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성공적으로 감추고 살아왔으나, 사실 저에겐 심각한 난치병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하여 ‘교정증후군’.
심각하고 난치라서 그렇지 그리 희귀한 병은 아닙니다만 저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여간해서는 욕구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삽니다.
특히 웹상에서는요.
그런데 얼마전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쓰다” 와 “적다”의 혼동입니다.
다른 건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건 진짜 안 넘어가지더군요.
단순히 문법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그런 실수가 몇 페이지 넘어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니까 찾진 마세요. ㅋ
사전에서 “적다”를 찾아보면 “쓰다”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사전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한 정의항이 아니라 용례입니다.
초록색 포털 사이트 사전을 보면
1. 어떤 내용을 글로 쓰다.
2. 장부나 일기 따위를 작성하다.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용례를 보면
- 답안지에 답을 적다
-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다
-그녀는 메모지 위에 이름 하나를 적어 내게 넘겼다
- 아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계부를 적는다
- .... 장부를 꼼꼼하게 적고 계셨다.
- ... 장부에 적어 두는 것만으로도 .....
- 선생님은 .....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셨다
- 형사는 수첩을 꺼내 거기 적어 두었던 기록을 ....
-... 이런 문구까지 적어 놓았다....
등입니다.
공통점이 보이시나요?
일단 하나같이 아주 간단하고 짧은 메모, 또는 항목 정도에 국한되는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여기에 다 옮기지 않은 다른 용례들을 모두 포함해서, “적다”라는 동사는 펜을 들고 글씨를 쓰는 동작을 포함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꼭 펜을 들어야하는 건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마트폰에 메모하는 것도 적어두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설에는 적용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단지 긴 글이어서가 아니라,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사항들을 그저 기록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기록하는 것 뿐이다, 라고 항변하실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어휘력 부족일 뿐입니다.
“글을 쓰다” 나 “소설을 쓰다”가 좋습니다.
“글을 적다” 와 “소설을 적다”는 어색합니다.
자신의 창의적인 글 쓰기를 단순한 기계적인 작업으로 스스로 폄훼하지들 마시라고, 잠 안 오는 밤에 한 마디 참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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