혼이 복수한다는 설정, 아니면 실제로 독우는 장비가 아니라 유비가 팼다는 것, 하후돈이 무력이 쎄지 안다는점, 황충이 오를 치기전에 죽엇다는 것, 장합이 퇴각하는 제갈량을 추격하다 죽은게 연의에선 만류하는 게 사마의지만 장합이 고집부려 가는 것이라면 정사상은 가기싫어하는 장합을 사마의가 보냈다는 점 정도의 큰줄기가 아닌 지엽적 성격의 차이일 뿐입니다.
정사 《삼국지》에서의 적벽대전
① 《삼국지》에서는 〈위서〉 무제기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매우 간략하게 적혀 있다.
원문 : 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 備遂有荊州, 江南諸郡.
번역 :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② 손권은 주유· 정보(程普 2세기말~220년대)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삼국지』 <선주(유비)전>)
③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조조)에 대항하였다. 조공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삼국지』 <제갈량전>)
④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삼국지』 <주유전>)
⑤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삼국지』 <오주전>)
⑥ (정보)와 주유가 좌·우독이 되어, 조공을 오림(烏林)에서 물리쳤다.(『삼국지』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
-출처위키백과-
수전에서 패했지만 퇴각한이유는 역병입니다.
너무 염세적인 관점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대체역사물을 쓰는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같은 꿈을 꾸다는 글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론을 표현하고 주인공을 통해 실현되는 모습을 보며 만족감을 성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다고 봅니다.
이상이 몽상일 뿐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과는 다르다고 일침하는 것은 너무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요?
같은 꿈을 꾸다는 사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이득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를 봐도 수많은 이들이 실리가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고 성과를 얻고 지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일부 소설에서 노예제도 폐지 및 민주화를 이루는 것처럼 뜬금없는 경우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으로도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이상에 관해서라면 현대인의 지식과 주인공의 먼치킴스러움을 통해 힘을 결집하고 실현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거란 생각입니다.
장르문학을 얘기할 때 빠질 없는 단어가 환상문학, 환타지란 단어일 겁니다. 그런점에서 어느정도의 유연성의 허용되도 좋지 않을까요?
현실적인 대안도 없이 이상논리만 펴고 모든일이 만사형통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전개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대체역사물은 그 시대에 통했던 방법이나 가치관과 대립되는 인물이나 생각을 보이면 불편해지지요. 대체역사물에서 그 시대 전쟁,인물,생활상같은 것이 설정인데 뜬구름잡는 이상론만 늘어놓으니 문제지요. 조조라고 이상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그 이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설득력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행동은 우유부단하고 이리저리 쩔쩔매며 이상론만 펴는 주인공한테 모여드는 타~투와 인재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도가 지나친거 같습니다.
문학을 읽고 쓰는 이유 중 하나로 대리만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실이 삭막하고 힘들다고 해서 읽고 쓰는 소설에서까지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만 있을까요? 최소한 글속에서나마 꿈꾸어 오던 이상이 실현되는 유토피아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할 겁니다. 같은 꿈을 꾸다 역시 같은 맥락에 있는 소설일 겁니다. 독자에요님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할것은 현실주의 소설이지 대체역사물이 아닙니다.
소설속의 인물들이긴 해도 개개인의 가치관과 행동이 본인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그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작가가 설정한 작중 성격이 다르다면 몰라도 그것 아닌 이상에는 개인의 취향에 가깝지 비판받을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뭐 해석하기 나름이고, 가치관의 차이가 있겠지만, 수한을 다른 재사들이 추종하는 이유가 그냥 예와 인을 강조해서였던가요..?? 저로서는 원술밑에서 더 좋은 방법은 안떠오르던데.. 군주론이나 현실을 직시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서라..흠.. 일단 원술한테 신임얻기도 힘들테고, 주인공 그냥 부장급의 아들입니다만..?? 어디 군주도 아니고.. 거기다가 그런식의 행동을 취하지않았다면 진작에 죽었을듯... 원술의 인물성격이 실제로도 칭제할정도로 자만심에 똘똘 뭉친넘일지 사관이 그렇게 해석한것인지 알수도없고, 그런상황에서 야심을 보인다는것은 죽을뿐이죠.. 최대한 명리에 초월한듯 보여야 권력에 개입하기도 쉬울테구요.. 또한 그렇지않더라도 원술하고 샤바샤바해서 어케저케 했더라도.. 다른 인재들이 그런 상황에서 밑으로 들어오려 할까요? 조조나 원소가 훨씬 매력적일텐데... 원술밑에 간신배 같은넘 있는데.. 거기서 무슨 법을 중시하던,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든간에...또는 현실적으로 제일 가능성이 있더라도 보나마나 토사구팽가능성이 높은데... 즉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수한이 어쩌면 이상론을 추구할지라도 인의에 어긋나지않는 선에서의 방법을 채택했지만, 결과가 최선이었기때문에 재사들이 감탄했다고 해석했는데요... 물론 게임이라면 그냥 다버리고 신세력 구축하거나 유비나 조조밑으로 갔겠지만.. 그럴수도 없는것이고.... 또한 민심을 추구하는 방법이 최소한의 물질적행복 추구방법이고, 또한 준법과 준칙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행동하는건데 그게 실제 지금의 현실에 부당하더라도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현대인이 삼국지 세계로 환생했다고 쳤을때 개인적으로는 수한의 방법말고는 더 좋은 방법이 없지 않나요...(지략이 매우매우 뛰어나서 중국지형 다꿰고 있고, 애들 성격이 정사나 사관에 나온것이나 게임에 나온것처럼 딱딱떨어진다면 모를까...) 부국강병추구하고, 최소한 이사람은 나중에도 같이할만한 사람이라는것을 보여주고, 그렇다고 크게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는...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수한은 상당히 처세술도 훌륭히 잘한편이고, 공맹주장하는것도아닌데.. 대리만족적인 면에서 능력치가 낮아서 불만이시라면 모를까... 가치관의 문제는 좀....아닌것 같네요..
장수들한테는 동질의식을 심어주고, 적어도 인의와 공정성 그리고 자기몫을 낮추는 배려를 보여줌으로써 끝까지 함께갈만한 사람이란것을 보여줬고....
병사나 백성에게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전화로부터의 안정성.. 그리고 역병등에 대처하는 위정자로서의 자세를 보여줬고....
여기서 민심=>인구증가=>물자증가=>부국강병+사기심고취 등을 통한
세력강화가 이뤄졌죠....
마지막으로 원술 사위자리도 낚았고..
딱히 현실을 직시해서 뭐 다른 행동할게 있나요..? 제가 재사는 아니지만 그당시 재사라면.. 아 주인공 좀 쩌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담할꺼같은데...안갈이유도 없구요...
인의로 명성낚시해서 백성들 낚아와... 장수들한테는 베풀고 대접해주니 갈만한데다가 세력도 쎄.. 거기다가 군주 사위자리니 군주될가능성도 있네..?.... 이건 뭐...다된밥 아닌가요;;..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
이 글은 허구를 담고 있으므로 현실과 동일시하지 말기 바랍니다.
정사를 바탕으로 삼고자 하지만 기본적으로 글쓰는 이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담긴 평행 세계관에 가깝습니다. 참고할 사서의 종류는 많고 그 사서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과 지식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 상상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서를 참고하다 보니 정사와 연의, 또는 기타 사서의 내용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삼국지라는 이야기의 특성상 사실관계에 대해 서로 아는 지식들이 상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이런 시각의 글도 있구나 하는 차원에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에 대한 지적, 선작, 추천, 코멘은 항상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너와 같은 꿈- 머리글 발췌.
애초에 이 글을 적고 시작한 글에 벗어난 의견이 안 보이는 것같아 적고 갑니다.
독자에요님의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칠허삼실이라는데 양팔을 번쩍 들고 동의하고 싶네요.
실제로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 특히 삼국지(연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를 쓴 진수는 제갈량을 매우 비판했죠. 내정에는 훌륭했으나, 실제 전략을 구사하는 데에는 미흡했다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 내용 중 육출기산이라거나 관우를 신격화하는 내용들은 정말 허구 만빵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독자에요님의 말씀대로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의 삼국지' 팬픽임이 분명하구요.
실제 역사가 손을 들어준 사람은 유비가 아니라 조조입니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실제 유비가 세운 '촉'의 대신이었지만, 유비를 정통이 아니라(실제로 그는 유비를 선주, 유선을 후주라는 식으로 기록했죠. 황제가 아니라요.) 조조를 정통으로 내세웠습니다. 단순히 촉이 멸망하면서 위나라에 몸을 의탁해서 그런 것만은 절대 아닙니다.
그에 비해 삼국지연의는 천년도 더 지난 후세에 쓴 '소설'일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삼국지연의만 수십 번 읽고 나서 조조를 폄하하는 것은 정말 달을 보지 않고 손을 보는 격이지요.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요. 저는 독자에요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기 때문에 길게 댓글을 달아봤습니다.
그리고 진수는 제갈량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고 존경했던 편입니다. 다만 제갈량과 맞싸운 사람이 진수가 신하로 있던 진의황제 사마염의 직접적이 선조인 사마의 였기 때문에 그 칭송의 수준에 엄청나게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에도 진수가 사마염에게 제갈량관련 내용을 언급하면서 죽여주십시오 하고 사죄를 하는 식의 내용이 있습니다. 진수는 훌륭한 역사가였지만 사마천처럼 죽을각오하고 공정하게 역사서를 써야 겠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진수가 제갈량에 대하 말한 것은 진황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수위를 조절한 것이라는 것은 감안해야 할일입니다.
저는 진수가 과연 제갈량을 존경했는지 의문입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갈량을 평가하면서 맹자의 진심상(盡心上)편을 약간 바꿔서 인용했습니다.
맹자의 진심상
孟子曰 以佚道使民 雖勞 不怨 以生道殺民 雖死 不怨殺者
편안한 도로써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사는 도로써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죽인 자를 원망하지 아니한다.
진수의 진심상
以逸道使民 雖勞 不怨 以生道殺民 雖死 不忿
백성을 편히 살게 해줄 목적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부리면 백성들은 비록 고생스러워도 원망하지 않으며, 백성을 살릴 목적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죽이면 그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진수 왈, 매해 백성을 동원하여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임기응변과 전략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말은 위를 정복할 만한 깜냥도 안 되는 제갈량이 매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백성들은 죽으면서도 제갈량의 감언이설에 속아 기쁘게 전장에 나가 죽어나간 것 아닙니까?
저는 진수가 그것을 비판한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게 아니더라도, 제갈량이 삼국지연의 때문에 엄청나게 포장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유비 또한 마찬가지죠. 아니, 유비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실책이 많은 군주였습니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를 정통으로 삼고 미화에 미화를 거듭해서 그 실책 또한 아름답게 보이게 잘 '각색'했을 뿐입니다.
물론 칭찬 받을 점도 많고, 많은 역사가들이 제갈량과 유비를 칭찬했지만,
또 다른 많은 역사가들이 그들을 비판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북송 때의 대신 하거비는 공명을 이렇게 평가했죠.
공명에게는 입지의 뜻은 있었으나 성공의 도량은 없었다. 군중을 모으는 인덕은 있었으나 군중을 부릴 줄 아는 지혜는 없었다.
물론, 얼마든지 반대의 의견을 제시한 역사가들도 많으며, 일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케릭터를 가지고 거기에 감정이입을 해 진짜인양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댓글을 마치겠습니다.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
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
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
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識治之良才)로 관중, 소하
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應
變)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지막만 보면 그런 것 같겠지만 전체적인 진수의 평을 보면 분위기가 틀리죠... 관중,소하에 버금갈만 하다라는 말만 해도 충분할 것 같네요.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
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
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
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가서, 몸소 밭갈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
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
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
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
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
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군대,군
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법과 교령)을 엄명히 해 상벌
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 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천하)를 진탕(震蕩-뒤흔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
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군사를 다스림.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기이한 모략)
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
므로, 이 때문에 여러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
(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
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
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시경 감당편)에
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
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문장,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여러 번 반
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순임금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
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
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문장)에 드러
나 족히 그 의리(意理-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
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 죄
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제가 위에 언급했던 진수가 진황실에 올리는 상소문 이구요. 그리고 진수의 진심상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은 사실 진수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진수의 스승인 초주의 의견에 가깝습니다. 그 학풍을 이어 받은 진수가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하는건 스승의 의견을 거스르는것이 되고 유교적인 규범이 엄청 강했던 시대상으로는 패륜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립니다. 당연히 그대로 의견을 이어 받았던 것이구요.
하지만 진수는 초주의 의견을 이어 받긴 했지만 생각이 틀렸던 것은 위에 글들이 다 보여준다고 생각되네요. 저 장문들의 글에서 굳이 진수가 제갈량을 비판하는 부분이라고는 리짱님이 언급하신 그 부분이 유일합니다... 당연히 진수가 제갈량을 추앙했다는 것이 맞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죠.
게다가 위에 내용 그대로 진수가 제갈량을 비판했던 부분은 군사적인 부분에 불과하고 그 맞상대가 주로 사마의 였다는 본다면 진황실을 의식해서 나온 말에 불과했다는 것은 충분히 나올 만한 결론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건 자기 의견이지만 조조가 나쁜놈인지 아닌지는 명확합니다. 그건 다른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민간인 학살이 어떻게 전략이고 할 수 있는 일인지...
백기와 항우가 포로 생매장으로 욕을 먹은 것보다 비교도 안되는 것이 민간인 학살이죠. 그것도 자국민입니다. 서주는 조조가 살던 한나라 백성 아닌가요? 자기 나라 백성을 윗대가리가 자기 맘대로 안 된다고 죽인 것 자체가 싸이코패스 보다 더 한거죠.
어떤 암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능력 있는 개차반이라는 거죠.
군인은 현대도 과거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근데 민간인은요? 조조를 보면 왜 인의의 유비라는 것인지 알겠더군요.
조조가 저리 악마같은 놈이니 상대적으로 유비를 칭송할 수밖에 없죠.
웬만하면 글 안적으려고 했는데 물달개비님 개소리좀 그만하세요. 유비가 무슨 요순시대입니까? 촉이 풍요롭고 살기좋았다는 소리는 개소리중에 완전히 개소리입니다. 촉지역 자체가 평지가 적은 땅이어서 풍요로운적이없습니다. 진나라가 유럽꼴나서 풍요로운 유비를 좋아한게 아니라 송나라가 남쪽으로 금나라한테 쫓겨나면서 촉한 정통론이 생긴겁니다. 당나라때에만해도 조조는 영웅이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조조를 칭송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참고로 촉의 멸망원인중하나가 외부에선온 인원들때문에 경제가 파탄나서라는 말이있을정도로 촉지역은 좁은지역입니다.
왕부지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들을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진수의 상서문 中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이게 요순시대때 들은 평중 하나인 道不拾遺거든요. 파성넷 제갈량전 원문에도 이 한자 그대로 나옵니다. 뭔뜻인가 하면 법이 잘지켜져 나라가 태평하다 이뜻이죠.
하이아칸님 짱이시네요. 제갈량 집권당시 촉이 살기 좋았다는 기록은 지천에 널려 있거든요. 그 모든 사료를 개소리로 치부하고 내말이 맞다고 개 거품을 무시는 꼬라지가 정말로 광견병 걸린 개같으시네요.
성도지방은 분지내에서는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비단, 암염, 철재 생산등으로 풍부한 지역으로 널리알려진 건 사실입니다. 그외 지역이 험악한 산악지형이 많아서 그 규모가 크진 않지만 일국이 부유하게 쓸 정도는 충분했었었죠. 그래서 촉한도 잦은 전쟁에도 나라를 유지해 나간 것이죠.
실제로 촉한정치가 피폐해져 등애에게 나라가 망했을때에도 성도창고에는 비단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천의 비단은 촉금이라고 해서 중국 전역에 고급비단으로 유명했었는데 유선의 정치가 흐지부지 하니 그런 부를 가지고도 제대로 경영이 안되서 동오의 사신에게 나라가 썩어간다는 식의 악평이나 들었었죠.
진나라 시대에 그유명한 거부 석륵도 사천지방의 물품을 형주지역에서 장강을 통해 운송해 그것을 강남에 팔아서 그 부를 이룩한 것이죠.
촉한정통론과 조조에 대해서는 확실히 후대로 갈수록 촉한정통론이 강화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이미 위진남북조시대에 동진에서 시작된 것이라 송나라 때문에 생겼다는 말은 와전입니다. 나관중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구요.
어느정도는 촉이냐 위냐는 이미 초기부터 논쟁거리 였던거죠. 그게 점점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촉한중심으로 흘러 간것이구요. 아마 그건 유교가 점점 중요하게 자리잡아갔기 때문에 조조의 찬탈자라는 명분론이 걸리고 학살자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명분론이야 학자들상에서는 촉이냐 위냐 오고 갔지만 민중들에게는 언제나 촉이 중심이였는데 조조가 서주학살을 벌였던 전력이 잇던게 아주 컸을것 같더군요. 어느 백성들이 군주가 능력있던 말던 자기들 죽였던 전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겠나요.
결국 시대가 흐르면서 조조역할을 하는 배우가 관중들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조조에 대한 악감정이 깊어지죠. 게다가 통치자입장에서도 찬탈자역할을 했던 조조보다는 충효를 강조한 촉을 미는게 민중지배 입장에서도 더 편했거든요. --;
이세민이 조조의 무덤을 지나가면서 그를 칭송하는 시를읽기도 하죠. 그리고 촉지방에대해서 대단하다고 하는 내용을 이야기하시는데 원래 촉지방은 초나라영토였다가 진나라로 넘어간걸로 중국시대 어느땅이든지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땅이없다고 나오는 땅중하나입니다. 유방을 촉지방에 항우가 준것은 일국을 가꾸기에 힘든땅이기에 준거지 그땅이 좋아서 준것이아닙니다. 진나라가 촉지방을 바탕으로 성장했다고하는데 그이전에 진나라는 이미 최강대국이었고 그 촉을가지고 있던초나라는 그땅을 빼았기고도 강대국이었습니다. 유비를 제외하고 촉지역에서 제대로된 정권이 안나온것만봐도 그땅이 생각처럼 대단한땅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땅에서 그정도로 버티고 성장한것이 대단하다는 거지 그의 전쟁수행능력이 대단하다는것이아닙니다.
삼국지에보면 어떤땅이든지 다 대단하다고 나옵니다. 실제로 형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 그 어느땅도 대단하다고 부를만한 땅이없음에도 모든땅이 엄청나다고 나옵니다. 동오지역은 사람이없고 개발이 안된땅이 더 많음에도 보면 그 땅도 무지 좋은땅이라고 나오죠.
그리고 동진시대부터 촉한정통론이 있었다고 하는데 촉한정통론은 송나라가 맞습니다. 실제로 관우에게 시호를 내린 시기도 송나라입니다. 특히 남송이 되면서 북쪽금나라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내세운것이 바로 촉한정통론이고요.
마치 전두환 노태우정권때만해도 욕만먹던 이승만정권이 이번정권들어서 구국의 영웅소리듣고 건국 50주년 이야기가 나오는것과 같이 촉한 정통론은 바로 정치적 술수인거지 백성들이 기억하고 좋아해서도 아닙니다.
백성들 이야기를 하시는데 공손찬은 그당시 최고의 명망있는 황족이던 유우를 죽인인물입니다. 그당시 시각에선 서주학살의 조조보다 공손찬이 더 나쁜인물입니다. 같은꿈을 꾸다에 나오니 아마 잘 아실겁니다. 그럼에도 공손찬에대해서 정사를 알기전에 안좋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있습니까? 그당시 백성들이 조조를 싫어한것은 서주학살보다는 오히려 그의 출신성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정도입니다. 조조가 헌제를 나름 대우해주었지만(물론 헌제입장에선 아니지만 그당시 조조만큼 대우해줬을 사람은 아마 없었을거 같네요) 그 반발은 이각, 곽사보다 더 심할정도였습니다. 원술같은경우 별능력도 없었음에도 큰 세력을 일구고 오나라의 능력있는 손씨일가가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지 못한것이 바로 출신성분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안타깝게도 얼마만 시간이 지나면 단편적인것을 제외하고는 잊어먹는게 현실입니다. 서주대학살을 기억해서 조조를 아닌 유비를 따른다는말은 우리나라가 6.15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만들었음에도 결국 독재정권을 찍어서 보통사람 노태우가 다시 대통령이된(뭐 여러가지 선거에 문제점이있었지만) 경우만 봐도 알수가있듯이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서주대학살을 기억해서 조조를 싫어한 한나라시대 백성보다 광주학살을 한 전두환, 노태우를 찍은 현재의 우리가 더 못한겁니까??
삼국지 연의가 삼국지 정사를 바탕으로 나관중이 나머지는 창작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삼국지 연의는 정사에 배송지주, 삼국지평화와 삼국사략. 등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겁니다. 나관중이 촉에 좋은 걸 써야지하고 정사에 없는 내용을 붙인게 아닙니다. 돌아다니는 야사나 야담집을 모아놓은 삼국지 평화에서 나온 재미있을 내용도 차용해서 쓴게 삼국지 연의입니다. 나관중 시기의 사람들의 삼국지 인물 인식상에서 나관중은 촉빠가 아니라 조조빠에 가깝습니다. 조조를 그정도로 매력있는 인물로 그려냈으니까요. 그이전에 돌아다니던 야사나 야담에서 조조의 인식은 글세요, 동탁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겁니다. 그나마 삼국지평화에선 한신의 후생으로 그려졌지만. 삼국지 평화도 촉 중심입니다. 거기에 특이하게 장비가 주인공이라 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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