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살아남기』시리즈의 학습만화가 유행했습니다. 무인도에서, 화산에서, 남극에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 느끼기엔 다소 유치한 내용에 정보의 신빙성도 마냥 신뢰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그 책 한권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내가 그런 곳에 간다면 책에서 읽은 것처럼 물을 정수하고, 나무테로 위치를 확인하고, 눈을 파서 체온을 보존해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지에서도 극지에서도 살 수 있을거라 자신했던 아이는 사회란 정글에서 살아가기 위해 버둥대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몇 가지 재주와 기술로는 내일의 생존을 장담하기 버거운 곳이었습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해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나에게 온기를 주기엔 세상은 너무나 차가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살아가는 것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어찌되었건 이 세상에 집어던져 졌으니 악다구니를 써봅니다.
코리타의 작품은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저에게 작은 즐거움과 위로였습니다. 전작『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에서 작가 코리타는 게임 속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떨어진 에드 로스테일러의 발버둥을 그려냈습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미래를 계획하고, 내일의 준비를 합니다. 마치 저처럼, 아니 우리 모두처럼요.
신작 『로판에서 살아남기』의 주인공 설태평 역시 전작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 내던져집니다. 주인공은 반역으로 멸문을 당한 명가인 화용설가의 생존자입니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경원시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맨스판타지가 배경인 만큼 그는 이야기의 주역이 아닌 겉가지에 불과합니다. 그의 고난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열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숙비를 간호하며 말합니다.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의 확률일지라도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절대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둔해보이고, 무의미해보여도, 삶을 포기하는 일 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설태평은 세계관에서 무용하고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왜 그곳에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 같은 의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의 의지를 놓지 않고 살아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의도적으로 해치거나 짓밟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문에 원한이 있는 귀비의 긴장과 떨림에 그는 생각합니다.
“부끄럽다 ...(중략)...귀비가 얽히니 어쩌니 하는 것들도 온전히 내 문제에 불과한 것인데. 화용설가에 대한 귀비의 진심어린 원한을 도구 취급이나 하면서. 내가 살아남겠다고, 매 순간 순간 진심으로 살아온 자에 대한 경의는 내다 버린 것인가. 그걸 사나이라고 할 수 있나?”
코리타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글솜씨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고루하지 않게, 웹소설의 즐거움이란 맛을 한껏 살려가면서요. 아직 코리타의 글과 설태평의 여정은 시작점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의 여정을 함께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 될 거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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