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저는 한창 도올선생의 책에 빠져 있었습니다. 입문은 당시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던 [도올세설] 칼럼이었고요. 전문대 도서관에서 [여자란 무엇인가]를 빌려서 읽고,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명 깊게 읽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도 읽었고,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 등도 읽었죠. 아무튼 제가 읽은 도올선생 책이 23권인가 됩니다. 도올선생은 이리 원광대 한의학과를 졸업해서 한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의학과 관련된 책을 내셨는데, 제가 2권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동의보감]에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 나옵니다. 20~30년 전의 기억들이라서 지금 헷갈리는데요, [도올세설]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합니다.
[동의보감]은 원래 한자로 된 책입니다. 이걸 한글로 번역한 분이 운전 허민 선생이라고 합니다. 허준 선생과 같은 종씨이고, 아마 직계 후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기억이 가물가물) 하여간 허민 선생이 번역한 원고를 남산당이라는 출판사에서 가져가서 출판한 모양입니다. 번역자 표시가 제대로 안 되었다고 도올선생이 화를 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뒤에 남산당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동원해서 번역을 새로 했을 수도 있겠네요.
1996년엔가 저도 남산당의 [동의보감]을 읽어 봤습니다. 교과서 읽듯이 읽은 것은 아니고, 대충 훑어 보듯이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도올선생의 말에 따르면, 동의보감에 나오는 처방 중에 허준 선생이 만든 처방은 없다고 합니다. ^ ^ 모든 처방이 다른 의서에 나온 처방을 취사선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증상과 증상에 맞는 처방을 설명하는 식으로 계속 되는데, 출처를 간단하게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증상에는 어떤 약을 쓰는데, 그 처방의 출처는 ‘천금방’이라는 책이다... 이런 식이죠.
둘째 누나 부부는 한의사입니다. 둘째 자형에게 한의학에 관해서 몇 토막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한의학에 있는 유파입니다. ^ ^ 무공에 따라 문파가 갈리듯이, 한의사들도 주로 사용하는 책에 따라서 파가 갈려 있다고 해요. 동의보감을 이용해서 치료하면 보감파, 황제내경을 이용해서 치료하면 내경파, 의학입문을 이용해서 치료하면 입문파라고 하네요. 그 외에도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을 받아들여서 치료하는 소수도 있고, 수지침을 사용하는 소수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동의보감]이든 [천금방]이든 그 처방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아마도 여러 경험에서 나온 처방일 겁니다. 누가 어떤 증상이었는데, 이 처방을 써 보니 병이 나았다... 이런 경험담이 쌓여서 하나의 진단--처방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겠죠. 왜 낫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 처방대로 약을 먹으면 병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이유를 음양오행에서 찾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참으로 드라마틱합니다. 우연히 푸른 곰팡이가 피고, 세균을 죽인 것을 발견하고, 푸른 곰팡이 속에 있는 특별한 물질을 정제해 내고, 그것이 세균을 죽이는 데에 특효를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물론 나중에는 페니실린 쇼크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요. 서양에서 만들어진 의학은 이처럼 경험적인 처방에서 특별한 성분을 분리해 냅니다. 이 성분 때문에 이런 치료 효과가 나온다....는 식이죠.
하지만 한의학에는 경험적인 처방은 있는데, 그게 어떤 성분 때문인지를 규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의학 의서에 나오는 처방들 중에서 이 처방 저 처방을 바꿔서 써 보면서 치료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의사들도 이 처방에 들어 있는 약재가 왜 들어갔는지, 왜 하필 이만큼 넣어야 하는지, 분량을 바꾸면 어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1996년이던가요,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해서 한의학 논문들을 검색해서 그 중의 일부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읽었죠.. ^ ^ 저는 한자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고, 고1 이후로 공부와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혹시 의사나 간호사나 약사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하시면 안 됩니다. ^ ^ 대부분의 한의학 논문이 어떤 처방을 쥐나 토끼에게 투약해서 나중에 분석을 돌렸더니, 이런저런 상태였다는 식의 논문이었습니다. 요즘 논문은 좀 달라졌을라나요? 글쎄요...
저는 한의사들의 카페 두 군데에서 ‘한의학의 과학화’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문외한인 주제에 저런 거창한 제안을 했으니, 어찌 보면 우스운 꼴을 자초한 것이고, 어찌 보면 문외한이 이러자 저러자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화가 덜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의사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난과 비판이었습니다. ^ ^ 그 때 제가 제안한 방법 중의 하나가 ‘한의학을 한글로 하자’는 것이었죠. 한자로 문장을 쓰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다르게 번역될 수가 있지요. 한글로 쓰고, 혼동의 여지가 없도록 쓰면, 한의학의 과학화에 많은 도움이 되고, 후배 한의사들이 공부할 때도 참 편할 것입니다.
음양오행으로는 인체에서 일어나는 생리현상과 병리현상과 약리현상을 하나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의학에서 음양오행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경험에서 나온 진단-처방과 침술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처럼 침술의 효과를 경험해 본 사람은 절대로 한의학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서양에서 만들어진 의학이 밝혀내지 못한 신비가 침술에는 있습니다. 의학이 유일하고 전부라고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탁기에 관해서 질문해 놓은 글을 읽고,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라서 이렇게 3개의 글을 썼습니다. 재미로 읽고, 그냥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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