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람과 별무리
작가 : whitbean
출판사 :
우리나라에서 그닥 유명하지 않은 소설 장르중의 하나가 ‘해양소설’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바다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이라면 다 여기에 해당되는데, 멀게는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서에서부터 유명한 작품으로는 백경, 해저2만리, 노인과 바다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다라는 게 워낙 넓고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환경이다보니 이걸 한데 엮는 해양소설이라는 장르가 익숙치 않은 것 또한 당연하다. 그나마 확고한 색깔을 지니는 해양소설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해군을 대상으로 쓰여진 작품들인데, 영화화되면서 우리 나라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진 ‘마스터 앤 커맨더’나 혼블로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과거의 바다 생활과 치열한 해상 전투 등은 분명 독자를 끌어당기는 요소가 있지만, 이건 또 달리 말하면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관을 일일히 설명해야 한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엘프와 오크의 차이는 알아도 돛과 닻의 차이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건 엄청난 진입장벽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바람과 별무리는 본격 해양소설에 입문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우선 그 시작이 대항해 시대 -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즐긴 게임 -의 팬픽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 그렇고, 곳곳에 친절한 설명과 각주, 사진까지 곁들이며 처음 접하는 소재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이 그렇다.
이야기는 이제 막 항해학교를 졸업한 가난한 소녀가 물이 질질 새는 고물배를 이끌고 무역을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대항해 시대 게임의 플레이어가 그러했듯이, 주인공은 물건을 사고 팔아 차익을 남기고, 동료를 모으고, 더 좋은 배를 구입하면서 점점 성장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폭풍도 만나고, 해적도 만나고, 사략선도 만나고, 물가 폭락도 만나고 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그 즐거움을 독자와 나누는 게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
일단 작가의 필력이 상당한데다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개성도 매력적이라 조금 읽다보면 금방 빠져들게 된다. 캐릭터가 워낙 확고한지라 서너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설명하는 지문이 따로 없어도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은 매번 비슷한 등장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밋밋한 소설이 범람하는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더 소중한 장점이 된다.
또 하나의 매력이라면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로 사전 조사가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는데, 그 당시의 시대 배경에 맞는 지역 문화 및 식생의 특징을 살려내기 위해 많은 자료를 참조한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별무리는 소위 ‘성공한 웹소설’과는 거리가 먼 실적을 보이며 독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소설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전투에 못지 않게 배경 묘사와 새로운 문물의 설명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것을 볼 수 있다. 항해, 모험, 전투와 동급으로 동물에 대한 묘사나 문화적 배경 지식, 그리고 먹방(-_-;)이 등장하는 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형태는 아니다. 각각의 요소는 분명 잘 쓴 글이지만 워낙 다양한 소재가 모여있다보니 TV로 치면 영화채널과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과 요리 채널과 동물농장 채널을 섞어서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다보니 모호한 정체성에 더불어 목적도 뚜렷하지 않다. 주인공은 ‘별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하지만 무슨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도 아니고 너무 형이상학적인 목적의식이 아닐 수 없다. 독자가 알아먹기 쉽게 ‘해적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던지, ‘집안 말아먹게 만든 악덕 상인을 혼내주려고 돈을 모은다’던지, ‘소문으로만 무성한 전설의 보물을 찾는다’던지 하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궁극적 목표가 없는지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소설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목적 의식의 부재는 성공적인 소설의 필수 요소인 ‘매력적인 악당’을 만들어 내는 데도 지장을 준다. 지금까지 연재된 바람과 별무리에서 제대로 된 비중있는 악당은 기껏해야 서너명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일관된 배후세력이 있는게 아니라 옵니버스식으로 분리된 개별적 이야기의 악당들이다.
이런 단점들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소설이 핵심 줄거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소재를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 이런 소소한 이야기 중심의 (만화, 카페 알파로 대표되는) 이른바 ‘치유물’ 성격이 강한 소설을 즐기는 방법은 그냥 매일 매일 한편씩 읽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미 800회가 넘는 연재 횟수에, 각 회당 분량이 어지간한 다른 소설 연재량의 두세배는 족히 되는지라, 이 ‘매일 읽기’를 하기 위해 정주행을 하는 건 처음 읽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결론을 짓자면 바람과 별무리는 분명 잘 쓴 소설이다. 흔치 않은 해양소설로 이정도 내용을 일관되게 풀어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항해면 항해, 전투면 전투, 자연환경이면 자연환경, 문화면 문화, 먹방이면 먹방 나름의 특색을 살리며 소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소재를 지닌 (혹은 정체성이 없는) 소설은 다수보다는 기호가 맞는 소수에게 먹혀들기 마련이고, 쉽게 풀어쓰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대다수 독자들은 1부 완결도 보기 전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게 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든다. 구매수는 적은데 비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추천수와 지금도 간간히 추천란에 올라오는 바람과 별무리 추천글을 보면 이 소설이 그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다수보다는 소수의 충성도 높은 독자층을 만드는 이야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차라리 대항해시대2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험이면 모험, 전투면 전투, 요리면 요리, 각각의 이야기에 맞는 주인공을 여럿 만들어서 독립된 이야기로 나누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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