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감상, 긴 인용 ^^;;
몸이 거구여서인가. 한번 손가락을 밀어넣을 때마다 그의
코에선 염소똥만한 코딱지가 묻어 나왔다. 양몽산은 드러누운
채, 코딱지를 둥글둥글 말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미동도
않고 있는 백무흔에게 손가락 끝에 묻어 있는 코딱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소백(小白), 이게 뭘로 보이나?"
백무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짤막한 어조로 대꾸했다.
"천하(天下)."
순간, 양몽산은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핫하……."
입은 큰소리로 웃고 있으되 그의 얼굴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으며, 이윽고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그
치고 난 그는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도 권세가 좋은가? 명예가 사랑스러운가?"
"나는 다만 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변명하지 마라, 나귀창자 같은 놈. 너같은 놈을 사람들은
소위 영웅이라고 말하지. 그러나 나는 싫다. 자고로 영웅이란
작자들은 그들의 야망을 위해 천하를 어지럽혀온 무리들이야.
"
"그러나, 세상은 그런 소수의 인간에 의해 움직여진다."
"빌어먹을!"
양몽산의 음성이 커졌다.
"영웅을 따라 전쟁터로 나간 군사들은 태반이 죽는다! 그럴
때 과연 그 영웅들은 죽는 군사의 혈육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
을 안단 말이냐? 남편의 시체를 끌어 안고, 자식의 시신(屍
身)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아내와 부모의 마음을 네 놈들은 과
연 안단 말이냐?"
"……."
"영웅에겐 천하가 그의 가치요, 삶일지 몰라도 세상엔 가정
이 주는 소박한 행복을 하늘처럼 신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네 놈들은 대의(大義)라는 명분 아래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파괴하며 다니는 게야."
백무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고독하게 웃
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종종 우리는 삶 중에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만나는 법이다. 소양(小梁), 내가 언제 그들보
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던가? 나를 떠받들고 믿으
라고 외치고 다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은 제멋대로 생각
하고 규정짓고 떠들어댄 것에 불과해. 즉, 그들은 나를 숭배
함으로써 자신들이 쏘아야 할 표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내 앞에서 웃던 이도, 밤에 잠자리에 들어선 꿈속에서 활
시위에 화살을 당기는 게야……. 세상일엔 일장일단(一長一
短)이 있다. 분명한 것은 영웅도 사람이라는 게지……."
녹수옥풍향(야설록 저 / 뫼 출판사 1995년 재간본) 3권 212쪽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낡은 무협 한 질을 뽑아 들었
다. 야설록의 녹수옥풍향(錄水玉風香)이었다.
야설록, 그 이름이 내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중국무협으로 무협읽기를 시작한 후 더 이상 읽을 만한 번
역 무협이 나오지 않을 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80년대 무협에 손을 대게 되었었다. 그때부터 난 중국무협의
지루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재미라는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킨
한국무협에 한 동안 중독이 되어 살아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했듯, 오직 돈을 위해 혐오스런 자기복제를 반
복하는 대부분의 무협작가들 탓에 결국 무협을 손에서 놓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나온 무협이 모두 그렇고 그런 공산품(工
産品)은 아니었다. 2세대 작가들의 수작보다도 더 뛰어난 대
작도 심심찮게 보였던 때였다.
특별히 나는 그 중에서도 야설록을 좋아했다. 굵직굵직한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 태반인 무협소설들 중에서, 야
설록의 소설은 내 감성을 건드려 주었다.
모용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
으켰다고 싶은 순간, 그녀는 어느샌가 좌중에 몸을 세우고 있
었으며, 그 절묘한 신법에 중인들이 탄성을 터뜨리기도 전에
이미 체대는 스르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한데, 오오…… 그 찬란한 모습을 도대체 무슨 말로 다 형
용을 하랴!
너울너울……
흐르는 바람을 서려밟고 오르는 천녀의 옷자락인 양…… 만
가지 꽃의 향기와, 대지의 기운도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축
재해 왔던 것인가…….
온 천지는 단숨에 오색의 보석 같은 광채로 뒤덮이고 하늘
과 땅은 섬연한 여체의 그림자로 가려지고 말았다.
뿐이랴, 환상의 물결처럼 도도히 파도치며 이어지는 황홀한
변식의 조화라니…… 여인은 무술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었
다.
춤은 곧 예(藝)…….
요정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영롱한 꿈의 세계처럼 신비롭
고 은은하며 아름다운 십전(十全)의 예(藝)…….
일찍이 이 땅에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무예의 달인들이 명
멸해 갔다곤 하나, 여인의 몸으로 이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사
람이 과연 존재나 했던가?>
중인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니 아예 혼을 빠뜨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한소리 슬픈 노랫자락이 울
려퍼진 것은.
내 사랑 아픔을 지니었건만 그 아픔 그리지 말라 하고,
내 이별의 독약을 맛보았건만 그 독약 말하지 말라 하도다.
멀리도 세상을 헤매인 끝에 한 사랑을 골랐건만,
그 사랑 이름을 밝히지 말라 하도다.
그녀의 발길에 이슬로 내리는 내 눈물도,
말하지 말라는 듯이 흐르는도다.
간밤에 그 입이 하는 말을 내 귀로 들었건만,
그 말도 나더러 되뇌이지는 말라는 듯하였도다.
왜 그대는 나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던가?
왜 그대는 내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와 헤어지고도 나는,
헤아리지 말라고 온갖 괴로움을 섬기었도다.
이제는 되었다.
네 슬픔의 눈물이 마름하는 날,
나는 스스로 죽음의 칼을 찾으리라.
소리. 노랫소리.
느닷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노랫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사
정없이 잡아 끄는 장중한 비애가 서려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탄식이나 말초적인 슬픔 따위와는 그 류가
틀렸다.
여인이 정인을 그리워하여 흘리는 눈물은 보는 이의 눈물을
적시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이 피리소리만큼 인간의
심혼을 뒤흔드는 뿌리깊은 슬픔이 여인의 눈물에는 없다.
부모의 죽음을 슬포하는 자식이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 또한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하나, 이처럼 영
혼과 육신을 한꺼번에 떨려오게 하는 장엄한 비애가 그런 것
들에는 없다.
노랫소리, 그것은 죽음과 허무 그 자체였다.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슬픔을 압도하는 장중하고도 진지한 고독이 그 속
에 담겨 있었다.
동시에, 희뿌연 인영 하나가 모용지가 흩뿌리고 있는 체대
속으로 뛰어 들었다. 순간, 오색의 광채에 얽혀 한 줄기 짙푸
른 광망이 허공에 서리서리 퍼져 오르기 시작했다.
'비랑이다!'
'주공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돌연 가슴 뻐근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보라. 한 자루 반자 소검을 든 사내는 겨울의 눈꽃처럼 투
명하고 아름답고, 체대를 너울거리는 여인은 햇살인 양 영롱
하고 고아하다.
이코록 어울리는 한 쌍이 이 하늘 아래 존재하리라고 그들
은 감히 상상조차 못해 보았던 것인데……. 두 사람의 상무가
거듭되어 감에 따라 군웅들은 얼굴을 하얗게 변색시켜야만 했
다.
보라, 그들은 펼쳐지는 검과 체대의 조화에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았다. 바다를 보고, 수목을 보았으며 너른 초원과 온
갖 짐승들이 춤추며 뛰노는 모습을 보았다.
<중략>
모용지, 이 성스러운 여인의 두 눈을 축축이 적시는 것은
눈물이다. 사형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면서부터 흐르고
흐르던 눈물.
그녀는 그 눈물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육 년 동안 감추어
왔던 아픈 사랑이며…… 그 사랑을 더 이상 숨기기에는 그녀
의 작은 가슴이 벅차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신들린 듯 춤을 추었다. 심중의 온갖 응어리
를 풀어내듯 전신을 흐르는 춤에 내맡겼다.
백무흔, 이 천하제일인은 웃는다. 하나, 그 웃는 얼굴을 적
시는 것은 영웅의 눈물.
가슴아픈 날들이여…… 허무와 고독의 날들이여…… 천하제
일인의 이름을 걸고 명하노니 이젠 그 껍질을 벗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의 쌍무는 때론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것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절, 봄볕이 일렁이는 초원을 손잡고 뛰어 놀던 그
어린시절을 닮았으며……, 부드럽고 우아하던 쌍무가 돌연,
격렬한 열정의 소용돌이로 휘말리는 것은 서로를 알고 서로를
탐할 때 헤어져야 했던 슬픈 날을 떠올렸음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비단이 찢기는 듯한 소음과 난무하는 격랑
의 회오리로 변하는 것은…… 서로가 지내왔던 고독, 번민,
허무의 회색계절들을 가슴아파함이다.
슬프디슬픈 사랑. 이 위대한 사랑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소년 남궁옥은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먹였으며 취련은 입
술을 깨물다 못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운학비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으며, 구양춘은 부채로 가신의 얼굴을 가렸다.
한 순간, 백무흔과 모용지의 시선이 허공의 한 지점에서 격
렬히 얽혔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소로의 눈물에 빚어지는 가슴을 안고, 그들은 바람 같은 웃
음을 입가에 새겼다. 그것 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춤을 멈추고 우뚝 몸
을 세웠다.
가시나요?
정말 가시나요?
악이란 풀고 나면 더욱 더 공허해 질지도 몰라오.
그 허무를 향해 당신은 한서린 검을 들이미시겠군요…….
하나,
이것만은 알아 두세요.
아무리 쓰라린 고행이요, 가시밭길이라 해도 이 한가지만은
가슴에 담아두세요.
사랑을 가지세요.
슬픈 사랑을 가지세요.
사랑은 곧 구원입니다.
가장 외로울 때…….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여겨지실 때,
단 한 번만 그 사랑을 떠올리세요.
이 세상에는 참아내지 못할 정도의 괴로움이나 슬픔은 없다
는 것을 믿게 되실 거예요…….
<중략>
잔치는 끝났다.
사실, 이 세상에는 끝나지 않는 잔치란 없는 법이다.
녹수옥풍향(야설록 저 / 뫼 출판사 1995년 재간본) 2권 129쪽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야설록을 통해서, 또 그가 창조한 백무
흔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맛보았다. 서원평
과 자의소녀의 사랑이야기에서처럼,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이
야기에서처럼, 백무흔과 모용지의 사랑을 보며 나는 가슴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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