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제목을 썼지만 한참 전부터 나타났던 일이긴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게 무슨 변화라고?’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지 않을까 싶고요. 하지만 이게 무슨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판타지는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와 가까울 듯 한데, 다를 수도 있겠네요. 애초부터 저는 ‘정통 판타지’란 용어 자체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냥 ‘중세 전후 서양을 모티브로 삼아 가상의 세계관을 내세운 판타지’에 대해 논하는 글이라 이해하시는 편이 편할 듯 합니다.
1. 모험활극 위주로 시작된 판타지, 점점 전문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깔기 시작하다
극초반의 판타지 중에는 모험활극을 근간으로 삼은 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주인공이 꿈 많은 소년이었든, 강인한 검사였든, 뛰어난 마법사였든, 뭐든 간에 ‘모험가’로 활동했죠. 그래서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사건도 해결하고, 마음에 안 드는 놈 두들겨 패고 자유분방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덤으로 그때는 판타지를 쓰겠다고 뭔가 많은 자료를 검토하는 경향도 덜했던 듯 합니다. 트리비아, 잡지식들을 입수하기 참 어려웠고, 작가든 독자든 판타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중세~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이해도도 비교적 낮았으니 덜 신경 썼으니까요.
뭐.... D&D 룰이나 서양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 설정, 일본 판타지 만화의 설정을 차용하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이건 좀 다른 듯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이야기를 쓴다기보다는 ‘다른 창작물을 모방하거나 재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이야기를 쓴다는 느낌에 더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많은 판타지물이 나오고, 더 이상 ‘주인공=모험가’라는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 판타지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뭐 영지물처럼 ‘비교적’ 고정된 장소를 본거지로 삼고 활약한다든지, 정치물처럼 어느 세력에 속해 암투를 벌인다든지, 모험물처럼 주인공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긴 한데 조직적인 병력을 이끌고 정복활동을 해서 느낌 자체가 다르다든지 등등등.
그리고 모험활극이 아닌 판타지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갈수록 전문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삼는 판타지도 늘어났습니다. 중세 유럽의 무기, 병과, 생활 풍습 등의 역사 지식이라든지, 당시 화폐 제도나 시장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경제학적 지식이라든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전술과 전략 지식이라든지.
나아가 고도의 필력을 요구하는 소재를 다루는 판타지도 늘어났죠. 삼국지처럼 여러 나라, 여러 인물이 등장해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모험활극물이 넘쳐나던 초기에도 이런 이야기는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주인공의 모험 스케일이 너무 거대하다 못해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됐다’는 느낌이 들었지 ‘저 소설 삼국지에서 모티브를 따왔구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간 ‘주인공 개인이 성취를 해나가는 이야기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나타나는 소설은 ‘주인공 개인의 성취와 경쟁자들의 성취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과 경쟁자들의 대결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묘사하려 하고 있죠. 뭐 그러다 결국은 ‘주인공 개인의 성취 이야기기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집필 초기의 의도는 ’판타지 버전 삼국지를 쓰겠다‘였으니...
어쨌든 이러한 변화가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냐면...
2. 판타지가 무거워졌다
전문 지식을 도입한 결과, 삼국지처럼 큰 스케일을 지향한 결과, 판타지를 가벼운 읽을거리라 부르기 애매해졌습니다. 왜냐면 전문 지식이나 큰 스케일이 도입된 소설을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정독을 해야 하거든요. 작가 필력에 따라서는 관련 지식이 조금도 없으면 읽기 버거울 수도 있고요.
예컨대 서양 검술을 예로 들자면... 그것 자체는 아주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휙휙 휘두르고 몸을 180도 돌려 피한다는 둥의 기존 전투 묘사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니까요. 공격을 공격으로 상쇄하거나, 건틀렛을 이용해 상대 검을 붙잡고 잡기 기술을 걸거나, 검날로 타격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폼멜 타격이나 하프 소딩으로 적을 제압하거나 등등.
하지만 실제로 써보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독자가 모르는 원리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묘사도 해야 하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독자가 이해를 못해서 책을 덮어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 일쑤기도 하거니와.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옥스 자세에서 찌르기를 날리고 다시 봄탁 자세로 돌아가 존하우를 날렸는데 상대가 즈버크하우로 막아내더라’ 뭐 이런 거 말입니다)
실제로 서양 검술을 주소재로 삼은 소설을 문피아에서 몇 봤는데 조회수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 이유야 복합적으로 있겠지만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지식이 도입됐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반대로 서양 검술을 도입한 소설 중 인기를 끈 소설은, 서양 검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폭풍 성장하는 주인공, 고위 마법 못지 않게 파괴력 있고 신비한 스킬,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구조 등을 도입했습니다. 좋은 판단이었다 생각합니다)
여튼간에 전문적인 지식을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하는 건 좋았으나, 아직은 그걸 재미있게 포장하는 연출이나 기교가 덜 연구된 듯 해요. 그러는 동안 한때의 게임 판타지나 지금의 현대물, 회귀물이 ‘차세대 가벼운 읽을거리’로 떴고, 일명 ‘전통 판타지’가 약세를 나타내는 상황이 나타난 거 아닌가 싶습니다.
3. 그래도 ‘변화’ 자체는 긍정적이다
허나 전문지식을 도입하거나 스케일을 크게 키워 판타지를 쓰는 노력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소비자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선한 재미를 구현할 수 있으니까요.
소설은 아니고 게임 이야기지만, ‘월드 오브 탱크’라고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전차들을 조작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포탄의 관통력보다 장갑의 방호력이 높을 경우 탄이 튕겨나가 대미지를 주지 않는 도탄 효과를 철저히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탄을 튕겨내려면 나름 세련된 조작을 해야 합니다. 약점을 가려야 하고, 장갑이 비교적 얇다면 차체를 살짝 틀어서 포탄이 빗맞도록 유도해야 하고요. 전차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저, 쏴서 맞추면 무조건 대미지를 줄 수 있는 FPS만 즐긴 유저들은 이해하기 까다로워 합니다.
하지만 그런 까다로운 면이 있는데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컨트롤만 잘하면 포탄을 튕겨내며 적에게 반격을 날릴 수 있다니, 맞으면 무조건 피해를 받는 게임에는 없는 신선함이 있었으니까요.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밀리터리/메카닉/SF의 무덤으로 불리는 게임 시장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전문적인 지식을 도입해 차별화를 꾀한 게임이 성공을 거두듯, 판타지 소설도 못할 건 없다고 봅니다. ‘늑대와 향신료’처럼 경제적 지식을 도입해 신선한 재미를 준 소설도 있고, 비록 오류는 많지만 경제적 요소를 도입해 마왕과 용사가 싸우지 않고 협력한다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낸 ‘마왕 용사’도 있고요. (우리나라 사례가 아니란 게 함정이지만)
혹은 역사를 참조해 중세 기사의 몰락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보통의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시대의 변화로 생기는 갈등 이야기’를 구현해낸 것도 있고요.
여튼 전문적인 지식을 어떻게 재미와 결부시키냐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여러분들이 정통 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에 큰 변화가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독자 연령대가 점점 올라가서, 작가가 친절히 설명하기만 하면 어지간한 전문 지식은 금방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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