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뛰어나다는 말은 크게 두가지 경우에 쓰입니다.
참신하거나, 아니면 진짜같거나.
참신하지도 않고 허무맹랑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참신하다는 것이 처음 접하는 신선한 것을 의미한다면 진짜 같다는 것은 하나하나가 체계적이고 섬세하며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상상력의 한계는 본본이 가진 인지범위의 한계 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인지하죠. 꽃을 예로 들면, 꽃의 모습을 보았거나, 혹은 꽃이란 것에 대해 들었거나, 오직 간접이든 직접이든 경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상을 접합니다. 만일 꽃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 했는데 꽃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 한들 그건 우연의 일치겠죠. 꽃이란 사물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처음으로 꽃을 접한다면, 그 자신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이 나타난 겁니다.
보지못하면 제대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허나 보는 것 보다 직접 경험하고 느낀 사람의 상상이 본 사람 보다 더 뛰어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어요. 치매가 있는 증조모와 께 생활해 보지 않은 사람들음 그 고생을 모릅니다. 그냥 '대충 이러이러해서 힘들겠구나'라고 이론만 알고 있을 뿐이죠. 여태후가 인간돼지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장면을 직접 보지 않는 한 사람의 상상력은 곳곳이 누락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상력이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 그대로 상상이기 때문에 와닿지가 않는 겁니다.
예전에 제 증조모가 치매라 한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기억이 오락가락 한다는 말보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소변 못가리고 심심하면 소리지르고 난리치고 지랄발광하고, 효자손은 어서 구했는지 가끔씩 아무이유 없이 들고나와 저와 제 동생을 후려쳤습니다. 그 인자하시던 증조할머니가 그냥 미친 마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느낀 감정과 분위기,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과 낯선 현실은 도저히 언어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몇 일 전에 시골의사 박경철이 말한 사연을 올렸습니다. 저는 평화로운 삶을 보냈고 삶은 인간 같은 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말그대로 상상이 안됩니다. 제가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이라 느낀 점은, '설마 아무리 치매라고 제 손자를 죽이겠어?'같은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치매환자를 마주한 경험이 있는 저에게, 그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다른 사연과 비교하여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러 의미로요. 비유를 하자면 잔에 물이 가득차서 '더는 물을 따르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쏟아내는 끝내는 물이 넘쳐흐른 기분입니다. '물이 가득찬 잔'만을 본 사람에게 '물이 넘쳐 흐르는 잔'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지만, 어느정도는 예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어다니는 아이에게 다짜고짜 '날기'를 가르친다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이치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서서 걷는 것 정도는 예상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요.
엽충님께서는 상상이 현실을 뛰어넘는다 하셨습니다만, 단순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상상력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잔혹한 시체 사진을 보고 놀랄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짜 그 시체를 보고 만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죠.
미디어 매체 등에서 부모를 찔러 죽인 자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그런 일이 있지만 내 주변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보다 동생이 살아있는 고양이를 찢어죽이는 것이 더 끔직합니다. 즉, '현실이 4이고 상상이 10이다' 라는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했던 그저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했을 뿐이죠.
상상이란 사람이 인지하고 있는 현실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하며, 그러한 인지범위를 벗어나는 충격적인 경험를 하는 것으로 사람은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전에 올린 글의 댓글을 보다 문득 생각난 것을 아무렇게나 막 써봤습니다.
Comment ' 2