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같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처음 페미니즘을 주창하던 시기만 해도 페미니즘의 목표는 '성별에 의거해서 여성이 제도적인 불이익을 받는 상황을 개선하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투표권 같은 많은 중요한 진보를 이루어냈죠
그 후에 보부아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필두로 한 '실존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에 보부아르의 페미니즘도 그러한 맥락에 있었죠.
여기서 보부아르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지식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실존주의의 모토는 '신으로부터의 인간 해방 및 주체적인 인간형 건설'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 사람에게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왜 존재하느냐?" 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가 있어서 그걸 위해서 삽니다." 하겠죠. 그 당시는 종교에 죽고 사는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근대는 그렇지 않은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신이라는 걸 의심하고 합리성을 더 높은 가치로 쳐주기 시작했죠.
이 시기 즈음해서 전쟁과 기계 문명의 발달 따위가 거듭 가속되었고, 점점 인간성이 황폐해진 서구 사회의 시민들에겐 인간의 삶을 지탱해줄 '신' 같은,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삶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죠.
이 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튀어나온 철학이 '실존주의' 였습니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고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우리는 그냥 사는 거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스스로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삶을 즐길 수 있다. 는 식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존주의의 최고 목표는 인간을 신에게서 건강하게 독립시키는 겁니다. 더 이상 신이 만들어줘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인간이며. 신이 정해준 목표를 위해 사는 인간이 아니라, 직접 설정한 목표를 위해 사는 인간상을 만들고자 했죠. 그 인간상을 긍정함으로써 합리주의의 시대에서 인간의 근거를 안전하게 마련하려 했죠.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가서, 보부아르는 인간이 신에게서 해방되는 실존주의의 일련의 과정을 정확히 여성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인간이 신에게서 해방되듯, '여성은 남성에게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죠. 이런 보부아르의 주장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서 생각할 때 상당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이란 '불완전한 남성'이라는 이해가 팽배했거든요. 여성은 비이성적이고, 더 감정적이고, 생각이 짧고 겁이 많아서 비즈니스를 할 수 없고 남성에게 귀속되어서 존재해야 한다. 는 식의 이해가 많았습니다. (사실 이런 이해는 지금도 상당하죠. 예를 들어 여자 의사한테 내 몸 진료 맡기기는 불안하다거나. 여자는 공간감각능력이 떨어져 운전을 못한다거나.)
보부아르는 당시 시대상을 남성의 권력 아래에 여성이 억압되어 있는 구조로 분석했고, 실존주의적으로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순종적이어야 한다, 얌전해야 한다, 뜨개질을 잘 해야 한다, 감성적이어야 한다, 허리가 가늘어야 한다.' 같은 요구들은 마치 중세 시대에 신의 뜻대로 금욕하고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고 인간을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러한 사회에 대해서 "여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너희 원하는 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여성의 삶은 여성이 직접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일갈했던 것이 실존주의 페미니즘이었습니다.
이것이 현대로 오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세력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는데, 래디컬 페미니즘은 실존주의 페미니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좀 더 행동력이 높은 '운동' 이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존재하는 성차별만이 아닌,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성차별주의' 자체를 뿌리뽑아버려야 한다'는 목표의식은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개인적인 평가로는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저는 남자이지만,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로 살아왔기 때문에 래디컬 페미니즘까지도 긍정합니다만 작금의 현상들을 보면 때때로 그들이 페미니즘의 모토를 잘 모르거나 못 본 척 해버린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지금도 '젠더 권력'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해요. 여성 인권이 아무리 많이 올라왔고 역차별이다 뭐다 말이 많은 시대이지만 여전히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더 살기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고위직이 되면 업무량이 더 많아지고 책임이 더 많아질수도 있죠. 부하 직원보다 '살기 좋다'고 평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권력적'인 것은 명백해요.
여성에게 가해지는 취업 또는 진급 시의 페널티, 경력 단절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과 재사회화하는 제도의 마련, 성범죄 방지 대책 마련, 여성을 타자화하는 시선과 의식의 사회적 개선 따위는 꽤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가 요즘의 페미니즘이 우려스러운 지점은, 그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계급투쟁적인 성격에 매몰되어서 모든 이슈를 남성과 여성의 권력 대결 구도로만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현이 안중근을 김또깡이라고 불러서 욕을 먹은 이유는 역사적 이해가 떨어졌기 때문이지 설현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korean is gay라는 글 때문에 2pm에서 쫓겨났던 박재범이 남성이기 때문에 그 곤욕을 치른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를 보여줍니다.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 라는 보부아르의 메시지는 바람직하고 중요한 철학이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화 되면 파시즘을 낳습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파시즘에 가까워졌어요. 남성 역시 실존주의적 시각 아래에서 "울면 안 된다, 씩식해야 한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따위의 젠더롤에 시달려온 피해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겁니다. 가해자 또는 착취자로만 이해하게 되죠. 그 과정에서 무리한 현상 해석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요. 또한 집단의 권력 대결 구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갓건배 사건 같은 것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페미니즘은 젠더롤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남성 여성 모두에게 필요한 철학이고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하는 철학입니다. (생물학적인 젠더의 차이에 따른 젠더롤을 주장할 수도 있는데, 아직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여 증명할 정도로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늙으면 노안이 와서 눈이 나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안경이 잘못된 게 아니듯 페미니즘 역시 생물학적인 젠더의 이해와 충돌하기보다는 한계를 보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젠더롤에 의한 피해가 여성의 경우에는 목숨이나 사회 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경우들이 많다는 점(범죄 또는 취업, 진급의 불이익)에서, 페미니즘은 아직까지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해서 좀 더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저는 긍정적입니다.
남녀 임금 차이에 대한 이슈도 사실 핀트가 잘못 맞춰져있습니다. 여성 임금이 남성의 60% 수준인 이유는 여성이 힘든 일을 안해서다. 라는 결론에서 이슈가 종결되어선 안 됩니다. 페미니즘은 그 상황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즉, “왜 여성이 힘든 일을 안 하느냐?”로 진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용접을 여성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사회에서도 일깨우는 메시지를 낳게 되죠. 우리가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여자나 트랙터 몰고 크레인 모는 여자를 얼마나 낯설게 느끼는가, 그런 어색함의 시각들이 여고생들이 기계공학 또는 건축학을 전공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닌가? 라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페미니즘은 그걸 할 줄 알아야 해요. 하지만 작금의 페미니즘은 남성의 임금이 더 높다는 지표를 가지고 ‘것 봐라,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결론을 지어버리죠. 이게 남성을 적으로 설정하고 계급 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신주도 페미니즘을 ‘수준 떨어지는 철학. 발달 수준이 맹아적이고 파시즘적.’ 이라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일면 긍정합니다.. 좀 지나치게 가혹한 평이라는 생각은 있지만요.
-아래 글에서 댓으로 달았더니 너무 길다고 자꾸 잘려서 본문 글로 새로 쓰게 되었습니다..(3,000자 이하였는데도 에러 메시지가 자꾸 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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