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앞두고 지방 쓰려고 교본 펼쳐놓고 붓 길들이다가 어차피 요즘 한자도 안쓰는데 이게 뭔 꼰대짓이냐 싶어서 괴발개발 쓰고 말자는 생각에, 다 걷어치우고 가볍게 읽을거리나 찾으러 문피아를 어슬렁거렸습죠.
그러다 눈에 띈 제목이 '농사짓는 프로듀서'. 제목만 봐서는 정체가 짐작조자 안가는 괴팍한 작명실력에 집나간 어처구니를 찾지 못하고, 그래 습작 아니면 약빤 괴작이겠구나 싶어서 읽어보게 되었답니다.
헌데 읽다보니 제목에선 상상도 못했던 웰메이드 연예계물이네요.
다만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냉정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농사짓는 게임으로 포인트를 번다는 괴랄한 소재를 도입했고, 농사와 연예계물을 연관지어 그럴듯한 제목을 지으라면 눈앞이 캄캄해지는게 인지상정이라 저런 제목이 나오게 되었구나 하는 깊은 공감을 하게 되더랍니다.
도입부가 사람을 쫙 빨아땅기는 맛은 부족하나, 첨단유행(?)에 걸맞게 발암요소 최적화를 잘 했고,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묘사 대신 압축과 스킵으로 엑기스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장르판의 효자중의 효자인 만능 핸드폰 요정이 등장해서 빠른 전개와 농축된 재미를 추구하죠.
말인즉슨, 개인적으로 격하게 애정하는 식상하고 뻔하지만 우리고 또 우려도 재미만큼은 아무도 부정하기 힘든 잘 다듬어진 그밥에 그나물 비빔밥이란 소리입니다요. 아주 독특한 고명을 올려서 맛난 신제품으로 만들어주셨네요. B급감성에 지배당하는 사이다패스 독자라서 이런 욕망에 솔직한 글 너무 사랑합니다.
특히나 이 글이 고마운것은, 읽는 사람을 웃게 해주려는 작가님의 눈물나는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에요. 나잇살이 찔수록 웃을일이 적어져서 티비도 예능만 보고 글도 웃긴거만 찾아보게 된 신세인 만큼, 무척 고마운 부분이죠.
이걸로 웃으면 빼도박도못할 아재다 싶은 작위적인 시츄에이션 앞에서 꾹 참아보려 해도, 어쩔 도리 없이 아재감성을 촉촉히 적셔주는 철지난 드립들이 피식 피식 김빠지는 소리를 내게 해주네요.
웃기고싶은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정작 떠오르는 드립들은 자조를 넘어 자괴감에 빠지게 할만큼 닳아빠진 개그센스들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그 서글픔까지도 노골적이라서 공감을 넘어 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라 웃어서 자존심 상하는 희한한 경험도 선물해주고요.
밤부터 읽기 시작해서 새벽이네요. 독특하고 개성있는 글을 찾으시는 분들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피식 피식 웃을거리를 찾으시는 분이라면 시험 전날 서랍장 정리하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술 잘 읽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서 추천을 남기고 자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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