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ㄱ씨네와 ㅂ씨네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정은 아들이 둘이었고, 갈모(우산)를 만들어 팔고 소금을 받아와서 팔며 살며 지냈지요. 이렇게 마련한 갈모와 소금을 아들들이 장에 내다 팔았는데, 두 집의 입장은 사뭇 달랐습니다.
어느날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러자 ㄱ씨네는 기뻐하면서...
“갈모 팔러 간 첫째 녀석이 돈을 많이 벌겠구나!”
...라고 했지요. 그런데 ㄱ씨네와 달리 ㅂ씨네는 땅이 꺼지도록 탄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금 팔러 간 둘째 놈이 큰일이구먼.”
그리고 며칠 후 햇볕이 쨍쨍 내리쬐였습니다. 그러자 ㄱ씨네는 웃음을 지었죠.
“소금 파는 둘째 놈의 장사가 잘 되겠구나!”
근데 ㅂ씨네는 짜증을 냈습니다.
“갈모 파는 첫째 놈은 어쩌누...”
이처럼 두 가정의 입장은 이렇게 사뭇 달랐습니다.
ㄱ씨네는 작은 일이라도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반면, ㅂ씨네는 모든 일에 비관적으로 보았던 거지요. 그래서 ㄱ씨네는 항상 기쁨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지만, ㅂ씨네는 한숨과 짜증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엘리너 포터라는 작가가 1912년에 ‘소녀 팔리애너’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팔리애너는 고아로 이모네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소녀인데, 이모로부터 냉대를 받아도 삐뚤어지지 않고 밝고 순진하고 상냥한 마음씨를 잃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일이 있어도, 현재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하며 오히려 기쁘고 긍정적인 일들을 찾아냅니다. 심지어 교통사고가 나서 하반신 불구가 되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힘겨운 재활을 ‘놀이’로 생각하고 이겨냅니다.
이러한 그녀의 의지와 노력 때문에 매사에 부정적이고 신경질적이던 이모도 성품이 온화해지고, 행복을 찾았다고 하지요.
이 소설은 당시 출판되었을 때 상당히 히트를 쳤었고, 작가가 죽은 뒤에도 다른 작가가 후속작을 썼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이 되었죠.
뿐만 아니라 팔리애너(Pollyana)라는 단어는 ‘맹목적인 낙천주의자’라는 뜻으로 사전에 기재될 정도였습니다.
실제 일부러 오지 체험이나 서바이벌 등의 역경을 즐기면서 평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편안했으며, 또 행복했는지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래에 올려진 게시물 중에 대한민국이 그대로 외국보다 나은 편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는 것 처럼 외국에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고, 소말리아 보다 나으면 된다는 거냐 식으로 이에 부정적인 입장의 리플도 달렸습니다.
뭐 개개인의 생각이나 입장에 대해서 다르겠지만,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살면 인생이 과연 즐거울까 싶기도 합니다. 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에 비판을 하는 거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고 어리석음을 되풀이 한다...는 말도 있지요.
결론을 말하자면 뭐든지 적당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좋지 않습니다. 분명히 현재 부족한 것을 채워 보다 풍성한 미래를 지향해야 하겠지만, 지금 가진 자산 조차도 부정하고 폄하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어느 생존자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이나 사상적인 의지보다 수용소 한 귀퉁이에 핀 들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생존의 희망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맨바닥에 군인들의 군화발에 채이고 짓밟히면서도 이내 살아나서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저렇게 살아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하지요.
위에 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애인에게 차여서 망연자실해 있던 사람도 창밖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리어카 엠프 소리와 골목에서 애들 노는 소리를 듣고 그래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지요.(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깁니다.)
희망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으며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비관적인 생각을 해서는 눈앞에 빤히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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